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조선일보'

▲ 안티조선을 외치는 생활정치네트워크 국민의힘 ID 문고리 작

사실 안티 조선운동과 언론개혁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지지를 보내지만 "왜?" 라고 물으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무척 소수이다. 이제 지난 세월, 자신들에 의해 조작되고 가려져 온 한국 언론의 숨은 역사를 살펴보자


기자란 "기회주의자"의 준말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그리고 이 시대 굴절된 언론을 바로잡기 위해 언론개혁은 꼭 필요하다고들 주장한다. 그만큼 한국의 언론사는 시대를 불문하고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 보수적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가장 진보적인 신문으로 당시의 민중을 가장 잘 대변했으리라 생각해 온 독립신문까지도 우리가 아는 언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 이 시대 가장 보수적이라 비판받는 조선일보까지도 일제 치하의 독립군과 의병들을 감히 비판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 가장 진보적 신문이라 일컫는 독립신문에서조차 의병과 독립군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했으며 명성황후 시해에 맞서 일어난 의병들을 '비도- 비적의 무리'라고 표현했고 스스럼 없이 그들 호칭 뒤에 '놈'자를 붙인 웃지 못할 일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속성을 가진 우리 신문의 원인은 잘못된 태생에 있다. 1920년대 친일실업인단체와 매국 행위로 일본으로부터 후작이라는 작위를 받은 박영효를 앞세운 김성수가 각각 일본제국의 혜택과 후광으로 신문을 만들기에 이른다. 바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이다.


그리고 친일발행인협회회원들은 시사신문을 만들게 되는데 조선중앙일보의 전신으로 이 역시 초기엔 친일을 주창했지만 후에 여운형선생이 사장을 맡게되면서 고 손기정옹의 가슴의 일장기삭제보도 사건으로로 폐간되기까지 작게나마 민족정서를 대변하는 유일한 신문이 된다.

이렇듯 태생부터 잘못된 우리의 동아, 조선일보- 그나마 김성수전회장이 맡은 동아일보는 친일을 하더라도 국민의 눈치를 보는데 반해 조선일보는 아예 내놓고 친일로 나서 이 것은 구독자가 없었던 것이 원인으로 애꿎은 발행인이 바뀌게 되는데, 이 때문에 한 때 조만식, 이상재선생이 조선일보의 사장직을 맡기도 했고 그 시기 잠깐동안 민족 정서를 대변하는 듯하고 구독률도 좀 나아졌으나 현재의 방회장 일가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뒤부터는 해방까지 변함없이 극렬한 친일을 고수하게 된다.


여기서 특히 조선일보의 친일 행각을 좀 짚어보자
아예 기치를 내걸고 친일을 외친 조선일보는 매년 새해 첫날에는 조선일보라는 자신들의 제호 대신에 일장기를 올렸다.


그리고 천황과 황태자의 생일이나 일본의 국경일 역시 자신들의 제호대신 일장기를 올렸다. 또한 대동아전쟁을 앞둔 일본이 물자절약의 일환으로 일본 본토 각 현마다에 한개의 신문만을 두고 모두 폐간시킨다.


조선 역시 일본의 속국임으로 조선총독부신문만 남기고 모두 폐간시키는데 이 때 일본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보상해주는 돈은 각각 100만원씩으로당시 자살전투기 한대값이 17만원이었으니 지금의 환율로 따지면 수천억으로 추정되며,일본이 방, 김의 친일을 얼마나 높이 샀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일까? 특히 이 시기의 조선일보 방회장 일가의 친일은 눈부시다. 돈을 받은 동아일보 김회장이 만주로 나가 기업가로 변신, 사업을 했는데 조선의 방회장은 언론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조광'이라는 월간 잡지를 만든다. 바로 이 '조광'은 현'월간조선'의 전신으로 "조선 오천년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일은 1910년 한일합방"이라고 기술하는 '권두언'이 가관이다.


