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영화이야기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컨대 내 생의 하루하루가 모두 순진한 경건으로 이어가기를. 하늘에 무지개 바라보면 내 마음 뛰노나니, 나 어려서 그러하였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나 늙어서도 그러할 지어다. 아니면 이제라도 나의 목숨 거둬 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하노니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천생의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질진저... 워즈워드 '무지개' 오월이다. '오월은 푸르른 날이고 우리들은 자라며 오늘은 우리들 세상'이라고 노래하는 '어린이날' 노래가 생각난다. 한편으로는 '5월의 눈부신 태양 아래 서 있지만 결국은 이 모든 어지러운 세상일들이 이젠 보기도 싫다'고 읊조리는 벌거숭이의 '삶에 관하여'란 옛 노래도 흥얼거리게 된다. 일년 열두 달 중 가장 찬란한 달이라는 5월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5월의 희비극 미스코리아 대회나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는 장미도 아닐 것일지니... 이는 곧 푸른 창공에 펴져 대기에 녹아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아닐까?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금지된 장난>, <안개 속의 풍경>, <뽀네트>, <화니와 알렉산더>, <아름다운 비행>. 거장 르이 브레송 감독의 고전 영화 <무세트>, 그리고 <하얀 풍선>,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여동생의 신발을 잃어버려, 꼭 신발을 타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 악물고 달리는 아이의 마구 일그러진, 고 이쁜 표정의 <천국의 아이들>등의 일련의 이란영화들. 그리고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써왔던 동화작가 정채봉님의 작품을 토대로 연출된 영화 <오세암>과 최근, 문화관광부의 추천을 받고 개봉한 바 있는 애니메이션 <오세암>까지. 상업적 관심에서 밀려나 소외될 듯 싶은 아이들의 세계가 끊임없이 영화의 소재로 쓰여진다. 아이들을 주제로 한 이들 영화들은 그 내용과 장르가 어떻든 간에 서랍 속에 담아놓은 비밀노트를 훔쳐보는 듯한 관음 비슷한 설렘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무언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회한, 혹은 따스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그러나 위에 제시된 일련의 영화들 속에서 아이들은 행복한 나날들 속에서 한없이 천진난만하다기보다 하나같이 고통스런 문제에 부딪혀 세상살이의 고통을 하나하나 체득하고 있는 모습으로 투영돼있다. 아이들은 이해하기 힘든 어른들의 비밀스런 행동들과 이기적인 세상에 대해 이상스럽다는, 혹은 너무 어렵다는 부조리감과 공포를 느끼고 있다. 이란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자신이 친구의 노트를 가져온 탓에 다음 날 숙제를 못해와 선생님께 혼쭐나게 될 친구를 위해 노트를 되돌려주려는 초등생 아마드의 심정은 너무나 절박하다. 이러한 애타는 상황에서 어른들은 귀찮아하거나 일, 예절과 체벌 등의 엉뚱한 소리들만 늘어놓는 일테면 지극히 고집불통에 자기 중심적인 권위로만 경직된 방해 공작원들로 등장한다. 도움을 청하는 어린 목소리는 반사되어 메아리로 돌아오고 들어주는 이 없는 어른의 세상에서 소년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험난한 여정의 외로운 순례를 시작한다. 헐떡이며 힘겹게 올라야 하는 그 긴 구불구불한 오르막길들은 이상하고 복잡한 어른들의 세상을 암시하는, 혹은 소년이 앞으로 어른이 되어가면서 만나게 될 물음표 같은 인생살이를 암시하는 복선적 상징이 되고 있는 듯 하다. 드라마 '가을동화'에 삽입되었던 아름다운 기타선율의 주제가가 인상적인 <금지된 장난>에서는 전쟁 후 무덤을 만들고 십자가를 꽂는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등장해 그들만의 결곡한 정을 쌓아간다. 마구간에서 소년을 구타하던 아버지는, 이유를 알 수 없이 비극을 감내해야 하는 이 전쟁이 실은 어른들의 이기와 권력투쟁의 소산일 뿐이라는 진실을 보여준다. 