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을 근거로 전라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무주 덕유산을 근거로 전라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신 문태수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80년 3월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신기(장구지) 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남평이고, 본명은 태진(泰珍)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가 태수(泰洙) 혹은 태서(泰瑞)였다고 한다.

어려서 선생은 마을 서당에서 사서삼경 등 한학을 공부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추었으며, 17세 되던 무렵 태어난 동네에서 육십령 너머의 장수군 계북면으로 이사하였다.

한편, 선생이 장성해 가던 무렵, 일제의 침탈로 인해 국운은 날로 기울어 특히 1894년 동학농민 전쟁을 기화로 청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일제는 대한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일본군대가 경복궁을 무단 점거하는 갑오변란을 일으키고, 갑오경장을 강요하면서 내정을 간섭하는 침략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이 한층 격화되던 무렵, 선생은 지사 · 동지들을 모아 구국을 위한 거사를 준비하였고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면암 최익현 선생을 찾아가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대책을 논의하였다.

1906년 봄 덕유산 일대에서 산포수 등 동지를 모아 무주군 안성면 소재 원통사(圓通寺)를 거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용장 박춘실(朴春實, 본명 朴東植)의 부대와 함께 장수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전멸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후 경남의 함양·거창, 전북의 장수·무주·진안·임실, 충남의 금산 등지를 오가며 덕유산과 적상산, 성수산 등의 산악지대를 무대로 60여 회에 걸쳐 일본군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07년 말 13도창의군이 결성되자 ‘호남의병대장’으로 연합의진에 가담하여 서울 진공작전에 참여하였고, 1908년 무주 헌병주재소, 장수 헌병주재소 및 관공서 등을 습격하였으며, 1909년에는 충북 옥천의 이원역(伊院驛) 폭파의거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의 탄압이 집중되는 가운데 무주, 장수, 거창, 함양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전을 벌였으나, 1911년 8월 밀고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1913년 2월, 34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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