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비판적 비장미보다는 메시야에 포커스"


▲ 공포에 떨며 '샘'과 함께 욕조 속에서 불안한 잠을 자는 네빌. 고립감이 제대로 드러난 장면이다
프란시스 로렌스 감독의 『나는 전설이다(I am Legend 2007)』의 최대 단점은 감독의 센티멘탈리즘이다. 한 남성이 외롭다고 흘리는 눈물로 스크린이 축축하게 느껴질 정도다.

『콘스탄틴』으로 할리우드에 입성한 프란시스 감독은 문화인들이 많이 모이는 술집이나 바 같은 데 가면 자주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유형이다. 표현적 감성이 뛰어나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케 한다. 논리적 사고는 약하다.

주인공 로버트 네빌 역을 맡은 윌 스미스의 연기는 관객이 영화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싶어하는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어 완벽에 가깝다. 그런데 어떤 완벽함은 영화의 리얼리티를 떨어뜨린다. 어설픈 연기가 좋다는 뜻이 아니다. 연기에 인간다운 여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소리다.

시원시원한 카메라워크에 버무려진 할리우드식 감상벽으로 관객의 오감을 한쪽으로 밀어붙이는 이 영화는 막대한 제작비와 숱한 화제로 개봉을 기다리던 영화팬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던 만큼의 완성도는 보여주지 못했다. 그 완성도를 갉아먹은 것은 곰팡이라도 피어 오를 것 같은 축축한 감상성이 화면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연민이 스민 남성멜로물에 가깝다.

감독과 프로듀서들은 원작이 갖고 있는 ‘일상 속의 근원적인 고립감’을 관객에게 강요한 나머지 영화를 본 뒤 관객 스스로 홀로 있는 시간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앗아간 듯하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관객은 네빌의 고립적인 사태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고독의 파토스가 아닌 로고스를 사유할 것 같진 않다.

고독이 슬픔이며 그것이 정녕 인간에게 해로운가, 란 문제는 여적 풀리지 않은 심리적 수수께끼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홀로 있으면서 타인과의 교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이거나 신’이라고 갈파한 적이 있다.

▲ 찰톤 헤스톤 주연의 <오메가맨>의 포스터.
불필요한 교제가 삶의 태반을 잠식하고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서로 끊임없이 타인을 소모하면서 살아간다. 타인과의 수다 또는 대화, 타인과의 시선의 교환, 타인과의 포옹이 인류애의 심층심리를 구성하는 힘인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전설이다』는 영화 중반까지 가장 가까운 타인인 가족을 잃은 네빌의 상실감에 초점을 맞춘다. 네빌은 변종인류를 치료할 수 있는 백신 개발에 몰두하며 샘이라는 독일 셰퍼드를 껴안고 좁은 욕조에 누워 잠이 드는 불안하고 고립된 삶을 살아가면서도 의식은 잠을 자거나 어떤 오브제를 볼 때 과거로 옮겨간다.

정부가 발표한 방역 작전이 진행되는 도중 탈출 직전에 헬기 충돌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네빌은 자꾸 그 악몽 같은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죽은 가족들에 대한 뼈 시린 그리움.

가까운 사람의 죽음, 그것의 목격이 우리를 침울하게 하는 것은 불현듯이 지속하리라 믿었던 삶에 대한 믿음의 붕괴 속에서다.

네빌의 인간에 대한 그리움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도피기제의 하나다. 죽음은 도처에 있다. 뉴스의 단골 메뉴는 죽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의 죽음이다. 자신의 죽음은 은폐되어 있거나 망각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대체 뭘 두려워하겠는가? 이는 독일 작가 쉴러가 한 말이다.

이 영화에선 미국적 관습을 엿볼 수 있는 가정적인 남자에 대한 호감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전세계에서 무차별 총기 사건이 가장 빈발한 미국이란 나라에서 가족 이데올로기가 창궐하고 있는 셈이다.

할리우드 영화 스토리는 결국엔 가정과 ‘신’의 문제에 안착하게 마련이다. 신은 없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신의 뜻이라며 치료 백신을 전달하고 수류탄으로 변종인류와 함께 자폭하는 네빌과 함께 막을 내리는 영화는 찰톤 헤스톤 주연의 <오메가 맨>의 끝장면을 연상케 한다. 헤스톤은 그 영화에서 창에 찔려 예수처럼 두 팔을 벌리고 죽는다.

인류를 구원하고 죽는 최후의 남자. 이 영화는 SF도 좀비 영화도 생존 영화도 아니다. 유태인의 특이한 사고체계인 ‘메시야’를 다룬 오락적 기독교 영화다. 변종인류의 파워와 스피드는 강력했다. 이 영화에서 최대 볼거리 중의 하나다.

▲ 이 영화의 최대 볼거리는 컴퓨터그래픽으로 되살아난 변종인류의 파워와 스피드이다. <새벽의 저주>에 나오는 빨라진 좀비보다 더욱 강력하고 맹목적인 파괴력을 선보인다


네빌이 모든 인간이 죽었으니 ‘이 세상에 신은 없다’고 절규하는 장면은 실존적 무게감을 전달한다기보다는 관객의 감상벽을 자극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네빌의 무신적 주장에 공감해 달라는 것은 감독의 욕심이다. 신은 없다는 비명은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고립감에 대한 항의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신을 없다고 얘기하면서도 신을 상상한다. 나는 많은 미국인이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무신론은 또 다른 신을 개발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영화를 보면서 초신론(超神論)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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