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와 민주화 향수 배어있는‘새둥지’재도약 다짐

고향인 호남에서 '정치출마' 권유해 고민중 총선 패배로 원내 9석의 소수정당으로 전락한 새천년 민주당이 10년의 여의도 시대를 마감하고 지난13일 마포에 새 둥지를 틀고 재도약을 다짐했다. 우선 '새둥지' 마포는 민주당으로서는 감회가 깊은 곳. 지난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복귀와 함께 마포에 있던 '통합민주당'을 쪼개 여의도에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이후 '국민회의'의 법통을 잇는 민주당이 출범한 후 이번에 10년만에 다시 마포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장전형 대변인도 "과거 김대중 전대통령과 군사독재 정권과 싸우던 수많은 인사들의 향수가 배어 있는 이 곳에서 반드시 민주당이 재기의 틀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사신문사는 15일 오후 '민주당 마포당사 부흥'에 자신감이 차 있는 장전형 대변인을 만나 세간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그의 뒷얘기를 들여다보았다. ◆ '작은 당에 큰 대변인, 누가 보아도 1,2선 국회의원 같은 인상' 184㎝의 훤칠한 키에 맑고 핸섬한 이미지, 예리한 논평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민주당 50년 전통을 대변하고, 스스로는 한사코 '정직한 남자'가 되고 싶다는 민주당 장전형 대변인(44), 누가 보아도 지명도를 가진 1,2선 국회의원 같은 인상을 풍긴다. "문학도가 돼 교육자 혹은 시인이 되고 싶었다"는 그는 진도군 조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신 아버지를 따라 사택에 살면서 방과후면 햇살이 길게 비친 교실에서 아버지가 건반을 누르는 풍금소리에 맞춰 그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 서정적인 유년기와 소년기를 거쳐서인지 삭막하기만 한 정치 논평에 '낭만'을 첨가하자는 게 그의 신조다. 지난1993년 한양공대와 연세대학원에서 행정학을 공부한 후 한 회사의 광고 홍보부에서 카피라이터와 네이밍(상표 짓기) 작업에 흠뻑 빠져있던 그에게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함께 정치하자'는 제안을 해오면서 한 대표의 보좌관으로 5년간 정치수업을 하고 이후 8년째 민주당 부대변인과 대변인으로서 활약하고 있다. "한화갑 대표에게 배운 정치는 정직과 지조로 정직이 가장 큰 무기라는 걸 배워 이메일 캐릭터도 '정직한 남자'요, 가훈까지 '정직'으로 바꿨다"는 그는 "정직한 정치에 낭만을 가미한 대변인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대변인의 역할이 마치 전투의 총알받이처럼 상대정당에 대해 논쟁, 언쟁, 정쟁의 선두에 설 수밖에 없고 상대의 말을 꺾기 위해 독설을 할 수밖에 없을 때 가장 안타깝다"는 그는 "고소, 고발을 14번 받았는데 상대의 약점을 확대 재생산해 물고 늘어져야 하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이라고 고백했다. 또 "대변인은 잠꼬대도 조심해야 한다"는 그는 "2002년 노무현 후보 수석대변인일 때 식사하면서 '이회창 총재 큰아들을 두고 직립보행이 불가능하겠다. 그게 사람인가, 육포상태다'라고 했던 말이 언론에 '인간육포 상태'라고 전해지면서 정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그는 "본심은 유하고 시를 좋아하는 문학소년 기질이 많다"며 "TV에서 웃으며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런 정치적 현실이 위엄스럽게 혹은 냉철하게 보일 뿐"이라고 자신을 대변했다. 지난 10월 그가 후배 결혼식에 첫 주례를 맡았을 때다. 150여명의 기자들과 수없이 터지는 카메라 앞에서 브리핑하고 직문직답하는 정황에서도 떨어 본적이 없었던 그가 최근 10년만에 가장 많이 떨었다. 하지만 그렇게 떨면서도 '거울도 나보다 먼저 웃지 않는다'는 자신의 주례사 주제를 모든 하객들에게 선창하고 합창을 반복, 고향 선후배들과 어른들로부터 좋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문학도가 꿈이었지만, 한화갑 대표 권유로 정치에 입문 '왜 민주당을 지키고 남았는가'라는 질문에 "정치입문은 한화갑 대표, 대변인(언론)은 정동영 김한길 의원에게, 이해찬 총리와는 DJ정부인수위원회 행정관으로 함께 일하면서 신용카드도 맡길 만큼 친밀한 사이다. 이해찬 총리가 총리지명을 받고 최초로 민주당을 방문했을 때 17대 국회에 가장 필요한 인물이 장대변인인데 정말 아쉽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로 그는 먼저 여권과의 뗄 수 없었던 깊은 관계를 설명했다. 그러나 "그렇게 거의 공개적으로 손을 내밀고 설득과 회유와 요청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는 그 이유를 "민주당 분당과정에서 손발이 얼어가면서 노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선전한 한 대표를 대표 취임 이틀 전 노 대통령의 측근인 천정배 신기남 의원 등으로부터 대표직 사퇴를 요구받았을 때 모든 정이 떨어졌다"면서 "크게는 그들의 개혁적 태도가 대화를 통한 합의 도출이 아닌 깃발을 내세우고 따르라는 민주주의의 대의에 어긋나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옳은 흐름이 아니라는 판단과 작게는 한 대표와의 인간적인 관계를 배반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원외에서 일하는 정치인들의 수고가 고향에는 잘 드러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부쩍 주변에서 고향인 호남에서 정치를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권면과 권유에 굉장히 고민이다"는 그는 "당과 당원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위해 장대변인 같은 사람이 수혈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고향에 대한 기억을 마치 그림처럼 선명하게 기억해내는 그는 초등학교 때 고무신을 신고 축구하다 땀이나 미끄러진 일, 호롱불 켜놓고 공부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콧속이 까맣던 일, 전기가 없던 시절에 67가구인 마을에 2대의 텔레비전이 멀리 목포에서 힘겹게 축전해온 배터리에 의해 켜지면 40여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 모여 김일의 레슬링, 류제두의 권투, 변웅전의 유쾌한 청백전, 배삼룡 이기동의 코메디와 남진 노래를 따라 부르던 일들이 엊그제 같다고 한다 특히 중2때 목포에 나와 처음 본 전기불은 물론 네온사인과 그라데이션으로 바꿔가며 자양강장제(박카스디)를 광고하는 전광판을 보면서는 잠을 못 이뤘단다. ◆ '정치적 감각' 위해 광범위한 독서와 엄청난 메모가 습관 명대변인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비결을 무엇보다도 "정치적 감각이 우선"이라는 그는 "새벽2시 이전에 잠을 자본 적이 없고, 광범위한 독서와 엄청난 메모습관 등 평소의 준비가 상황마다 통찰의 정치력으로 발휘돼 당대표의 심중을 꿰뚫고 당원들의 여론을 집약해 내는 당의 얼굴, 당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기본 소양이 된다"고 피력했다. 정치와 논평을 사랑하고 '민주당을 어떻게 하면 살릴 것인가'가 항상 자신의 화두라는 장 대변인. 끊임없이 변화, 생멸하는 정치적 혼돈 속에서 정직과 지조라는 자신의 질서를 찾아가며 정치현장의 중심에 명대변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는 이시대가 목말라하는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 개인과 전체를 아우르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많은 이들에게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기운을 북돋아 웃음을 주는 '현장정치인'으로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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