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을 다시금 조명해 본다

대한민국은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되고 1948년 8월15일 정부가 수립된 후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졌다. 대부분이 정치적인 사건들인데 당시의 혼란과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나라는 독립을 했고 남한단독정부를 출범시켰으며 세계사의 큰 흐름속에 동참하면서 대한민국은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승만대통령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로써는 거의 신화적인 존재였다. 독립 당시 거대한 나라 미국의 후원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머리는 희고 얼굴은 귀족풍의 노신사로 조선왕조시대의 왕과 같은 풍모를 지닌 사람이다. 게다가 이승만은 족보상으로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일각에선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그는 또 자질구레한일은 장관에게 맡기고 본인은 큰 틀의 결단을 내리는, 말하자면 큰 정치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반공포로석방’이라던지 좀 억지가 있지만 대한해협에 평화선을 그어 일본선박이 넘어올 수 없도록 만든 것, 대마도를 반환 하라는 성명 같은 세인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을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이승만을 가리켜 외교에는 귀신, 내치에는 등신이라고 했다. 그만큼 큰 정치를, 큰 것만 다루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배워 미국의 민주주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잘못된 욕망에 사로잡혀 무리한 개헌을 추진, 독재의 길을 걷게 됐다. 당시 세간에는 “이승만이 인의장막에 묻혀 세상물정을 몰라서 그렇다”고 하는 말도 많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모든 것을 알고 지시하고 행했던 사람이다. 종신 대통령의 개헌도 국회에서 부결된 걸 본인이 직접 나서 사사오입사건을 일으킨 것을 보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는 혼란기의 초대대통령으로 대한민국이 확실히 자유진영에 몸담도록 줄서기에는 성공했지만 말년의 욕심으로 독재자의 오명을 쓰고 물러난 것이다. 윤보선 대통령 윤보선은 4.19혁명으로 세운 제2공화국에서 내각책임제하에 명목상의 국가원수로서 실권을 잡은 장면 총리와의 불화로 쿠데타가 일어나자 오히려 그를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후에 정치인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됐다. 5.16 군사정변 후 1962년 대통령을 사퇴하고 이후 다시 대통령 후보로 나서 박정희와 두 번 겨루었지만 두 번 다 패하고 만다.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처럼 명암이 엇갈리는 대통령도 없을 것이다. 5.16군사정변ㆍ유신독재ㆍ긴급조치의 과(過)와 오천년 역사 이래의 보릿고개 타파, 세계에 유래 없는 경제발전, 세계10대 공업국진입 등의 공(功)으로 독재 대통령이지자 대한민국의 영웅인 그의 평가에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가난한 나라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나라의 가난을 물리치려 노력하고 온 열정을 쏟아 국민을 단결하게 만들었고 그 힘으로 온 국민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안겨준 사람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식량난부터 해결해야 할 정도로 경제가 열악했다. 그때의 비참함은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미국이 원조한 밀가루 배급, 우유가루 배급 등이 그것인데 밥보다 수제비를 더 많이 먹고 국수를 더 많이 먹던 때이다. 그것도 한정된 사람에 한에서만 먹을 수 있었으니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없애고 우리나라를 경제대국으로 안착시킨 영웅이면서도 유신독재로 또 다른 이면을 보인 그는 혁명가답게 측근에 의해 총격으로 서거 하였다. 최규하 대통령 1975년 국무총리에 기용되고, 1979년 ‘10ㆍ26’사건 이후 대통령권한대행을 거쳐 그해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전두환에 의해 1980년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대외적으로 큰 활약을 보이진 못했으나 대내적으로는 뛰어난 두뇌와 소신을 갖고 있었던 대통령이었다. 전두환 대통령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살해되자 국군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은 ‘박정희 암살사건 합동수사 본부장’을 역임한다. 전두환은 박정희 살해 현장에 있던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조사하려다가 12.12사태가 일어나고 일약 실력자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해 12월엔 서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문제는 우리나라 정부나 정치계가 전두환을 실력자로 인정하고 대통령보다 그에게 모든 정치현안을 보고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전두환은 자신감이 생겨 권력탈취를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5월17일 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전.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ㆍ정치활동중지ㆍ대학휴교 등 계엄포고 10호를 발표했다. 그로인해 학생, 정치인, 재야인사들이 구속됐다. 그 후 18일부터 광주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되었고 27일 ‘광주민중항쟁’이 끝날 때까지 광주는 군인들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다. 이것이 ‘광주 민주화 운동’이다. 이후 전두환은 특별기구인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을 해임하고 정치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최규하는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전락하여 사임을 하게 되고 전두환은 대통령에 당선되어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또 깡패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어서 깡패나 부랑자, 뿐만 아니라 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까지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그리고 언론사 통폐합을 통한 언론탄압을 자행했다. 이때 TBC방송국이 KBS로 통합됐다. 언론사를 자기 마음대로 통폐합하고 자신의 집권에 반대하는 수많은 언론인들을 강제해직하고 언론을 자신의 홍보도구로 이용하여 당시 ‘땡전 뉴스’가 유명했었다. (9시 땡하고 뉴스시작하면 전두환 대통령 뉴스부터 시작한 걸 땡전뉴스라 한다.) 7년 단임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 후임 대통령 선거를 국민의 여망인 직접선거를 개정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것이 87년 4월13일에 발표한 4.13호헌조치다. 