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 최고의 명당 '구례 운조루'

안개… 앞을 보아도, 뒤를 돌아보아도, 옆을 살펴보아도 온통 희푸른 재첩국물빛 안개뿐이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바라보아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도 땅도 안개가 되어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구름 속을 두둥실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아니, 스스로 구름이 된 것만 같았다.

이곳이 대체 어딜까. 이곳이 바로 구름 속을 날아다니며 노닌다는 그 전설 속의 새가 산다는 곳일까. 이곳이 바로 삶도 죽음도 없는, 세월마저 모두 멈추어 서버린 극락세상이란 곳일까. 만약 이런 곳이 사람들이 그토록 꿈꾸던 극락세상이라면 나는 얼른 이 세상에서 벗어나 사람 사는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

가서 내가 본 극락세상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짙은 안개뿐이더라고 말하리라. 그곳에는 삶도 없고 죽음도 없고, 몸도 없고 마음도 없는 그저 텅 빈 세상이었다고 쓰리라. 그곳에는 그리움도 없고 사랑도 없고 기다림도 없는 무의미한 세상이어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갈 곳은 도대체 못 되더라고 외치리라.

글자 뜻 풀이 그대로 구름 속을 노니는 새가 산다는 운조루(雲鳥褸)로 가는 길은 섬진강이 '춥다 춥다' 호들갑을 떠며 호호 불어낸 입김 같은 뿌우연 안개 속이었다. 길도 집도 들판도 산도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가 소매를 잡고 물어볼 만한 사람, 아니 사람의 그림자조차 얼씬거리지 않았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

- 도연명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몇 토막

우리 나라 3대 명당인 금환락지(金環落地)로 불리는 땅,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土旨面) 오미리(五美里). 조선 중기 양반집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오는 기와집 운조루(중요민속자료 제8호)는 풍수지리학적으로 금가락지가 떨어지는 땅이라는, 명당 중의 명당에 둥지를 틀고 있다.

운조루는 해발 1506m의 지리산 노고단이 형제봉을 타고 내려오다가 섬진강 줄기와 만나 만들어낸 넓은 평야, 즉 '구만들'이라고 불리는 이 들판을 금가락지처럼 꼬옥 끼고 있다. 그래. 바로 이곳이 예로부터 풍수지리학을 오래 공부했던 사람들의 비밀스런 기록에 나오는 그 '금환락지'다.

운조루 옆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 또한 예사로운 사람들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곳에서 살아왔던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모두 이곳이 '금환락지'라는, 우리 나라에서 으뜸가는 명당이라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명당터를 잡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철새처럼 몰려든 사람들이라고 한다.

운조루는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앞인 영조 52년, 서기1776년에 경상도 안동에서 태어난 유이주(柳爾胄)라는 사람이 처음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 유이주는 이 명당의 배꼽에 99칸의 기와집을 짓고 그 일가들이 모두 모여 살게 했다. 그때 유이주는 운조루 터를 닦으면서 '하늘이 이 땅을 아껴 두었던 것으로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며 몹시 기뻐했다고 한다.

운조루라는 이름은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 혹은 '구름 위를 노니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라는 그런 뜻이다. 운조루의 운(雲)과 조(鳥)는 중국 도연명이 지은 시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의 첫 머리인 글자인 구름과 새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희부연 안개 속에 잠긴 멋드러진 솟을대문이 눈에 띄는 운조루 들머리에는 첫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자그마한 연못이 희부연 안개 속에 휘감겨 있다. 연못 안에는 분재 같은 소나무를 등에 얹은 작은 섬 하나와 거북 같은 연꽃잎이 떠돌고 있다. 안개가 연못을 휘감고 있는지, 연못이 안개를 휘감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처음 이곳에 주춧돌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팠을 때 부엌 자리에서 어린아이 머리만한 돌거북이 하나 나왔다고 합니다."
"그 돌거북 때문에 이곳이 뛰어난 명당이라는 소문이 더 많이 났겠구먼."
"근데 1989년에 그 돌거북을 그만 도난 당하고 말았답니다."
"저런 저런!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남의 가보까지 훔쳐가서야 원."

