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몽구 시인의 '빈잔'


너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시간은 기린 목보다 길다
문 밖으로 돌려진 내 마음은
술이다
벌겋게 타고 있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돌밭뿐인데도
기꺼이 뿌리를 내려
이쁜 꽃이 된 사람아.

오늘은 왜 이리 늦는지
너를 기다리고 있자면
나는 다 비어서
빈 잔이 된다
채워지기를 기다리며
저물도록 말라가고 있다.



아무리 용을 써보아도 돌밭뿐인 시인의 가슴에 "기꺼이 뿌리를 내려/ 이쁜 꽃"으로 피어난 아름다운 그 사람은 누구일까요. 가난한 시인의 추운 마음을 언제나 살갑게 품어주며 말없이 뒷바라지하는 아내일까요? 아니면 못다한 사랑처럼 시인이 아무도 몰래 가슴 저 밑바닥에 꼭꼭 숨겨둔 첫사랑의 그 여자일까요.

아니 어쩌면 시인이 기린 목보다 긴 시간 동안 마음을 벌겋게 태우며 기다리던 '너'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반 토막 난 한반도의 반쪽 '북한'인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빈 잔을 바라보며 빈 잔은 '남한'이요, 그 빈 잔에 차야할 것은 '북한'이라고 여기며, 남북통일의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란 시에 나오는 '님'이 일제에 강점 당한 조국을 상징하듯이, 시인 또한 빈 잔을 앞에 두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너'를 생각하며, 아무리 기다려도 쉬이 다가오지 않는 통일의 그날을 떠올리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인의 기다림 또한 빈 잔이 되어, 예전의 한반도처럼 다시 "채워지기를 기다리며/ 저물도록 말라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누가 그랬던가요. 잔은 꼭꼭 채워야 제 멋이 난다고. 그렇습니다. 선반 위에 가지런하게 엎어진 빈 잔은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리 허전하고 쓸쓸하게 여겨지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세워진 잔, 하필이면 그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탁자 위에 올려진 텅 비어 있는 그런 잔을 바라보면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고 허전하게만 느껴집니다.

빈 잔 속의 그 비좁은 공간, 그 공간이 왜 그리도 슬프고 안타깝게 보이는 것일까요. 마치 누군가 안쓰러운 눈빛을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텅 빈 공간을 꼭꼭 채워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그 사람은 1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고, 다시 2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빈 잔 또한 1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고, 다시 2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다시 채워주지 않습니다.

차리리 누군가 그 잔을 얼른 씻어 선반 위에 가지런하게 엎어 놓았다면 그리 안쓰럽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다리는 그 사람이 금세라도 시인 앞에 다가설 것처럼 그 빈 잔에도 금세 누군가 그림자처럼 다가와 가득 채워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빈 잔 또한 그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인처럼 긴 목을 쭈욱 빼고 흔들림 없이 똑바로 서 있습니다.

빈 잔은 진종일 자신을 채워줄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인 또한 진종일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빈 잔과 시인이 기다리는 그 누군가는 바로 우리 사회의 메말라가는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줄 그런 사람, 마음이 아름다운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그 때문에 "너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시간은 기린 목보다 길다/ 문 밖으로 돌려진 내 마음은" 술이 되어 "벌겋게 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다리는 그 아름다운 사람은 좀처럼 오지 않습니다. 돌밭을 걸어가고 있는, 앞으로도 빈 잔처럼 그렇게 걸어가야만 할 시인에게 서슴없이 다가와 따스한 사랑으로 감싸줄 사람.

그 아름다운 사람은 바로 시인이 몹시도 사랑하는, 그리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끝까지 지켜주어야 할 사랑하는 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름다운 사람은 시인의 아름다운 기다림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사람, 그 아름다운 기다림 또한 시인의 마음입니다. 아름다운 그 사람, 아름다운 그 기다림은 채워도 채워도 늘 비워지는 시인의 마음을 행여 놓칠새라 늘 빈 잔처럼 곁에 서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혹시나 잘못하여 제풀에 넘어져 깨지지는 않을까, 혹시나 실수를 하여 잔이 쏟아지지는 않을까, 늘 지켜보는 그런 아름다운 기다림입니다.

새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작을 맞아 사람들은 지난해 켜켜이 쌓였던 묵은 것들을 훌훌 털어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묵은 모든 것들을 비우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이제 묵은 것을 벗겨내고 새롭게 지은 마음의 창고에 새로운 희망을 담아봅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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