90년 언론민주화투쟁의 역사를 잊지 말라

몇 십 년 동안 KBS 작가실에서 글을 썼다. 60. 70년대부터 중앙정보부(이하 중정)가 주는 특별고료를 받으며 ‘김삿갓 북한 방랑기’를 쓰고 살았다. 지금도 내 작가경력에서 빠지지 않는 ‘감삿갓 북한 방랑기’다.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516혁명 축하공연’의 아나운서 중계대본도 썼다. 육영수 여사 서거 ‘조시’도 썼다. 쓰라면 썼다.

국민투표 지지 글을 쓰라는 중앙정보부의 압력 성 당근으로 호화판 산업시찰을 했고 일류호텔에서 잘 먹고 잘 잤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인데 명찰 단 우리를 보면 경찰이 거수경례를 부쳤다. 여름 철 댑사리 밑에 개처럼 늘어진 팔자였다. 독재정권의 충견이었다.

필동 코리아하우스에서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방송작가를 초대했다. 장관이하 고위간부들이 현관에 도열해서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밥 먹기 전 장관이 인사를 했다.

“방송작가 한 분이 대학교수 천명보다 더 영향력이 큽니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듣지 않아도 뻔하다. 글 솜씨 발휘해서 국민투표 지지하라고 국민들에게 사기 치라는 것이다. 술에 밥에 진탕 얻어먹고 나올 때는 봉투 하나 씩 챙겼다. 당당하게 받았고 액수만이 관심사였다.

오장육보가 완벽하게 썩었다. 별의 별 소문이 다 돌았다. 어느 KBS 기자는 민주공화당 원내 총무 방송 끝내고 촌지를 받았는데 입을 딱 벌리고는 닫지를 못하더라는 것이다.

방송관련 KBS 간부의 케비넷 안에는 빳빳한 현금이 수북이 쌓여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다른 방송사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 때는 총칼로 다스리던 독재 시대였으니까. 부패한 정권과 부패한 언론이었다. 영수증은 전혀 필요 없었다.

요즘 젊은 기자들은 나이 먹은 간부들을 ‘구악’이라고 한다. 요즘 모 뉴스전문 방송사 사장 예정자도 구악이라고 웃는다. 물론 나도 구악이다. 그 때 생각만 하면 얼굴이 벌게진다. 그 짓해서 자식들 공부도 시켰으니 자식 보기도 부끄럽다.

인간에게 가장 불편한 것 중에 하나다 양심이라고 하던가. 그러나 양심 찾으니까 참 편했다. 양심이 깨어난 것은 노무현 덕이고 KBS의 90년 민주언론 투쟁을 겪은 덕분이다.

1990년 4월 KBS 방송민주화 투쟁당시 난 KBS 본관 작가실에서 글을 썼다. 방송국이 함성으로 들썩들썩 했다. 언론민주화 쟁취 투쟁이었다. 노태우의 6.29항복 선언이후 가슴속에 묻혀있던 방송민주화의 불꽃이 점화된 것이었다.

서기원 사장을 거부하는 언론노조의 투쟁은 치열했다. 본관 민주광장의 벽면은 대자보로 여백이 없었고 광장은 북소리와 함성으로 꽉 찼다.

‘서기원 사장님. 당신은 작가입니다'

KBS 민주광장 벽면에 붙었던 대자보의 제목이다. 이제 고백한다. 내가 쓴 대자보다. 시인인 내 딸은 격려 시를 썼다. 들통 났으면 제3자 개입으로 잡혀 갔겠지만 어느 누구도 발설하지 않았다. 정말 치열했다.

땡전 뉴스를 하던 박성범도 노조원들의 저항으로 고생 많이 했다. 이윤성도 마찬가지다. 이름 줄줄이 대 보면 부끄러울 것이다.

사장 서기원이 경찰 투입을 요청했다. 전경들이 들이 닥쳤다. 직원들이 신분증을 보여주고야 들어가는 판이 됐다. 그 때 나는 참으로 참담한 광경을 목격했다. 요즘도 아침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여성 아나운서가 전경을 매섭게 질타했다.

“내 집에 들어가는데 너희들이 무슨 권리로 신분확인이냐.”

거침없었다. 당당했다. 남자 직원들 많이 창피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 아나운서를 보면 존경하는 마음이 든다.

이임호 기자가 죽었다. 민주열사다. 안동수 김철수가 구속됐다. 면회를 갔다. 그렇게 의젓할 수가 있는가. 그렇게 폼 날 수가 있는가. 전쟁은 끝도 없이 계속됐다. 그 대 구악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뒤에서 노조파괴 공작을 했다. 누구인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나중에 밝힐 것이다.

처절한 투쟁 끝에 얻은 KBS의 방송민주화였다. 좀 더 기억할 것이 있다. KBS직원들이 겪은 모멸의 시대가 있었다. 서울대 박종철과 연세대 이한열(후에 열사로 부름)이 민주제단에 목숨을 바치고 온 국민이 궐기했을 때 언론은 버림 받는 이방인이었다.

