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법성 위에 성서의 윤리관을 세워야"


지난해 기독교계 언론이 뽑은 최고의 뉴스는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였다. 작년 7월21일 샘물교회 봉사단 20여 명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봉사 활동을 갔다 탈레반 무장세력에 납치됐다. 한 달 넘는 동안 감금돼 있다가 결국 풀려났지만 그 과정에서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형제는 정치적 제물로 화했다.

샘물교회 봉사단이 아프간으로 떠나는 데 있어 샘물교회 당회장이자 한민족복지재단의 박은조 목사는 비자를 발급하는 등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샘물교회와 한민족복지재단은 그후 노도(怒濤)와 같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해 여름 비판 여론은 요원의 불길처럼 인터넷상에 번졌었다. 인터넷상에서 반기독교 여론을 이끌어오던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기독교와 반기독교,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개신교 쪽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힐난의 강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비판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자성의 빛을 보이지 않는 개신교계에 대해 아연한 거리감을 느꼈다. 그 후 반년이 흘렀다. 양 진영이 서로 할퀴고 물어뜯은 끝에 남은 마음의 생채기는 여태 아물지 않았다.
아프간 사태 이전까지만 해도 종교계, 특히 기독교에 대한 공식적인 비판은 성역처럼 보호받은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한국사회에서 기독교비판논리는 점점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신년호로 나온『목회와 신학』의 목차만 보더라도 기독교계의 저간의 충격과 놀라움이 느껴진다. 가히 반기독교에 대한 특집이라 해도 무방한 내용 중「기독교를 비판하는 11가지 이유」란 글이 실려 있다.

기독교인들이라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이 있다. 이른바 ‘에어컨 장’이란 말로 통하는 누리꾼들의 입도마에 올라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고 있는, 기독교 추문사를 장식할 만한 사건이다.

불륜 현장에서 남편한테 들켜서 덜컥 놀라 외부에 설치된 에어컨에 매달렸다가 추락사한 억세게 운도 없는 한 사내의 이야기. 그 불쌍한 사람의 직업이 유명짜한 ‘목사’였다. 기독교는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어떤 궤변을 갖다 붙여도 불륜과 기독교는 양립 불능의 두 가지 사태다.

또한 일제 강점기 기독교 지도자의 친일 활동과 군부독재 시절 조찬기도회 등 권력과의 밀착관계를 비판하고 있다. 안티기독교인들은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과 권력과의 유착 관계가 부적절할 뿐 아니라 옳지 않다고 역설한다.

기독교의 단군상 부수기 등 ‘반민족주의적 성향’이나 집회에서 ‘사찰이 무너지게 해 달라’는 기도에서 드러난 타종교에 대한 노골적인 배타성 역시 비판의 단골 메뉴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죄의 삯은 사망이라 불지옥에 떨어진다고 강조하는 설교자와 전도자들이 길거리에서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소위 ‘예수천국 불신지옥’(예천불지), 이 교리는 윤리의식이 희박한 목회자들에게 배타성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제공할 수도 있다.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오로지 기독교 말고는 없다는 식의 주장으로 오용되거나 남용된 사례가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한 불교 사찰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법회를 열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내가 믿고 있는 이것만이 진리라는 생각은 평범한 사람마저 독선적이며 오만한 존재로 뒤바꿔놓을 수 있다. 혹 종교인들이 이런 유혹에 빠지게 되면 제2의 정명석이나 조희성이 앞으로도 아니 나온다고 장담할 수 없다. 엄격한 성윤리와 순결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기독교인들에게 도덕성은 생명 그것이다. 준법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가 없이 성서가 요구하는 지난한 계율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종교인은 세속사회에서 핍박을 받기 쉬운 존재다. 왜냐하면 종교인들은 자신한테 쏟아지는 비판을 세상의 논리로 맞싸우지 않고 소란스럽지 않은 종교적 실천으로 강인하게 대응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인고(忍苦)의 세월의 보람을 세속적으로 ‘밝혀서’는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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