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 영암으로의 초겨울 나들이



나는 지난달 24일 통영여고에서 국사를 가르치는 김건선 선생님 부부, 유치원에서 놀이 수학을 지도하는 조수미씨, 강아지 미구(美狗)로 가까워진 한정국 선생님과 함께 전라도 강진과 영암군 나들이를 했다. 오전 8시에 마산을 출발한 우리 일행이 강진군 무위사(無爲寺,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40분께였다.

파랑새가 눈동자를 그려 넣지 못한 미완의 그림을 찾아

원효대사가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관음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었다는 무위사. 해탈문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햇살이 내려앉은 한적하고 단아한 풍경이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반야심경의 중심 사상을 이루는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에 나타나는 공(空)의 개념으로 무위(無爲)를 받아들이면 된다"는 김건선 선생님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절집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왠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현각 스님은 무위에 대해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갈망하지 않는 것이다. 싸우지 않는 것이다.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원하지 않는 것이다. 빈 행위(empty action)이다"고 말했다. 명예든 돈이든 지위든 항상 무언가를 좇는 우리들의 삶에서 새길 만한 말이 아닌가.

무위사의 기품과 아름다움을 가장 느낄 수 있는 곳은 조선 초기인 세종 12년(1430)에 지어진 목조건물로 주심포(柱心包) 형식의 대표적 불전인 극락보전(국보 제13호)일 것이다. 앞면 3칸, 옆면 3칸 크기에 배흘림기둥을 세우고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극락보전은 무엇보다 사찰 벽화의 보고(寶庫)라는 점에서 내게 더욱 매력적으로 와 닿았다.

극락보전 안에 그려진 벽화가 무려 29점이나 된다 하니 그저 상상만 해도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벽화 보존을 위해 조선 성종 7년(1476)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호)와 그 뒷면 그림인 백의관음도(보물 제1314호)만 그곳에 두고 나머지 벽화들은 통째로 드러내어 성보박물관에 진열해 놓았다.

고려 불화의 전통을 이어받은 아미타후불벽화는 150cm 정도의 장대한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보물 제1312호) 뒤로 따로 세워진 토벽에 그려져 있다. 뒷면 벽화인 백의관음도에는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두 손을 앞으로 엇갈리게 모으고 오른손에는 버들가지,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져 있었다.

그 아래쪽에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노비구(老比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선재동자(善財童子) 또한 인상적이다.

무위사 벽화에는 흥미로운 파랑새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행색이 초라한 노스님이 찾아와 극락보전 벽화를 그리고 싶다며 주지 스님에게 49일 동안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아 달라고 당부를 드렸다.

그러나 49일째 되는 날, 주지 스님이 하도 궁금해서 몰래 들여다보자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던 한 마리 파랑새가 인기척을 느끼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는 거다. 그래서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그려지지 못한 채 지금도 미완으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파랑새는 어디로 날아갔을까.



도선국사가 살아 숨쉬는 월출산 도갑사로

우리는 예스러운 무위사에서 나와 이제 신라 말 도선국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도갑사(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로 향했다. 영암으로 가는 도중에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고 오후 2시께 도착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차창 밖 너른 벌판에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진 월출산의 그윽한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마음이 들떠 있었다.

정겨운 돌계단을 딛고 올라가 국보 제50호인 해탈문을 지나갔다. 해탈문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어 왠지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도갑사 경내에 주춧돌을 한데 모아둔 곳도 눈길을 끌었다. 지난 1977년에 참배객들의 부주의로 대웅보전이 불타는 비운을 겪었다 하더니 그 흔적들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작은 통나무배 같이 생긴 석조(전남유형문화재 제150호)로 갔다. 조선 숙종 8년(1682)에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길쭉하고 네모난 돌 안을 파내 물을 담아서 쓰던 돌그릇이다. 길이가 5m 정도에 달하는 석조의 크기로 도갑사가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물맛 또한 참으로 달고 맛있다. 월출산 산행을 다녀온 등산객들도 거기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갔다.

도갑사 미륵전에는 미륵은 없고 석가를 모셔 놓았다. 몸체와 광배(光背)가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마치 바위에 불상을 직접 새긴 마애불 같은 느낌을 주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으로 고려 시대의 화강암 불상이다. 무위사 벽화들과 마찬가지로 석조여래좌상도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그나마 꽃무늬가 예쁜 미륵전 문짝 사진을 찍으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우리는 미륵전에서 내려와 도선·수미비각으로 가서 도선국사와 도갑사를 크게 중창한 수미선사를 추모하는 도선․ 수미비(보물 제1395호)를 살펴보았다. 영암에서 태어난 도선국사는 15세 때 불가에 출가한 뒤 중국에 가서 풍수지리를 공부하고 돌아와 문수사 터에 도갑사를 세운 분이다.



비각 창살 때문에 도선·수미비를 가까이에서 볼 수 없었고 사진도 찍기 어려웠지만, 연꽃잎이 아래로 흘러내리다 끝이 또르르 말려 있는 모습 등 조각이 참으로 정교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조선 인조 14년(1636)부터 효종 4년(1653)까지 17년이나 공을 들여 세운 비라고 한다. 더욱이 여의주를 입에 문 채 비석을 받치고 있는 돌거북의 거대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큰 절에 가면 이상스레 부도밭에 발길이 닿는다. 마음에 스치는 세월의 바람을 느끼면서 깊은 영혼의 울림을 듣고 싶은 것일까. 아쉬움 속에 월출산 자락에 있는 도갑사와 무위사를 뒤로 하고 마산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피곤했는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들의 이야기 소리에 그만 잠을 깼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묵묵한 산을 배경으로 달이 휘영청 떠 있다. 그리고 내 마음밭에도 어느새 아름다운 월출산(月出山)이 따라와 앉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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