정상적으로 취재를 할 수 없었다. 분명히 목격했다. KBS기자가 군중들로부터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똑똑히 봤다. 시위군중이 어느 언론사 기자냐고 물을 때 KBS기자는 대답을 못했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신분이 들통 나 불상사나 생기면 어떠나.

5.18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불 탄 광주 KBS사옥과 MBC가 생각났다. 취재를 하던 KBS차량은 깃발을 떼고 다녀야 했다. KBS 젊은 기자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지금 KBS간부로 있는 후배는 그 때 참담했던 심정을 지금도 말한다. 그게 그 시대 KBS의 모습이었다.

KBS가 살아났다.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지만 그 10년 동안에 KBS가 살아났고 대한민국의 언론이 살아났다. 조중동 역시 다른 의미로 살아났다. 방종이다. 독재정권 시절 언론의 자유를 입에 담을 수나 있었는가. 조중동의 배은망덕이다.

지난해 8월 한국기자협회는 창립 42주년을 맞아 전국 기자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신뢰하는 언론이 없다고 응답한 이들은 45.0%에 달했다. 그래도 가장 신뢰받는 언론은 한겨레로 15.0%였고 KBS(12.3%), MBC(5.0%), 경향신문(5.0%) 이 뒤 따랐다.

자칭 1등 신문이라고 저마다 폼 잡는 조선일보(4.0%), 중앙일보(3.7%), 동아일보(2.0%)의 신뢰도를 다 합쳐도 한겨레는 물론이고 KBS를 못 따라온다. 격세지감이 들지 않는가.

광우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문화제가 시청 앞 광장을 밝힌 후 집회 참가자들은 여의도로 향했다. 여의도 강가에서 바람 쐬며 놀자는 것인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민주방송을 지켜야 한다. 민주방송인 KBS를 지켜야 한다는 굳는 결의였다. KBS를 독재정권의 시녀로 부려 먹었던 저 암흑시절의 땡 전 뉴스로 되돌리려는 이명박 정권의 음모를 분쇄하자는 의지였다.

KBS와 민주방송을 지키자는 수많은 촛불이 타오르고 있을 때 KBS본관 창문에서도 촛불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KBS 구성원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스스로 몸을 태우는 촛불이었다.

바람 부는 대로 구름 흐르는 대로 시류에 얹혀 살아가는 인생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KBS라고 다를 것이 있겠는가. 이명박 정권이 임명할 사장에게 줄을 대서 온 갓 아양을 떨고 있는 인간들의 면면들이 속속 들어나고 있다.

오비이락이라고 한다. 까마귀 날자 빼 떨어진다는 사자성어다. 생각이 바른 사람은 난세에 처신을 조심한다. 김홍 부사장이 사의를 표명했다고 한다. 본부장들이 흔들린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항상 무한책임을 느끼고 있다. (책임이) 필요할 경우에 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의를 표명한 부사장의 말이다. 무한책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시 KBS와 정연주 때문에 이명박 정부의 인기가 하락됐다는 최시중의 주장에 무한책임을 느낀다는 것은 아닌가. KBS노조위원장 박승규도 대단한 성명을 냈다.

“부사장의 결단을 환영한다." "정작 물러나야할 자는 김 부사장이 아니라 정연주 사장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박승규는 이번 시위가 '촛불 집회 참가자들이 KBS를 지켜달라'고 한 PD협회의 한겨레 경향신문 광고로 촉발됐다"고 했다. 한 술 더 떴다.

"정연주를 둘러싼 일부 사내 정치 세력들이 편향된 정보를 제공해 순수한 촛불의 의미를 오도하려 한다면 이는 결코 가볍게 봐 넘길 수 없는 사안이다."

혹시 노조위원장은 지금 KBS 광장을 밝히고 있는 만 여 명의 간절한 소망의 촛불이 정연주를 몰아내려는 KBS노조를 지지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일까. 밤을 새우는 만 여 명의 시민이 정연주와 KBS선동에 넘어가는 바보 멍청인가.

한국의 민주방송이 풍전등화 같은 운명일 때 사장축출 만장이나 세워놓고 국민의 조소나 사는 KBS노조 위원장은 도대체 KBS의 민주언론투쟁사를 읽기나 했는지 묻고 싶다.

KBS와 정연주가 광우병 촛불 시위의 배후라고 뜬금없이 감사나 하고 소환장이나 보내는 언론장악 작태에 동조하는 것이 노조위원장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불쌍하다.

인간은 저마다 저 잘난 맛에 산다고 한다. 직업 중에 가장 자존심 강한 직업군이 누굴까. 언론인이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기자들은 똑똑하다. 똑똑하지 않으면 기자 노릇 못 해 먹는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자존심 상하면 못 견딘다. 거기다가 어디를 가나 대우를 받지 않은가. 기자님 무서워하지 않는 간 큰 인간 있으면 나와 보라고 술 취해 큰소리치는 후배가 있다. 온당한 말은 아니지만 맞기는 맞다.

늘 드는 비유지만 일제 때는 기자가 판사노릇 까지 했다고 한다. 이웃끼리 시비가 붙으면 가자를 찾아가 누가 옳으냐고 판단을 구했고 손을 들어주던 군소리 안 했고 한다. 동아투위위원장을 한 김태진의 말이다.