그렇게 말하며 연못을 바라보는 나의 지리산 길라잡이 조경국 선생의 눈빛이 몹시 서글프게 보인다. 한동안 안개 낀 연못을 천천히 거닐다가 운조루 홍살문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기와지붕을 딛고 우뚝 솟은 홍살문 옆에는 고인돌 같은 납작한 돌이 하나 드러누워 있다. 이 돌이 말을 내릴 때 사용한 하마석(下馬石)이다.

홍살문 처마에는 무슨 흰 뼈다귀 두 개가 액땜을 막는 부적처럼 덩그러니 걸려 있다. 이 뼈 또한 그냥 뼈가 아니다. 유의주가 평북 병마절도사로 부임할 때 산을 넘다가 만난 호랑이를 채찍으로 때려 잡았다는 그 호랑이 뼈다. 그때 유이주는 영조로부터 박호장군이란 칭호를 받았고, 호랑이의 가죽은 왕에게 바치고 호랑이 뼈는 잡귀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이곳에 걸어두었단다.

"근데 호랑이 뼈가 왜 저리 연약하고 초라하게 생겼지? 마치 토끼 뼈 같아."

"저 뼈에도 사연이 있지요. 그 당시 민간에서는 저 호랑이 뼈가 만병 통치약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또한 호랑이 뼈가 바람 난 남편의 바람기를 잡아준다고 소문이 난 탓에 이곳 마을사람들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여인들이 몰려와서 저 뼈를 조금씩 갉아갔다고 합니다."

운조루는 모두 55칸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분되어 있다. T자 모양의 사랑채는 다락처럼 높은 마루를 달고 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사랑채에서 안채로 가는 마루에 큰 부엌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랑채와 직각을 이룬 높다란 마루가 있어 사랑채의 살림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사랑채의 오른쪽에 있는 안채는 사랑채보다 훨씬 넓고 크며 앞이 탁 트인 ㅁ자 모양이다. 그 가운데는 큰 마루가 하나 놓여져 있으며, 양쪽에는 큰방과 작은방이 자리잡고 있다. 행랑채는 一자 모양이며,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을 한 사당은 안채 동북쪽에 있는데, 담장을 따로 세웠다.

지금 운조루에는 유이주의 10대손이 살림을 살면서 관리를 하고 있다. 이곳에는 그 당시의 살림살이를 엿 볼 수 있는 생활용품과 집기, 도구 등은 물론 매매계약서, 후손들의 일기, 결혼 및 장례 비용에 대한 기록, 조문객의 명단, 일제 때의 세금교부서와 영수증 등 희귀한 옛날 문서도 제법 많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 호랑이뼈

"저기 보이는 저 산이 계족산(鷄足山)입니다."
"계족산? 닭발 산?"
"저 산의 모습이 닭발을 닮은 것 같지 않습니까? 닭발은 화기(火氣)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집 앞에 있는 저 연못도 화기를 막기 위해 만들어 놓은 거라고 합니다."
"창녕 영산에 있는 연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연못이로군. 그 연지도 화왕산의 불기운을 막기 위해 판 것이라고 하더만."

운조루를 한바퀴 빙 돌다가 운조루 마당에 빨갛게 매달린 산수유를 서너 개 따먹으며 홍살문을 나올 때까지도 구만들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아마도 길손에게는 우리 나라 최고의 명당 금환락지의 속내를 보여주기 싫다는 투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이미 금환락지의 배꼽을 꼼꼼히 더듬고 나왔는데.

☞가는 길/1.서울-대전-전주-남원-동림교-송치리(승사교 앞)-19번 국도-밤재터널-구례 IC-하동 쪽 19번 국도-토지면 운조루 팻말-오미리 운조루

2.부산-남해고속도로-하동-19번 국도-토지면 운조루 팻말-오미리 운조루

3.광주-호남고속도로-곡성-곡성읍-17번 국도-구례 구역-18번 국도-구례 IC-하동 쪽 19번 국도-토지면 운조루 팻말-오미리 운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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