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에 아련하게 떠오르는 '엿장수와 호박'



"철컥- 철컥- 철컥-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아~ 절씨구 씨구 들어간다아~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철컥- 철컥- 어제도 왔던 엿장수~ 오늘도 다시 또 왔네~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아~ 절씨구 씨구 들어간다아~ 철컥- 철컥-철컥-"

"엿장수다아~ 엿장수 아재가 왔다아~"

"자! 엿이요, 엿! 둘이 먹다가 한넘 죽어 자빠져도 모르는 그 맛! 아~ 고무신은 없이 살아도 엿 없이는 못사네~ 자! 엿이요, 엿! 사카린보다 더 달고 맛있는 울릉도 호박엿이 왔어예~ 자! 찌그러진 양동이, 세숫대야, 뒤축 터진 타이아표 통고무신, 못 쓰는 낫과 호미, 구부러진 못토막... 모두 모두 다 받습니더. 퍼뜩 퍼뜩 갖고 나오이소~ 자! 엿이요, 엿!"

겨울날 오후가 다가오면 우리는 그 엿장수 아저씨의 철컥거리는 가위질 소리가 들리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창원 일대의 마을 마을을 돌아다니며 엿을 팔던, 마음씨가 너무 좋아 탈이던 그 엿장수 아저씨...

오후 내내 우리 마을 곳곳에 귀청이 따갑도록 가위소리를 철컥거리다가 때로는 '옛다, 오늘은 공짜다'라면서 마치 도끼날처럼 생긴 그 넓적한 쇠토막으로 엿을 타닥타닥 떼내 우리들에게 나눠주시던 그 엿장수 아저씨...

그 엿장수 아저씨는 일주일에 한번쯤인가 반드시 우리 마을을 찾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쯤 지나야 엿과 바꾸어 먹을 만한 그런 여러 가지 물건들이 조금씩 모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먹을 것이 그리 흔하지 않았다.

가게도 마을회관에 꼭 한 군데뿐이었고, 또 가게가 많아도 무엇을 사먹을 만한 그런 돈도 없었다. 물론 가까운 야산에 가면 말라 비틀어진 열매 같은 것은 제법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그 달콤한 눈깔사탕이나 엿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당시 우리들은 누구나 금속 조각 따위나 다 떨어진 고무신, 할머니와 어머니의 머리카락, 구멍 난 냄비, 다 떨어진 옷가지 등을 눈에 불을 켜고 모았다. 그 달콤한 엿을 먹는 꿈을 꾸면서 말이다. 또 지금처럼 쓰레기 걱정이 없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집에서 못쓰고 버리는 웬만한 것들은 모두 호박처럼 누른 그 엿과 바꿔 먹을 수 있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마을이나 그 엿장수 아저씨나 말 그대로 꿩 먹고 알 먹고를 했던 셈이었다.

그 엿장수 아저씨가 끌고 다니는 손수레 위에 놓인 엿판에는 여러 종류의 엿이 있었다. 아예 일정한 크기로 잘려진, 막대기 같이 생긴 동그란 엿이 있는가 하면, 마치 떡판처럼 넙적하게 깔려 널찍한 쇳토막으로 타닥타닥 쳐서 떼내 먹는 그런 엿이 있었다.

또 깨알을 촘촘하게 붙인 엿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깨알이 붙은 그 엿, 그러니까 다른 엿보다 조금 더 비싼, 그 깨엿보다는 밀가루가 허옇게 묻은 그 누런 엿이 더 맛있었다.

당시 나이 많은 형들은 엿장수가 오면 엿내기를 많이 했다. 엿내기는 일정한 크기로 잘라진 그 엿, 그러니까 동그란 막대기 같은 그 엿으로 했다. 엿내기는 주로 형들 서너 명이서 마음에 드는 엿을 골라 한동안 견주다가 이내 딱, 하고 엿을 부러뜨린다. 그리고 엿이 부러진 그 자리를 입으로 훅- 훅- 불었다.

서로의 엿을 나란히 갖다대고 엿토막에 난 구멍 크기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구멍이 큰 사람이 이기는 놀이였다. 그리고 진 사람이 그날 그 엿내기를 지켜본 사람들 모두에게 엿 한 토막씩을 사야 했다. 우리가 엿내기를 애타게 지켜보는 것도 바로 그 엿 한 토막을 얻어먹기 위해서였다.



"엿쟁이 아재야! 내도 엿 도라(주라)"
"그기 뭐꼬?"
"쇳가리(쇳가루)다 아이가"
"에라이~ 니가 지금 어른을 놀릴라카나"
"씨~ 지난 번에는 쇳가리도 된다 캐놓고서는..."
"아나! 엿 무거라(먹어라). 이기 진짜 엿 묵는기다, 알것제"

그랬다. 군데군데 고운 모래가 소복히 쌓인 우리 마을 시냇가 모래밭에는 영락없이 까만 띠가 그어져 있었다. 우리들이 냇가에 내려가 그 까만 띠에 지남철을 갖다대면 그 까만 띠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지남철에 새까맣게 들러붙었다.