이 두 아이가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소녀의 의문부호 가득한 표정으로 전해오는 전쟁은 인간의 조건과 행복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전재의 비극성을 어떤 연설보다 가슴 저리게 역설하고 있다. 89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최우수 감독상 등을 수상한 <안개 속의 풍경>은 어린 오누이의 여정을 담은 서정시를 읽는 듯 몽상적이고 고통스러운 로드무비다. 영화 속 자신들을 버리고 떠나간 아버지를 찾아 떠난 오누이는, 오세암의 장님누이와 소년처럼, 안개 속에서 희망의 나무 한 그루와 태초의 빛을 목격 할 수 있는 구원을 찾아가는 길 잃은 방랑자이자 구도자로 등장한다. 이들은 무의식중에 세상에 대한 빛과 어두움이라는 종교적 화두를 안고 있다. 그들의 그 배고프고 춥고, 지친 여행길 안에서 아버지란 이름으로 살짝 감춰진 상징은, 구원에 대한 간절한 갈망인 것이다. 그 힘은 그들이 결국 국경의 강을 건너고 절망뿐인 세상에서 안개 속의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를 만나며 '태초에 빛이 있으라'란 두 남매가 즐겨뇌이던 옛 이야기처럼 점점 빛으로 싸이는 장면의 결말을 맞는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조금 다른 관점을 지닌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에서는 심지어 아이들의 꿈속에 들어가서 나이를 훔쳐 영생불사하기 위하여, 아이들을 유괴하는 미친 과학자가 등장한다. 시대를 알 수 없는 항구도시에서 여러 명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들이 아이들을 유괴해가고 동생을 유괴당한 거리의 차력사는 부랑소녀 미에뜨와 함께 과학자의 소굴로 쳐들어간다는 내용인 이 영화는 꿈을 꾸지 못하는 사라, 세계지배를 하려는 장님 등 서커스 적 캐릭터들이 등장해 장난기 어린 장 꼭또의 초현실주의 시인 듯 몽환적 은유를 펼친다. 영화는 '델리카트슨'의 마크 카로 감독 특유의 기괴함과 그로테스크함이 서린 음울한 컬트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고래의 노래를 들은 이후부터 작살이 빗나갔다'는 원의 이야기 등에서 희망과 사랑에 대한 벅차 오르는 뭉클함과 동화적인 여운을 전해 주고있다. 이 영화는 아이들의 꿈은 영생과 삶을 신비와 낭만으로 보이게 해줄 보물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이들이 아름다운 심성의 나름의 존엄과 성스러움을 지닌 존재라면 아직 초자아가 정립되지 못한 욕망 덩어리, 정보량 부족으로 무조건 수용만 하는 스펀지로서의 아이 등 프로이드나 순자의 성악설 따위의 여타 공식에 대입해 볼 때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누구에게나 어린 어느 날, 길을 잃거나 잠에서 깨어났을 때 왠지 모르게 갑자기 찾아오는 외로움의 크기 등 알 수 없는 직감과 감성의 신비, 상상력으로 잊지 못할 어린 날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는 인간이 실존적 무게를 지닌 의문부호의 존재, 존재는 이미 그 처음부터 잴 수 없는 실존의 무게를 가지고 태어난 종교적인 신성한 존재라는 반 유물론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어른들은 일상에 무뎌지고 간단한 일상의 질서에 이러한 본질적 감성을 묻어두거나 소비와 오락, 대중 문화등 속으로 회피하는 방법을 육화한다. 이 지구상엔 아직도 많은 아이들이 아동학대, 유아 성추행, 가난과 외로움 등에 시달리고 있다. 또 한편으론 인간에 부여된‘어린 날의 꿈과 이상’을 돈벌에 이용해 버리는 돈에 눈이 먼 어른들의 천재적인 상술에 이미 속아넘어가 홀려버린 영악한 아이들도 늘고 있다. 벌거숭이의 노래처럼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달에 우리는 과연 진정 행복한가? 좀 더 자신의 삶에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 자아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의무이자 고급본능이라면 심연의 서랍 속에서 세상을 경이로 바라보던 순수를 꺼내어 꽃 한 송이, 새로운 해가 뜨는 것 하나 하나에 겸허의 눈으로, 경이를 접하는 설렘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그런데 황폐한 현대의 어른으로서 겨우 생존해가고 있는 나날 속에서 아이들을 유괴해 꿈을 도적질한다는 발상은 과연 잔인하고 엽기적인 사유일까? 혹은 낭만주의자의 심미안적 발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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