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책임은 져야겠고, 소나기는 피해야 하는데…

“강해도 너무 강하다. 사실이면 20년 공든 탑이 한방에 무너질 수도 있다.” 삼성그룹 전 법무팀장인 김용철 변호사의 이른바 ‘8대 의혹’ 추가 폭로 이후 만난 재계 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이번 김 변호사의 폭로는 강도가 강해도 너무 강했다. 삼성그룹이 김 변호사를 향해 ‘거짓말쟁이’이라며 반박하고 나섰지만 이미 일파만파 퍼져버린 ‘삼성 비리 의혹’을 쉽게 잠재우긴 어려워 보인다. 때문일까. 재계에선 이번 삼성 비리 의혹 사건에 대한 그룹 내부의 ‘책임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의혹이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다.

삼성의 주장처럼 김 변호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사태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한 책임은 분명 삼성 내부에 있다는 시선인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재계에선 구체적인 ‘책임론 시나리오’까지 등장했다. 물론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일 뿐이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을 놓고 재계의 설왕설래는 이어지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책임론 시나리오는 대체 어떤 것일까. <시사신문>이 따라가 봤다.


김용철 폭로 중심에 이학수 사단 줄줄이 거론되며 해체설 ‘솔솔’
좋지 않은 여론 돌리는 확실한 대안이 이건희 회장 일선 후퇴?


▲ 삼성그룹 전 법무팀장인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리 의혹을 추가 폭로했다. <사진/맹철영 기자>
사실 재계에서 책임론 시나리오가 나오는 이유 가뜩이나 기업들의 경영 상황이 좋지 않은 가운데 폭로로 시작된 사태가 사건화하면서 혹여 재계 전반에 ‘반기업 정서’가 자리 잡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바탕에 깔려 있다.

또 아무리 남의 장사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게 재계의 암묵적인 합의라고는 하지만 ‘관리의 삼성’이 어찌 이 지경까지 오도록 내부와 외부 관리에 허점을 보였느냐는 질타의 의미도 품고 있다.

삼성으로서는 김 변호사의 폭로에 이은 특검법 수용까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참담한 지경에 몰려 있다. 속내는 수뇌부의 말에서도 엿보인다. 일례로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11월29일 한 행사에 참석한 자리에서 “사업계획도, 인사도 늦어지게 됐다. 특검이 내년 상반기까지 진행될 것 같은데, 경영진이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라는 말로 답답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이학수 사단 해체설

뿐만 아니다.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 등 삼성 수뇌부 대부분이 직접 수사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시름을 깊게 만든다. 김 변호사가 폭로한 내용 모두가 삼성 수뇌부와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탓이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사건 수사에서 직접 수사를 피했던 이건희 회장 등 오너 일가도 이번에는 소환을 피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검찰 안팎의 대체적인 견해다.

이미 검찰은 ‘출국금지’ 조치라는 강수를 꺼내든 상태다. 폭로의 시작인 비자금 의혹과 차명계좌 의혹, 추가 폭로된 삼성물산, 삼성SDI 등 비자금 조성 의혹, 오너 일가 등 미술품 구매 의혹 모두 삼성 일가와 삼성 수뇌부를 옭아매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른바 ‘이학수 사단’의 책임론 시나리오가 등장한다. 김 변호사의 폭로 내용 대부분이 이학수 사단으로 불리는 삼성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를 겨냥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런저런 삼성의 소사를 모두 관장하는 이학수 사단이 이번 사태를 불러온 당사자로 코너에 몰린 것. 당사자들에겐 심각한 명예훼손이겠지만,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을 비롯해 최광해(전략기획실 부사장), 최주현(전략기획실 부사장), 이순동(전략기획실 사장), 이우희(전 에스원 사장), 노인식(에스원 사장) 등 이학수 사단이 줄줄이 의혹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때문에 시민단체와 정치권 일각에선 ‘이학수 부회장을 구속 수사 하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김 변호사 폭로의 진실 여부는 수사를 통해 밝혀질 터이지만 이런 사태를 불러온 책임은 당연히 이학수 사단이 져야 한다는 게 책임론 시나리오의 핵심이다. 이미 지난해 구조조정본부가 전략기획실로 바뀔 당시에도 이건희 회장이 직접 나서 ‘느슨해진 조직’을 질타했던 만큼 이번 사태의 책임도 당연히 이학수 사단으로 포커스가 맞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재계 한 인사는 “김 변호사의 폭로 내용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오너에 대한 과잉충정의 발로가 아니겠냐.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내년 초(예정대로라면 12월) 진행될 정기인사에서 이학수 부회장을 포함한 전기실 핵심 인사들의 책임론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방식은 구조본에서 전기실로 바뀐 형태를 따라하거나 아니면 아예 수뇌부의 문책성 경질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조심스런 관측을 내놨다.

