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온 숙성시킨 생선회 맛보셨나요?


올해는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광복 6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 속담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강산이 변해도 6번이나 변했다는 그런 얘기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일제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곳이 너무나 많다. 사람 나이로 치면 환갑이 되었건만 아직까지도 일제의 사슬에서 깨끗하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소리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계각층에 일제의 그림자가 일렁거리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그중 생선회에 남아있는 일제의 더러운 얼룩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있다. 특히 남동해 바닷가 주변에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는 생선회집에 들어가 차림표를 바라보면 아예 일본에 온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생선회란 참 좋은 우리말이 오래 전부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림표에는 버젓이 '사시미'란 일본 낱말이 한글로 또박또박 씌어져 있다. 오징어는 '이까', 학공치는 '사요리', 돌돔은 '이시다이', 갯장어는 '하모', 참치는 '마구로', 붕장어는 '아나고', 보리새우는 '오도리', 전갱이는 '아지', 뼈째 썰기는 '세꼬시' 등등.

어디 그뿐이랴. 횟집 곳곳에 앉아 생선회를 시켜먹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여기 밑반찬 좀 주세요' 하면 될 것을 '여기 스끼다시 좀 더 주세요' 하는가 하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고추냉이를 '와사비'라 부른다. 그렇게 횟집에 한 시간쯤 앉아 있으면 도무지 어느 말이 우리의 표준어인지 헛갈리기 일쑤다.

"요즈음 일본의 독도 망언과 국사교과서 왜곡 때문인지는 잘 몰라도 저희 집을 찾는 손님마다 왜 하필이면 '세꼬시'란 일본 말을 간판으로 붙였냐고 항의조로 물어봐요. 하지만 저희 집 간판에 붙은 '세꼬시'는 순수한 우리말이에요. 말 그대로 세 가지 생선회가 '꼬시다'는 그런 뜻이지요."

지난 10일(금) 밤 10시. 홍일선, 이승철 시인과 소주 한 잔 나누기 위해 찾은 서울 마포구 도화동 생선회 전문점 '姜(강) 세꼬시'(홀리데이인서울 뒷길 도화파출소 옆). 이 횟집 주인 강정하(47)씨는 숨 쉴 틈도 없이 "저희 집에서 세꼬시로 부르는 생선은 가자미, 도다리, 전어"라고 못 박는다.

"성이 강씨라서 그런지 스스로 생각해도 고집이 좀 센 편"이라고 말하는 강씨는 처음 횟집 이름을 '세꼬시'라고 정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세꼬시가 일본 말인 줄 몰랐다고 되뇐다. 그 뒤 생선회를 먹으러 온 어느 손님이 '세꼬시'는 일본 말이라며 횟집 이름을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조언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강씨가 지금으로부터 3년 앞 이곳에서 처음 횟집을 열 때 보다 독특한 이름을 달아야 다른 횟집과의 차별성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쳤다는 것. 그렇게 고민 끝에 스스로 지어낸 순수한 한글 이름이 '세 가지 생선회가 꼬신 집'의 줄임말인 '세꼬시'였으니, 강씨의 자부심 또한 클 수밖에.

경남 밀양이 고향인 강씨는 "갓 잡아 올린 생선을 곧바로 회로 뜬 것보다 생선의 피를 모두 뺀 뒤 저온 숙성실(0~5℃)에서 5~10시간 정도 두는 것이 육질이 단단하고 좋아진다"며, 진정한 생선회의 맛은 저온 숙성시킨 회라고 속삭인다. 이어 저온 숙성시킨 생선회를 한번 먹어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는다고 귀띔한다.

이 집 생선회의 특징은 갓 잡아 올린 생선을 산지에서 피를 모두 뺀 뒤 얼음에 채워서 4시간 정도 걸려 이곳으로 가져온다는 점이다. 그리고 도착 즉시 0~5℃의 저온 숙성실에 넣어 숙성시킨다. 그런 까닭에 횟집, 하면 당연하다는 듯이 들머리에 반듯하게 놓인 수족관이 이 집에는 아예 없다.




