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박물관의 고조선은 단군을 무시하고 기자를 내세우려는 것
단재 신채호 "기자정통(箕子正統)설을 부인...기자는 신하"라고 고대사 깔끔히 정리

 

필자는 앞선 ‘사(事)·사(史)칼럼’의 “中, 한국사 연표 철거와 고조선 물음표(?)의 의미는”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중국이 말하는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이 아니므로 그들의 간계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중국측이 박물관 전시장의 벽면에 <고조선 : ?~기원전 108년>이라고 적은 것은 단군의 고조선 건국연대를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의문 부호화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고조선 자체를 허구(虛構)화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라 판단되는 것이다. 중국이 말하려는 고조선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의 고조선이 아니라,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중국인에게 단군의 고조선은 늘 배척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단군 배척 전략은 이미 일제의 식민사관에서 익히 본 바와 동일하다. 

중국이 말하는 백도(百度,바이두) 백과의 고조선은 가짜 고조선이었다

현재 중국사회의 인식을 대표하는 백도(百度,바이두) 백과에 의하면, 단군(檀君)은 ‘전설의 고조선국 개국 군주’(傳說古朝鮮國開國君主)라고 적었고, 또 고조선은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국이 건립되었다고 한다”(傳說于公元前2333年建立古朝鮮國)고 막연히 적고 있다. 사실(史實)이 아니라 단지 허구적인 전설(傳說)이라는 것이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므로 그 실체는 다른 데 있다는 뜻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러면 한 걸음 나가 백도백과는 고조선의 실체를 무어라고 서술했는지 알아보자. 

“고조선(古朝鮮)은 한무제(漢武帝)가 한사군(漢四郡, 기원전 108년)을 설치하기 이전, 지금의 한반도 북부에 있던 초기의 고대국가를 지칭하는 말로, 주로 중국사에 기록된 기자조선(箕子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두 전후에 이어진 제후국, 번속국을 일컫는다. 특히 문화적·혈연적 속성을 불문하고 현재의 대한민국과 조선(북한)의 역사가 아닌 중국 고대 지방정권에 속한다. 북한과 남한에서는 후대에 두서없이 만들어진 신화 전설의 단군조선이 고조선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주요 민족은 화하(華夏), 부여(夫餘)족이며, 출현시기는 기원전 1122년이다. (中國 百度百科) 

고조선에 대한 중국의 공식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 이전에 한반도 북부에 세워졌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이어 일어난 지방의 조그만 제후국들을 말한다.  
(2) 고조선은 B.C. 1122년에 세워진 기자조선이 대표하고 위만조선으로 망한다. 
(3) 고조선은 화하족(華夏族)이 주도가 되어 만든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4) ‘문화적으로나 혈연적으로나’ 오늘날의 남북한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5) 주요민족은 화하족(華夏族)과 그밖의 부여족(夫餘族)으로 구성되었다.
(6) 단군조선은 ‘만들어진 신화,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실하교수도 지적했지만, 고조선은 ‘중국사’의 일부라는 것이 기본 입장이다. 중국사에서 말하는 고조선의 주류는 기자조선과 이를 멸하고 계승했다는 위만조선이고, 그 전후시기에 있었던 변방의 작은 나라들 즉 진번, 예맥, 옥저 등등으로 구성되었다고 말함으로써 본래의 고조선을 축소해 버렸다. 이런 주장 속에는 고조선을 가짜화하여 역사에서 공중분해 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고 본다. 

특히 중국측은 기자와 기자조선을 강조한다. 공식적으로 기자국은 기원전 1120년~기원전 194년으로 설명한다. 주무왕(周武王)이 상(商, 殷)나라 주(紂)를 멸망시키자 이때 도망 나온 기자(箕子)가 한반도 평양에 세운 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말로 중국에서는 ‘은씨기자왕조’(殷氏箕子王朝)라고 한다. 

그 후 위만은 기자조선의 애왕(哀王)을 무너뜨리고 기자의 수도 평양을 차지하여 위씨조선(衛氏朝鮮)을 세웠고, 그 국토는 고구려, 진번, 임둔, 옥저, 부여의 5개국을 포함하여 사방 수천 리의 ‘大위만조선국’이 되었다고 자랑한다. 위만이 고구려, 진번, 임둔, 옥저, 부여의 5개국을 지배하였으므로 주변의 고조선은 실질적으로 사라졌고, 말기에는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대표했다는 보는 것이다. 이렇게 중국은 본래의 고조선의 역사를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이름으로 깡그리 지웠다. 중국 국가박물관이 고구려 발해의 연표를 삭제하기 전에 이미 고조선을 제거한 것이고, 그래서 고조선의 연표를 <고조선 : ?~기원전 108년>이라고 적어 고조선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중국이 말한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이 아니라, ‘기원전 1122년’이었다

비록 중국이 고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그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이 아니라 기자와 위만의 고조선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기원전 2333년’이 아니라, 기자 중심으로 ‘기원전 1122년’이라고 적을 수 없기에 물음표(?)로 남겨 놓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고구려 발해의 연표수정을 중국측에 요구했으나, 고구려와 발해를 이미 자기네 지방정권으로 편입해 놓았기 때문에 그것은 수정의 대상이 아니라 아예 철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중국측의 기자중심설을 보면, 단재 신채호가 생각난다. 단재는 우리 고대사의 정리작업의 일환으로 기자정통(箕子正統)설을 부인하였다. 이 문제는 근대역사학의 난제였으나 안정복 같은 분들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단재는 기자를 일단 외래인(外來人)으로 규정하고, 기자를 부여(夫餘)의 신하로 보았다. 이것을 단재는 “부여는 임금이요, 기자는 신하”라는 말로 정리했다. 그 시대까지 조선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기자 존숭을 혁파했던 것이다.