또한 당시 일본과 적대적 관계였던 미국을 격렬하게 비난하며 반미의 최전선에 섰다. 그래서일까?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은 창간호가 없다. 아니 자신들의 친일 행각을 덮기 위해 스스로 발행된 신문을 없앴을 수 있다. 그리고서 지난날의 만행을 국민 앞에 사죄하기는 커녕 자신들의 음침하고 어두운 과거를 애국으로 날조, ..................지금에 이른다.


물론 '조선일보'나 월간지 '조광'보다 덜하지만 동아일보의 친일 역시 만만치 않다. 여운형선생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 기자가 손기정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을 내자 이에 동아일보의 이길용기자 역시 손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고 기사를 내보냈는데, 신문이 발행된 다음 날, 이 사실이 총독부에 알려지자 김성수회장은 총독부를 찾아가 동아일보 전체 입장이 아니라 이길용기자 만의 입장이라며 머리조아려 사죄하고 담당기자를 사직시킨다.


그리고 당시 동아일보 보다 먼저 일장기를 지운 조선중앙일보를 고변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조선중앙일보는 정간되었고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고 폐간된다.


또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들을 내세워 대동아전쟁에 자원하자는 기사를 앞 다투어 냈고 이에 조선의 철없는 젊은 학도들은 언론에 부화뇌동해 자발적으로 전쟁에 자원을 한다.


간교한 일본은 전쟁 중 학도병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입대시키기 전에 무조건 결혼을 시켰고 부인이 임신을 한 후에야 비로소 전쟁터로 내보냈다.


일본군의 총알받이인 우리 조선의 학도병들! 그러나 조선일보의 친일은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자원병으로서 첫 사망자인 이인석학도병을 "영예의 전사자 1호" 라 영웅화시키고 그의 유복자를 가진 나어린 청상과부를 찾아가 "나는 슬프지 않아요! 내 남편을 조국에 바쳤기 때문에..."라는 인터뷰를 유도, 학도병들의 더 많은 자원을 부추긴다.

또한 조선일보의 사고는 "대일본제국의 신문으로서 알림"이라는 내용을 빠뜨리지 않았고 이 시기 조선일보의 친일은 극에 달하는데, 우리는 이 시기를 역사의 암흑기라 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 그러니까 1940년에서 1945년 해방전까지 사상범은 급증했고 학생들의 노동현장 취업이 많아져 회사마다 노동쟁의가 확연히 늘어난 상태로 오히려 이 시기 일본의 박해와 언론의 친일에도 불구하고 민족의식이 더 투철해졌고 투쟁의 범위가 커졌는데 이것은 당시의 일본의 공식통계로도 증명이 된다.

1945년 8월 15일 - 48년전의 내일, 드디어 조선은 해방을 맞는다. 그러나 조선의 지식인과 신문은 잠행하듯 깊은 침묵에 들어간다. 미당 서정주 선생의 "일본이 그리 쉽게 무너질 줄 몰랐다"는 변은 지금도 회자되는 지식인의 愚다.

해방 후 그동안 기죽어 있던 조선의 언론들이 기지개를 펴는데, 해방일보와 조선공산당보, 그리고 당시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내는 '조선인민보'와 '현대일보' '중앙신문' '자유신문'이 대중의 인기를 얻으며, 우리 민족의 고통과 한숨, 기쁨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도 잠시,한반도에 미군이 진주하고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이 땅엔 다시 매국신문의 탄생 조짐이 생긴다. 바로 미육군중장 '하지'가 "미군정을 용인하지 않는 신문을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선를 한 것이다.

