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태수 다섯 번째 시집 <황토마당의 집> 펴내

엄마 등에 업혀 죽은 아기가 아장아장
낡은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총알들이
무수히 어린 가슴을 뚫었다 아가의
발가락이 파르르 떨리다간 이내 축 늘어졌다
검은 밤은 검은 공포들뿐이었다

장작더미 위에서 먼저 죽은 소들이
지글거리고, 불빛 후미진 곳에서는
야수의 발톱에 챈
얼굴이 반반한 아녀자들의 속곳이 벗겨졌다
오오, 그 밤에

다음날 아침나절, 그들은
국방색에 둘러싸여 산으로 갔다
뒤이어 골짝은 우렛소리로 흔들리고
오오, 우리의 살붙이들은
겨울 박산골 골짝을 휘도는
싸락눈이 되었다 우우우 바람 소리로 떠도는
중음신이 되었다

(장시 '초 닷새와 엿새 사이' 몇 토막)

이 시는 한국전쟁 당시, 그러니까 1951년 음력 정월 초닷새와 초엿새, 경남 거창군 신원면 주민 752명이 국군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된, 이른 바 '거창양민학살' 사건을 형상화한 장시 '그 골짜기의 진달래' 중 일부분이다.

김태수 시인은 이 시를 쓰기 위해 아니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거창양민학살사건'"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깊이 빠져들면서, 아내의 눈물겨운 저항을 뒤로 한 채 마산에서 거창으로 주거까지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료를 들고 사람들의 증언을 들으며 원고지 300장 분량의 장편 서사시를 쓴다.

"유족들에게 무슨 보탬이 될까를 심각히 회의할 무렵, 공교롭게도 자료와 원고를 모두 잃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꿈꾸듯 장시 '그 골짜기의 진달래'를 썼다."

그렇다. 김태수 시인이 자료와 원고를 모두 잃어버린 뒤에도 마치 꿈꾸듯 역사의 현장을 시로 옮겨 쓴 것처럼 시는 원고를 잃어버린다고 해서 그렇게 슬며시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위정자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지워버리려 해도 결코 지워지지가 않는 것처럼.

울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시인 김태수(55)가 다섯 번째 시집 <황토마당의 집>(실천문학사)을 펴냈다. 이번 시집은 "시에 한 편의 이야기가 담겼으면" 하는 그의 바람처럼 한 편의 시속에 한 편의 이야기가 소롯히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모두 자신의 실제경험에서 퍼낸 것들이기도 하다.

모두 3부로 나뉘어진 이번 시집은 시인의 유년의 경험이 담긴 제1부 '땡감맛' 20편, 유년의 경험과 현재가 교차하는 제2부 '도라산역에서' 20편, 그리고 거창양민학살사건을 생생하게 다룬 제3부 '그 골짜기의 진달래'(장시)가 우리네 역사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아프게 실려 있다.

이 저녁 겨울 들판은 무거운 적막을 불러오고
짚북데기 타는 연기만 자욱이 깔렸다
농사는 이미 파장, 온기 하나 없다
누가 죽어 싸늘한 땅에다 보리씨를 뿌릴까
오뉴월 찰기 없이 무너지던 보리밥을 씹으며
신명 빠진 옹헤야를 부르겠는가
찢어진 농자천하지대본의 깃발은 인제 빛바랜 채
도회 보리밥집의 건강식단 곁에나 있는지
누가 눈물이나 찔끔거리며
도리깨 힘겨운 그 장단을 맞추겠는가

('보리타작' 몇 토막)

김태수 시인은 리얼리스트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것은 시로 쓰지 않는 시인이다. 게다가 유년의 춥고 배고팠던 기억을 아름다운 언어로 더듬으면서도 그 춥고 배고픔을 가져다 준 지주들과 위정자들의 못된 횡포에 대해서도 결코 등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참담한 기억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어린 날 시인이 바라본, 도리깨로 보리타작을 하면서도 옹헤야를 부르며 내일에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그 농민들이나, 오늘날 농민들의 현실이나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니, 오히려 지금의 농민들은 외국 농산물의 수입으로 "찢어진 농자천하지대본의 깃발"을 아예 내던져야 할 판이다.

쑥대를 잘라 피운 모깃불이 눈물을 찔끔거리게 했던 그 여름밤도 이미 사라져 버린지 오래고, 수박서리를 하던 "들켜도 장난인/그런 세월을 거슬러" 지금은 "어른이 되어 버"(수박서리)린 것이다. 이제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큰 술단지 가득한 곳간과/눈부시게 하얀 고두밥 주린 배를 채워주던"(순봉이네 술도가) 그런 술도가도 찾을 길이 없다.