"생선회를 썰 때도 생선마다 다르게 썰어야 해요. 육질이 연한 생선은 조금 두툼하게 써는 것이 좋고, 육질이 단단한 생선은 도화지처럼 얇게 썰어야 생선회 본래의 맛이 살아나요. 하지만 뼈째 썰어먹는 도다리나 전어 같은 생선은 조금 얇게 써는 것이 먹기에 좋아요."

10평 남짓한 자그마한 횟집 ‘강세꼬시’. 횟집 안에는 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맛깔스런 생선회를 안주 삼아 소주를 홀짝거리는 손님들로 빼곡하다.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다. 도대체 이 집 생선회가 얼마나 쫄깃하고 맛깔스럽기에 저리도 많은 손님들이 집에 들어갈 생각도 잊고 음식 삼매경에 빠져 있는 것일까.

5분쯤 지났을까. 그토록 기다리는 생선회는 나오지 않고 식탁 위에 소주 두어 병과 함께 웬 미역국이 한 그릇씩 놓인다. 우선 미역국을 소주 안주 삼아 먹고 있으라는 투다. 소주 한 잔 입에 털어 넣고 시원한 미역국을 그릇째 들고 후루룩 마시자 금세 속이 확 풀어지는 것만 같다.

잠시 뒤 뚝배기에 수북이 담긴 노란 계란찜과 김치, 다시마무침, 싱싱한 상추와 깻잎, 송송 썬 마늘과 풋고추, 참기름을 푼 된장, 초고추장, 고추냉이가 담긴 종지 등이 차례대로 식탁 위에 올려진다. 이어 커다란 접시에 수북이 담긴 맛깔스런 생선회(3~4인분 3만9천원)가 식탁 한가운데 놓인다. 윤기가 짜르르 흐르는 생선회를 바라보자 금세 입에 침이 흥건히 고인다.

소주 한 잔 입에 털어 넣고, 나무젓가락으로 생선회 한 점 초고추장에 찍어 입에 넣자 혀끝에 부드럽게 착착 달라붙는다. 비릿한 맛은 그 어디에도 없다. 씹을 때마다 쫄깃쫄깃 혀끝을 향긋하고 고소하게 휘감는 깊은 맛도 그만이다. 갓 잡아 올린 생선을 곧바로 회로 썰어 먹는 맛과는 비교할 수 없다.

뭐랄까. 갓 잡아 올린 생선을 곧바로 썰어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맛이 약간 비릿하면서도 물컹거린다고 한다면 저온 숙성시킨 이 집 생선회는 향긋하면서 씹으면 씹을수록 더욱 졸깃한 맛이 기막히다. 입에 넣는 순간 혀끝에 그저 살살 녹아내린다고나 해야 할까.

"저는 산지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자연산만 고집해요. 그리고 그날 쓸 생선만 가지고 와요. 가자미는 매일 새벽 삼척 정라진항에서 가져오고, 도다리 전어 놀래미는 삼천포에서 가져와요. 그리고 생선회가 다 팔리면(영업시간에 관계없이) 그날 영업도 끝이 나는 거지요."


소주가 절로 넘어간다. 싱싱한 상추와 깻잎에 생선회 두어 점, 마늘과 풋고추, 된장을 올려 쌈을 싼 뒤 한 입 가득 먹는 맛도 끝내준다. 참기름을 푼 된장에 초고추장과 고추냉이, 간장을 섞어 생선회를 찍어먹는 맛도 일품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마음에 쏘옥 드는 것은 접시 바닥에 무를 수북이 깔지 않아 생선회가 푸짐하다는 점이다.

"정과 맛을 아는 집"으로 기억해달라는 강씨. 서울에서 생선회 하면 마포 강고집으로 불리기를 바라는 강씨. 강씨는 "깨끗하고 널찍한 다른 횟집에 비해 실내도 비좁고 인테리어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도 날이 갈수록 손님들이 자꾸만 늘어나서 정말 고마울 따름"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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