삼한시대, 창원이 철 생산지였다는 것은 뒤에 안 일이었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쇳가루였다. 우리는 겨울 한나절을 지남철에 마구 들러붙는 그 쇳가루를 모으는 재미에 종종 소가 김장배추밭에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지낼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 쇳가루로는 아무도 그 달콤한 엿을 바꾸어 먹지 못했다. 우리들이 용을 쓰며 지남철에 새까맣게 들러붙는 그 쇳가루를 손바닥에 아무리 긁어모아도 결코 엿과 바꿀 수가 없었다.

그 쇳가루는 하루 종일 긁어모아도 미숫가루 같이 고운 그 모래 반 줌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쇳가루를 모을 때마다 그 쇳가루로 진짜 엿을 먹은 그 동생을 떠올렸다.

그래, 12월의 오후 2~3시가 되면 늘 덕지덕지 기운 군복을 입고 우리 마을을 찾아오는 그 엿장수 아저씨... 밀짚모자를 푹 눌러쓰고 큰 가위를 철컥철컥 거리며 리어카를 끌고 와 '자! 엿이요, 엿!' 이라고 외치며 각설이타령을 불러대던 그 엿장수 아저씨...

그 엿판 위에 빼곡히 놓인 그 노오란 울릉도 호박엿... 울릉도 호박엿? 그래, 이 울릉도 호박엿에도 얽힌 설화가 있다.

울릉도를 처음 개척할 당시, 울릉도에 도착한 개척민들은 태하와 서달령이라는 고개를 중심으로 열대여섯 가구가 조개껍질처럼 흩어져 살았다. 그 가구 중 어느 한집에 혼기를 넘긴, 마치 호박처럼 정겨운 노처녀가 살고 있었다.

이른 봄이 되자 그 노처녀는 육지에서 가지고 온 호박씨를 자기 집 울타리 밑에 심었다. 노처녀의 손길에 의해 고이 심어진 호박씨는 이내 싹을 틔우고 하루가 다르게 울타리를 휘어 감으며 노오란 호박꽃을 여기저기 피웠다.

그리고 여름이 다가오자 줄기 곳곳에 애호박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처녀는 자신이 심고 가꾼 그 호박을 하나도 따먹지 못했다. 호박이 채 자라기도 전에 혼처가 생겨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시집을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박은 그 노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큼직큼직한 호박을 주렁주렁 매달기 시작했다.

노처녀의 식구들은 끼니 때마다 그 호박을 따서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호박은 따먹고 또 따먹어도 자꾸만 열렸다. 그리하여 가을이 다가오자 노처녀의 식구들은 보름달처럼 누렇게 잘 익은 그 맷돌만한 호박을 따다가 노처녀가 쓰던 그 방안에 가득히 채웠다.

마침내 겨울이 다가와 이 마을에도 눈이 내렸다. 겨울 어느 날, 일거리가 없어 심심하던 노처녀의 어머니는 그 호박으로 죽을 쑤어 마을 사람들과 나눠먹었다. 그런데 그 맛이 어찌나 단지 마치 엿과 같았다.

섬인지라 별로 단맛 나는 것이 없었던 이 곳 사람들은 겨우 내내 그 엿 맛이 나는 호박을 자꾸 자꾸 쑤어먹었다. 이때부터 엿 하면 울릉도 호박엿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고, 울릉도에서는 이 엿 맛이 나는 호박을 많이 재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해마다 겨울 오후가 되면 남진과 나훈아보다 더 노래를 잘 부르던, 각설이는 저리 가라며 우리들을 배꼽 빠지게 웃기던 그 엿장수 아저씨가 생각난다. 그 엿장수 아저씨의 검게 그을린 손을 하얗게 덮으며 엿판에서 타닥 타닥 떨어져 나오던 그 누런 호박엿이 생각난다.



"자~ 엿이요, 엿. 이 엿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요기요기 앞산가새에서 3년~ 저기저기 비음산에서 3년~ 그기그기 장복산에서 3년~ 도합 9년을 묵은 바로 꼬리 아홉 개 달린 그 백여시 보다 더 효과가 좋은 바로 그 엿이요.

훠이~ 훠이~ 애들은 가라~ 애들이 이 엿을 묵으모(먹으면) 우짤끼다 말고. 자~ 자~ 저기 저 버드나무 같이 키 큰 아저씨~ 이 엿 좀 묵어 봐~ 오늘 밤 안방 천장이 모두 다 뚫여~ 요 앞에 장작처럼 바짝 마른 아지매~ 이 엿 좀 묵어 봐~ 요강통이 팍팍 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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