그런 틈을 타서 조선과 동아일보 사주들은 뻔뻔함을 잊은 채 이번에 미국에 빌붙어서 친미 앞잡이 노릇을 하며 신문 발간의 꿈을 펴는데, 이 때 자신들의 꼭뚜각시 노릇을 해 줄 신문을 찾았으나 여의치 않던 미군정이 친미를 맹세하는 김씨와 방씨 일가에게 신문을 허락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그해 1945년 11월 1일과 11월 말에 각각 조선, 동아일보가 복간된다. 그러나 불과 5년 전까지의 조선일보의 만행을 어찌 잊으랴? 이론과 실천으로 무장된 인쇄소 노동자들이 조선일보의 인쇄를 거부하게 되는데 미군정은 직접 인쇄소를 지정해서 신문을 발행시킨다.

하지만 이마저 순탄치가 않았다. 미군정 찬양으로 일색인 조선일보 복간호를 읽은 인쇄소 노동자들이 다시 조선일보 인쇄를 거부함으로써 조선일보는 복간 다음날인 두번째 11월 2일자 신문을 내지 못했다. 바로 그 조선일보 첫머리에는 "미 군정의 도움으로 본보가 복간되노라"라고 적혀 있었다.

이로서 조선과 동아는 극렬한 친미언론이 되는데 대동아 전쟁 당시 일본과 맞선 미국을 격렬히 비난하던 때와는 정 반대 입장으로 이런 언론의 탄생은 우리민족의 불행의 시작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프랑스는 얼마나 현명한가? 1945년 5월 - 그러니까 조선이 해방되기 3개월 전 이차대전에 패배한 독일 나찌가 물러가고 파리가 해방되었다. 그 때 프랑스 당국은 대대적으로 친나찌 색출에 들어갔는데 아주 엄격한 잣대를 기준했다.

단 한번만이라도 신문이나 잡지 등에 나찌를 찬양한 글을 올린 사람들을 모두 색출해서 사형시켰는데, 그 숫자가 무려 만명에 달했다. 세계에서 가장 관용이 많은 나라로 알려진 프랑스 - 많은 이들이 그것은 너무나 가혹하지 않느냐고 비판하자 프랑스 당국은 " 총알은 단 한사람을 죽이지만 신문에 기고된 글은 수백, 수천, 수만명을 죽일 수도 있다, 해서 용서할 수도 되어서도 안된다" 고 했다. 세계에서 가장 관용이 적다는 조선의 상황과 큰 대비를 이룬다.

조선과 중앙일보 - 재력 튼튼한 이 두 신문이 친미노선을 지향하자 미군정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를 싣던 당시 1위부터 4위까지의 조선신문들 - 조선인민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자유신문- 을 모두 접수하고 발행인과 편집국장을 구속, 이어 폐간시키고 만다. 그 후 조선일보는 자신들의 추악한 과거를 숨기기 위해 더욱 더 친미에 열을 올렸으며 아예 반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분단국가 수립에 앞장 섰다.

그리고 5.16혁명과 유신을 지나 전두환정권의 5.18까지 한층 더 정치지향적으로 변했는데, 박정희정권의 독재를 찬양하고 시월유신을 구국의 결단으로 칭송하는가 하면 민족정신과 민중의 울분 따위는 철저히 외면했다. 바로 이 시기, 일제에 이어 무소불위의 미국과 독재정권에 빌붙어 조선과 동아일보가 대한민국 대표신문으로 우뚝 자리 매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도 깨어있는 기자들이 있었다. 잘못 탄생한 군사독재정권은 자신들을 합리화를 위해 인혁당 사건을 조작발표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울분을 느낀 동아일보 기자들이 '검열거부'와 각 신문사마다 파견나와 감시 근무를 하는 '중앙정보부직원의 퇴출'을 외치며 "자유언론실천"을 선언한다.

이 때가 1974년 10월 24일, 이른바 '동아사태'이다. 사건은 일단락 되었지만 1975년 3월 동아일보 발행인 김병관은 150여명의 기자중 133명을 해직시키는데 이 때, 많은 인재들을 잃게 되는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에 밀리기 시작했고 그 뒤 2위로 뒤쳐져 오늘에 이른다.