겨우 몇 해의 산골 학교 선생을 끝으로
황토마당이 있는 집으로 내려왔다 읍내에서
멀지 않은 우리 집 골목 끝으로 빤히 보이는
초등학교는 이따금 풍금 소리를 풀어놓았고
까만 저고리의 젊은 여선생이 슬리퍼를 끌면서
지나가는 골마루도 있었다 스물다섯 내겐
독한 그리움이었다

...

그리곤 다시 선생이 되었다
절망도 그리움일까 두 딸애들의 소리와
아내의 볼멘 잔소리와 쉰 나이의 짜증이
범벅이 된 도회 아파트의 일요일

('황토마당의 집' 몇 토막)

스무 살 시절, 교사생활을 팽개치고 살았던 "황토마당이 있는 집"도, "이따금 풍금소리" 들리던 그 초등학교도, "까만 저고리의 젊은 여선생이 슬리퍼를 끌면서/지나가던 골마루도" 지금은 "지독한 그리움"으로만 남았다. 그리고 그 지독한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다시 선생이 되었지만 앞에 보이는 것은 절망뿐이다.

이제, 도회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있는 시인에게 남은 것은 "두 딸애들의 소리와/아내의 볼멘 잔소리와 쉰 나이의 짜증"뿐이다. 그리고 그 짜증이 범벅이 되어 삶을 몹시 피곤하게 만든다. 대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그를 그렇게 절망마저 그리움으로 안고 살 정도로 힘겹게 만들었을까.

자동차가 너무 많다 130번 버스를 탔다
시청 앞 공해 알림판은 오늘도 정상
속지 말아야지 차창에 찌푸린 날씨 깔리면
아직도 강이라 부르는가 칙칙한 도회를
가로질러 엎드린 물줄기가 구차스럽다 저 끝은
동해, 적조와 폐유가 엉켜 썰물 진 바닷가
검붉게 시든 돌미역, 청각, 이름 모를 바다풀

두고 온 먼 고향을 생각한다
가야산 자락이 이룬 초록 개울은
잔바람에도 잽싸게 반짝였던가 그 품에는
통가리, 꺽지, 줄몰개 사투리론 서툰 이름의
은빛 고기들은 돌자갈 아래 아무 데건
노란 알을 슬었다 지금 나보다 훨씬 더 젊었을
아버지 함께 발 담그면 온몸 싸한 차가움
송사리 떼 어느새 몰려와 톡톡 발바닥 간질이고
늘 들꽃 향긋한 냄새는 방죽 저 켠에서 왔다

궁상맞아라 도회 아침의 출근길
진종일 매케한 냄새 교실 창문을 기웃대거나
시도 때도 없이 넘나들 울산시 중구
염포동, 130번 버스를 내리지만.

('도회 아침의 출근' 모두)

그렇다. 시인의 짜증과 함겨움은 그동안 무차별 개발로 인해 대자연이 자꾸만 병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자연의 병듦은 배고프고 힘겨웠지만 아름다웠던 유년의 기억이 병드는 것이요, 우리네 사회와 사람, 나아가서는 삼라만상이 모두 병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다가 문득 태화강을 바라보면서 고향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 고향에는 "적조와 폐유가 엉켜 썰물 진 바닷가"와 "검붉게 시든 돌미역, 청각, 이름 모를 바다풀"이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 강가에는 "은빛 고기들은 돌자갈 아래 아무 데건/노란 알을 슬었"던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시인이 살아가는 도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진종일 매케한 냄새"가 "교실 창문을 기웃대"는 그런 곳이 아닌가. 그런 까닭에 시인은 "시청 앞 공해 알림판은 오늘도 정상"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속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또한 "속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환경에 대한 준엄한 경고이기도 하다.

"김태수 선생은 한국산 순토종 시인이다. 그렇다고 고향집 사립문 안에서만 빙빙 도는 그런 시인이 아니다...경상도와 전라도가 따로 없고, 남과 북이 따로 없고, 그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베트남과 DMZ가 따로 없다."(김준태, 시인)

김태수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황토마당의 집>은 유년의 슬프고도 아름다웠던 기억을 더듬으며 현실을 되짚는다. 그리고 그 유년의 기억들은 어느 순간 이데올로기의 아픈 상처로 돌출되기도 하고, 오로지 사람의 필요에 의해 점차 무너져 가는 환경 지킴이가 되기도 한다.

"지천명을 넘어서 김태수 시인은 그간 우리가 잊고 살았던 비산비야, 가여운 이름들을 아주 낮은 목소리로 호명하고 있다. 지음이 고마울 뿐이다." (홍일선, 시인)

시인 김태수는 1949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1978년 시집 <북소리>를 펴내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북소리><농아일기><베트남, 내가 두고 온 나라>가 있으며, 시선집으로<겨울목포행>이 있다. 지금은 울산의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울산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