이런 와중에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지게 되고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발족하여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됐었다. 전두환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계엄령으로 맞서려 했으나 미국의 개입으로 더이상 버틸 힘을 잃고 대통령후보 노태우가 6.29선언을 발표하면서 6월항쟁은 끝나게 됐다. 그는 재임 중 기업인으로부터 수천억의 돈을 받아 아직도 환수중에 있다. 박정희의 구데타가 5.16군사정변으로 칭해진 반면 무조건적인 독재를 자행한 전두환이 일으킨 12.12사태는 구데타로 받아들여져 전두환은 불명예 대통령으로 남게 되었다. 노태우 대통령 노태우는 전두환의 육사동기로 12.12사태 주역의 한사람으로 전두환 집권 후 항상 2인자로 군림하며 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김영삼의 분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태우는 전두환보다 소심하여 정책다운 정책을 펼치지 못하고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했다. 이것은 즉, 대한민국은 영원히 핵폭탄을 갖지 않겠다는 약속을 세계를 향해 선언한 것이다. 스스로 핵무장이라는 마지막카드를 아무런 대가 없이 포기한 것이다. 게다가 북진정책(북쪽으로 향하자. 즉 공산권과의 수교)을 한다면서 소련(러시아)에 수십억 달러를 차관으로 주어 아직도 그 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 역시 기업가로부터 수천억을 받았다. 대부분 환수됐지만 말이다. 그를 가리켜 흔히 ‘물태우’ ‘물통’이라 부르는 이유가 정책다운 정책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김영삼 대통령 김영삼은 노태우의 민정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자신의 민주당을 3당 합당하고 민자당을 결성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어 노태우의 후임으로 92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취임 초기에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점차적으로 실책이 거듭됐다. 급기야 1997년 11월 대한민국은 ‘IMF 대란’을 맞게 된다. 그의 재임 기간 중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공사장 사고, 여객선 전복사고, 비행기 추락사고 등 각종 대형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해 ‘사고공화국’이라는 별명까지 나오게 됐다. 하지만 김영삼은 모든 사고를 전임자들의 잘못인양 말하여 수차례 여론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 그의 차남 김현철이 부정사건으로 대통령 아들로서는 처음으로 구속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는 큰 사건이 터지면 국면 전환용으로 다른 사건을 만들곤 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전두환ㆍ노태우 구속사건’이다. 그때까지 "성공한 쿠데타는 역사에 맡기자"면서 그들의 정당에 들어가 대통령이 된 사람답게 그들을 보호하려는 듯 보였으나 지지도가 떨어지자 국면전환용으로 그들을 쿠데타 사건으로 구속시켰다. 물론 그들은 부정부패 사건에도 연루되어 구속돼야 마땅하나 김영삼은 국면 전환용으로 이용한 것으로 비춰지게 됐다. IMF 이후 김영삼은 일년간 우리나라에 대통령이 없는 것처럼 지내다가 퇴임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추진한 ‘금융실명제’의 실시는 검은돈이 사라지고 금융의 투명화가 정착되어 가는 계기를 마련하여 아직까지 성공한 정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 김영삼의 국정실패로 다시금 회생한 것이 바로 김대중이다. 만약 김영삼 체제가 실패하지 않았다면 김대중은 김영삼의 퇴임과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져 ‘3김시대’가 막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김영삼의 실패가 김대중을 살린 결과가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김대중은 1997년12월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의 치적으로 유명한 ‘햇볕정책’으로 2000년 6월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 냈다. 또한 50여년간 지속되어 온 한반도 냉전과정에서 상호불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에 새로운 장을 여는데 크게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IMF 처리 과정에서 국민의 혈세가 공적자금으로 부실기업에 유입되어 많은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게 됐다. 또한 경제를 살린다는 미명하에 크레디트카드를 남발하여 현재의 카드부실을 만들어 경제에 먹구름을 끼게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대한민국의 발전을 가져온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노무현대통령 누구도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인지도도 없는 돌출인물이 노무현이다. 정몽주의 지지철회 등으로 우여곡절 끝에 2002년12월 대통령에 당선 된 그도 취임초기엔 신선한 서민 이미지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취임 첫 행사가 신문사 고발이었고 그의 발언이 선거법에 저촉되는 부분이 많아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주의를 받기도 했다. “사과하라”는 야권의 공세에 특유의 ‘오기’로 버텨 국회로부터 탄핵을 받는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국민들의 ‘약자 편들기’에 편승해 다시 기사회생했다. 노무현은 언어구사에 문제가 있고 오기와 고집이 대단한 것으로 비춰진다. 잦은 말바꾸기, 일관되지 않은 정책발표,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 수도이전문제, 정권퇴진문제로 인한 국민위협 발언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고, 미국ㆍ중국ㆍ일본에 대해 국내서 발언한 것과 해외서 발언한 것에도 일관성이 없었다. 미국에 가서는 미국에 아첨하듯이 발언하고, 중국에 가서는 모택동을 존경한다는 국립묘지에 있는 중공군과 싸우다 전사한 수많은 호국영령을 모욕하는 듯 어리둥절하게 하는 발언 등 대통령답지 않은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로인해 국민들의 지지도가 떨어지고 야당인 한나라당의 지지도가 올라가는 아이러니한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우리 국민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남은 재임기간 동안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대통령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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