또 여전한 문제는 위만이다. 중국측이 말하는 위만에 지배당했다는 고구려, 진번, 임둔, 옥저, 부여의 5개국은 그대로 고조선의 제후국이었지 위만의 제후국이 된 적이 없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중국 특유의 역사왜곡이다. 따라서 위만조선의 멸망을 고조선의 멸망으로 동일시하고 있는 한국 국사교과서는 명백한 오류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고조선의 붕괴는 북부여나 고구려로 계승되어 국통(國統)이 이어나갔을 뿐이며, 위만조선으로 계승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어 위만조선은 고조선 서쪽 변방의 작은 나라였고, 고조선의 국경선을 침탈한 침략자들이었다. 따라서 위만조선은 정치적으로는 고조선의 제후국 행세를 하다가 한(漢)에 의해 멸망 당한 것이다. 그 때가 기원전 108년이다. 그러니까 중국사에서 기원전 108년은 위만조선의 멸망연대이면서 동시에 한(漢)의 한사군 설치연대이다. 결코 ‘기원전 108년’이 고조선의 멸망연대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교과서들은 기원전 108년을 고조선의 멸망연대로 누구나 외워야 할 정도로 매우 신성시하고 있다. 

‘기원전 108년’을 신성시한 원조는 한국의 이병도이다

이미 이병도 같은 이는 기원전 108년을 한국 고대사의 기준되는 연표로 삼을 정도로 중요시했다. 그래서 한국 상고사를 기원전 108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을 정도이니 식민사관의 노예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기원전 108년’의 원조는 한국의 이병도였다. 그의 “국사대관”이나 개정판 “한국사대관”은 단군과 고조선을 서술했지만, 그 역년(歷年)을 일체 언급하지 않다가 기원전 108년부터 연대를 서술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기자(箕子)는 혈통으로 보면 화하족이 아니라 동이족이기 때문에 단군의 고조선에 가깝지 중국 주(周)나라 쪽이 아니다. 그러므로 중국이 기자조선을 자기편의 것으로 편입하여 우상화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기자는 주(周)나라의 신하 되기를 거부한 불신(不臣)한 자이기 때문에 고조선을 기자화(箕子化)하거나 중국화하는 것은 이치적으로 맞지도 않다. 마찬가지로 위만은 혈통적으로 한(漢)에 가깝기 때문에 한(漢)의 배신자라면 몰라도 원천적으로 고조선의 신하가 아니다. 

중국측이 기자와 위만의 이름으로 고조선의 역사를 파괴하고 부정하는 도구로 삼는 것은 논리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중국의 의도를 간파했다면, 먼저 기자와 위만을 거부해야 한다. 기자와 위만은 한국 고대사 파괴의 원흉임에도 한국학자들은 여기에 맞장구치고 있다. 일본 극우의 시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단군 없이는 고조선이 없고, 고조선 없이는 단군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만이 있을 뿐, 기자나 위만은 고조선의 주류가 아니고, 저 고조선의 변방에 있던 작은 나라에 불과한 것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역사에서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 즉 ‘단군조선’만이 있을 뿐이다. 이름이 다 같은 조선이라고 혼동해서는 안 된다. 

단군을 신화 속의 만들어진 허구 인물로 처음으로 구체화 한 자가 일본의 백조고길(白鳥庫吉)이었고, 이를 그대로 계승하여 단군을 ‘만들어진 신화’라고 주장한 자가 바로 한국의 송호정교수이고, 중국도 여기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일류대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려는 풍토가 강한 한국사회에서 일류대학교 출신 학자들이 친일(親日), 친중(親中)의 시각에 빠져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저들은 교육부로부터 최대의 편의를 받았고, 더군다나 국민의 세금으로 양성된 학자들이기 때문이다. 애국심이나 자긍심은 고사하고 국적(國籍)불문의 입신양명에 더 가치를 두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이번 중국 박물관 사태를 통해 우리 역사의 적은 이미 내부에서 싹트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일은 가슴 쪼개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할 말을 잃는다. 따라서 중국 백도백과의 거짓을 규탄하고, 국내학자들의 불의를 징계하여 단군 고조선을 바로잡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선결적 과제인 것이다. 순서를 정할 것은 없지만, 고구려와 발해는 그 다음인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나 일본이나 앞다투어 단군의 고조선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자국보다 앞선 고조선의 선진 문명을 인정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한국학자들도 여기에 동조를 해야 중국과 일본학계로부터 학자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한없이 슬픈 일이다. 역사독립국으로서의 한국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주변국이 그러면 그럴수록 단군과 고조선은 우리가 지켜야 할 더없이 소중한 존재이다. 단군 없이는 고조선이 없고, 고조선 없이는 단군이 없다. 기자의 고조선과 위만의 고조선이 아닌, 진짜 단군의 고조선을 지키는 것이 동북아 역사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길임을 이번 중국 박물관 사태를 통해 다시 한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제 시민들이 나설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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