지금은 어떤가. 똑똑한 것도 인정하고 판단력도 있지만 기사 쓴 것을 보고 바가지로 욕먹는 기자들이 있다. 청계천 소라광장에서 목격한 한국 언론의 비극적인 현장을 보자.

“동아일보 불 꺼” “조중동 종이가 아깝다.” “조중동 폐간.”

이름은 안 밝히지만 나를 볼 때 마다 얼굴을 붉히는 몇 몇 조중동 기자들이 있다. 그들의 마음을 안다. 양심이다. 기자는 사실과 진실을 쓰지 않으면 생명을 잃은 것이다.

생명을 잃은 기자들이 너무나 많다. 국회의원 배지 달았다고 좋아할지 모르나 기자로서 출발했던 정치인들이 자신의 과거를 한번 돌아다보라. 부끄러움 없는 삶인가. 내가 알고 있는 KBS의 노조 위원장들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언론민주화를 지키는 데 노력을 했다.

고희일 안동수 조달훈(작고) 정초영 전영일 오수성 현상윤 김영신 박승규 마권수 박상재 이용택 김영삼.

이들은 KBS의 방송민주화를 위해 공헌했다. 그렇다면 오늘의 KBS 노조는 어떤가. KBS 촛불 집회를 보는 시각은 어떤가.

“너무 고맙다.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다. 마음이 든든하다. 반면 우리가 스스로 굳건히 지켜야 할 KBS를 이렇게 많은 사람이 대신 나서게 한 우리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

“노조가 구호로는 방송 독립성 사수를 외치지만 이걸 누가 믿겠느냐. 어제 감사원 감사가 들이닥쳤을 때 노조가 낸 성명서의 결론은 정연주 퇴진이었다. 이는 전형적 ‘양두구육이다.”

PD협회장을 역임한 KBS 이강택 PD의 말이다. 그는 현 노조를 양두구육이라 했다.

“KBS는 현재 전쟁터다. 수구보수 정권이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MB정권은 반성한다고 하면서 뒤로는 한국방송광고공사, YTN 사장을 다 자기사람으로 앉혔고, KBS에는 감사원 감사, 검찰수사 등 5공 시절에서나 하는 공작정치를 벌이고 있다” “공영방송 KBS를 우리가 지켜주자”

언론노동조합 전 부위원장과 전 KBS노조위원장을 지낸 PD 출신 현상윤의 절규다.

“우리는 정연주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다만 정연주 사장이 물러나면 이명박의 똘마니들이 낙하산으로 오게 되고, KBS가 조중동과 똑같은 역할을 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아고라를 보고 KBS 앞 촛불집회에 동참한 시민의 말이다. 맞다.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든 언론특보가 KBS사장이 된 후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는 국민의 소리를 제대로 보도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이명박 정부가 KBS 사장에 김인규를 내정했다는 말은 이미 구문이다. 역시 구문에 속했던 구본홍의 YTN 사장은 99.9% 결정되지 않았는가.

10년 만에 정권이라는 고기 덩어리를 차지하고 서로 찢어먹는 맹수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참는다고 하나 그것이 바로 국민의 귀와 눈을 가린다는 데 문제가 있다. 국민을 바보로 만들어 놓고 데리고 놀자는 심보인가.

다시 말하지만 언론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사기꾼이다. 생명을 잃은 언론과 기자가 왜 필요한가. 왜 조중동을 쓰레기라 하는가. 왜 조중동을 폐간시키라는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는가. 진실을 말 하지 않고 사실대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그들은 광주 5.18 민주항쟁을 왜곡했고 1년 전 참여정부 시절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을 끔찍하게 보도하다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입을 다물었다.

뿐만이 아니라 촛불을 들고 항의하는 국민들을 친북좌파 세력의 선동에 놀아나는 무뇌아들로 폄훼했다. 이것이 언론과 기자들의 정도인가.

KBS와 MBC는 사실보도를 했는데 선동이라 한다. 사실보도가 왜 선동인가. 우리 자식들이 광우병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입 틀어막고 있으면 그게 정말 문제다. 사실보도를 시비하면 그게 선동이다. 참 나쁜 조중동이다.

언론을 장악해서 손발처럼 써 먹을 수 있다는 발상이 기막히다. 군사독재 시절 우리는 KBS의 땡 전 뉴스를 보며 TV수상기를 부셔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기사 써 넘긴 후 펜대를 꺾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기 힘들었다는 KBS기자들의 술회를 듣는다.

이제 KBS는 언론 본연의 자리에 서 있다. 목숨을 걸고 얻어 낸 언론자유다. 그러나 다시 백척간두 위기 앞에 서 있다. 매일처럼 KBS 앞을 메우고 촛불을 밝히는 국민들의 <민주방송 수호>의 절규를 KBS 구성원은 국민과 함께 외쳐야 한다.

KBS가 다시 야만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국민을 또 다시 바보 천치로 만들 수는 없다.

KBS를 지키자는 국민의 촛불은 영원히 꺼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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