정부 역시 기자들의 외침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이른바 보도지침으로 더욱더 언론을 탄압하게 되는데 "권인숙 성고문사건" 언론 탄압의 가장 좋은 예이다. 권인숙의 자백을 받기 위해 당시 부천경찰서 형사 문귀동이 권인숙 조사과정에 성고문을 했고 그녀는 양심선언을 하게 된다. 이에 날조라고 비판하던 정부는 여론이 점점 나빠지고 언론이 사실보도를 시도하자

1986년 7월 검찰을 시켜 사건진상을 조사하는데, 당시 문제의 부천경찰서를 조사한 검찰은 "조사 결과 성고문은 없었다. 이 사건에 대해 1면 보도는 절대 금지할 것이며 '면의 크기'는 신문사 재량에 따라서 하되 사건의 제목은 검찰이 말한 내용중에서 뽑아 쓸 것 " 이라는 지침서와 함께 "문귀동은 권인숙을 성고문하지 않았으며 일어나지 않은 성고문을 당했다는 권인숙의 주장은 정부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조작이다" 라고 발표했다.

이에 조선일보를 비롯한 이 땅의 언론들은 이 검찰의 검사스러운 주장을 근간으로 대서특필 했고 국민을 기만하며 정부의 앞잡이가 되었다.

그러나 이 후 정권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면서 언론사에 대한 권력의 간섭과 지배는 점점 옅어져 가게 되는데, 언론장학생의 정보와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 결과를 무기로 언론사를 장악하려 했던 김영삼 정권 이후부터는 언론에 대한 정치권력의 지배는 거의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부터 언론은 제2의 권력인 자본- 바로 사주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것는 1991년 제2의 동아일보사태와 지난 DJ정권시 중앙일보 홍석현회장의 구속 때에 확연히 드러난다. 91년 민주화에 기여한 김중배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노태우 정권을 반대하며 시위하다 죽어간 명지대 강경대군의 사건을 그대로 사실 보도한다.

이 때 친정부편이었던 김병관회장은 김중배 편집국장을 조사연구실로 발령냈고 이에 김중배국장은 편집국장 이취임식에서 "자본가로부터의 자유"을 외치며 30년 동안 머물렀던 정든 신문사를 떠난다.

또 기자협회보에 "숨은 권력"에 대해 통렬한 비판의 글을 올린 손석춘기자 역시 김중배국장과 함께 동아일보를 사직하게 된다.

또 세무조사에 의해 수십억의 탈세 혐의로 사주가 구속되자 검찰청 정문 앞에서 기자들이 이열 횡대로 도열, "홍사장 힘내세요"라는 외쳤고 그 모습은 TV뉴스를 통해 전국에 방송됐다.

또한 사주 구속 몇분 만에 "정부와의 전면전"을 선언하게 되는데 제2의 권력 자본에 의해 조정 당하는 우리 언론의 부끄러운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하겠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2의 권력인 자본가의 지배를 벗어나가기란 쉽지 않을 듯 싶다. 왜냐하면 사주를 비판하고 그들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 당장 승진과 급여등 현실적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자신들의 비교적 그 풍요로운 생활을 박탈 당할 수 있다는 위기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공포가 아닐까? 그리고 설사 자본가가 좌지우지 하지 않고 언론노조가 제법 구실을 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기득권 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언론은 정치권력과 자본에 지배를 벗어났지만 언론 스스로 거대한 제3의 권력이 되어 자신들의 기득권과 안정적인 생활, 사회적 지위의 침해를 막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채널, 다매체 시대!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가는 언론의 환경과 전처럼 귀먹고 눈멀어 언론이 이끄는 대로 이리 저리 부화뇌동 하지않고 잘못된 부분을 절대 간과하지 않는 국민의 힘의 균형과 감시 속에서 언론은 언론 스스로 자정과 변화,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도태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이미 언론의 대지각변동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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