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네미 마을의 기억 4



<반딧불>

그날 나는 산속에 있었다. 사방은 캄캄하고 주위는 적요했다. 인적 없는 한밤중 반딧불을 보았다. 깜빡이는 불빛을 머리에 인 반딧불이 미미한 불빛의 호(弧)를 그으며 어둠으로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별이 어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성이 암흑 속에 빛을 그었다.

나에게도 정녕 불빛이 있었던가? 반딧불만한 불빛이. 세상에 내가 밝힌 불빛은 없었다.

<갯메꽃>

해송이 서있는 둔덕을 내려서면 자갈밭이 나온다. 자갈밭 밑으로 이어지는 모랫펄. 모랫펄 너머에 물살이 출렁이는 바다가 펼쳐진다.

오래 묵은 해송 사이로 오솔길이 나있다. 여름 아침. 오솔길을 더듬어 바닷가로 내려간다. 둔덕과 이어진 자갈밭 틈새로 모질게 뿌리내린 풀포기가 보인다.

허리를 굽혀야 눈에 띄는 식물인데 두터운 이파리가 청갈색이다. 줄기가 바닷가 자갈밭에 몸을 낮춰 뻗어있고, 줄기 사이로 연분홍꽃이 피었다.

꽃은 나팔꽃과 흡사한데 화판 사이사이 바탕 빛깔보다 더 짙은 줄무늬가 가지런히 져있다.

꽃들은 하나같이 바다를 등지고 화심을 열었다. 둔덕을 향한 모습이 애절하다. 소금기 많고, 바람 거세고, 물기 많은 바닷가에 목숨 내린 이 애틋한 염생식물은 화평한 산야에 자라는 뭇 초화들과 이파리와 줄기도 놀랍도록 다르다.

아! 바다는 왜 이 가녀린 풀포기를 제 기슭에 있게 할까?

<초가을 싸리꽃>

투명한 초가을 섬려한 햇살 아래 눈부신 싸리꽃이 환하게 피어있어 어제에 이어 오늘도 홀로 등성이에 오른다.
불어오는 미풍 속에 싸리꽃이 흔들린다.
대낮인데 귀뚜리가 운다. 등성이와 이어진 연산( 連山)에 영원이 흐른다.
문득 눈물이 어린다.
ㅡ 눈부심이란 진정 눈물의 다른 이름. 그리움이란 진정 외로움의 다른 이름.ㅡ
싸리꽃 옆에 내가 섰다.

<밤나무 계절>

우편 집배원이 단정한 사각봉투을 전해주고 간다. 벗이 보내준 청첩장이다. 힘들여 키운 여식을 혼인시킨다는 소식! 나는 유난히 성실했던 벗의 얼굴을 그려보며 뒷산에 오른다.

밤이 툭 하고 발치에 떨어진다. 이제 밤나무의 가을은 좋은 계절!

여름비 속에 향기를 품던 밤꽃이 밤송이를 가득 키워 밤송이마다 오금빛 밤알을 내밀히 영글게 하고, 이제 이 가을 밤송이로 무거워져 수그린 가지들도 밤송이를 조금씩 벌려 밤알을 하나씩 땅 위에 떨어트리니 밤나무는 비로소 한해의 노고를 다 벗고 무거워져 수그렸던 제 가지를 밝은 하늘에 추슬려 올린다.

그려면서 밤나무는 또 한 생애의 나이테를 키울 것이다. 이제 밤나무는 제 결실을 땅 위에 돌려주고도 서운치 않을 터! 내 친구는 이 가을 공들려 키운 딸의 혼사를 치른다는 소식을 보냈다. 벗이여! 이제 저 밤나무의 가을은 낙엽 앞에서도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대의 가을 또한 쓸쓸한 겨울을 앞두고 좋은 계절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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