이건희 회장 일선 후퇴설

이번 사태가 터지면서 가장 시름이 깊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삼성의 오너인 이건희 회장이다. 김 변호사의 폭로가 정말 사실로 밝혀지고, 이로 인해 혹여 사법처리를 받게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에서가 아니다. 고 이병철 창업주로부터 삼성의 대권을 이어받아 20년간 일군 수많은 성과가 한순간에 평가절하 될 수 있는 위기에 봉착한 탓이다.

삼성그룹도 이런 점에 매우 당혹스러운 분위기다. 삼성이 이번 사태 이후 12월5일로 회장 취임 20주년을 맞는 이 회장의 업적 알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되는 대목이다.

사실 이 회장이 일군 성과에 이견을 다는 이는 거의 없다. 재계 구성원 누구라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대권을 이어받은 1987년 당시 재계 서열 3위에 불과했던 삼성을 현재의 ‘부동의 1위’에 올려놨고, ‘신경영론’을 주창하면서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 반열로 끌어 올렸다. 삼성이라는 사기업을 넘어 국익적 측면에서도 이 회장의 업적은 높은 평가를 받을 만 하다.

때문에 누구보다 이번 사태로 삼성이 흔들리는 것이 고통스러운 장본인은 이 회장일 수밖에 없다. 경영 차질은 이미 가시화되고 있고, 해외바이어들이나 외신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점점 피부로 느껴진다. 신경영론에 이어 스스로 고민하고 생존전략을 마련하자는 의미에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 ‘창조경영’이 이번 사태로 그룹 전반에 자리 잡지 못할까 우려도 높다. 내년 농사는 계획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게 삼성 내부의 전언일 정도다.

이 회장의 일선 후퇴설도 이런 배경이 한몫한다. 느슨해진 조직을 추스르고 좋지 않은 여론을 돌리기에 이만큼 확실한 대안도 없다는 게 재계 일각의 시각이다. 완전한 퇴진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발짝 일선에서 후퇴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성한 얘기라는 것이다.

사실 삼성의 후계구도가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는 점이 이런 ‘설’의 한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그룹 지배력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고, 이미 재계에선 이 회장이 취임 20주년을 기점으로 공식적인 대권 이양을 공표하지 않겠느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던 터다.

여기에 ‘편법 승계’ 의혹은 두고두고 삼성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사안이다. 특히 특검에서 다시 이 부분에 대한 재수사가 진행될 가능성은 거의 100%다. 어떻게든 이 회장으로서도, 삼성으로서도 이 문제를 털고 가야 한다. 이 회장이 일선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한 이 전무의 ‘황태자’ 꼬리표는 계속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당연히 편법 승계 화살은 꺾이기 어렵다는 게 재계 일각에서 후퇴설이 피어나는 배경이 되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두산그룹의 사례에서 보듯이 오너의 일선 후퇴가 여론을 돌리는 가장 큰 카드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물론 이 회장의 일선 후퇴나 이학수 사단의 해체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설’에 불과하다. 김 변호사의 폭로에 대한 진실이 명명백백 밝혀지지 않은 마당에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장난 수준일 수도 있다. 다만 김 변호사가 내부자였고, 폭로한 의혹 대부분이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삼성의 체제를 꼬집는 것이어서 시나리오가 등장할 만큼 주목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이 투명한 기업으로 거듭나기 바란다’는 김 변호사의 말에 국민적 공감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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