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운 시초’ 재판, 관계당국 판매금지 압수조치

정음사에서 <<한하운 시초>>를 재판하자 관계당국은 예기치 않게 판매 금지와 압수조치를 취했는데 그 사연인즉 이랬다.

“세간에 커다란 물의와 비난을 자아낸 가운데 전국 각 서점에서 팔리우고 있던 문제의 <<한하운 시초>>는 정부수립 이전 이미 좌익선동서적이란 낙인을 찍었던 것으로서 동 서적의 재판발행에 즈음하여 당국의 태도가 자못 주목되어 오던 바 경남경찰국에서는 치안국의 명에 의하여 지난 8월 초순 이래 예의 내사를 거듭해 오던 바 드디어 일제히 압수하였다고 하는데 앞으로도 수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태양신문>>53.8.24).



한하운이 시인으로 등단한 시기나 시집을 낸 것이 정부수립 이후인 1949년이란 점으로 볼 때 이 기사는 터무니없다. 더구나 주간지 <<신문의 신문>>은 8월 1일자에서 그를 ‘문화 빨치산’으로 낙인 찍어버려 악성 루머는 그가 유령인물로 문둥이로 위장해 좌익활동을 하고있다는 단계로 올라가게 되었다.

‘하운’이란 호마저 국가 멸망의 저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시 전체가 적기가를 닮았다는 비난이 돌출된 바로 이런 시점에서 문제의 <<서울신문>> 특종이 나가자 금새 <<태양신문>>이 조목조목 따져가며 한하운과 그 주변 인물들(이리 농림학교 동창생 K씨,옛 연인 M양 등)은 물론이고 시인 박거영(朴巨影),조영암(趙靈巖),작가 최태응(崔泰應)과 시집을 내준 정음사 최영해(崔暎海)사장까지 모두에게 좌익과 연관된 비밀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민족적인 미움을 주자 -- 적기가 <<한하운 시초>>와 그 배후자>란 제목으로 1953년 11월 5 - 8일까지 4회에 걸쳐 연재된 이 글의 필자는 이정선(李貞善) 평화신문 문화부장이었다. 한하운같은 문둥이 서정시인을 투철한 빨치산 운동가로 분장시켜 현대 한국언론사에서 매카시즘의 한 표본이 된 이 글은 열정적인 반공의식으로 충만하여 시집 <<한하운 시초>>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정선에 의하면 “간 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마디/머리를 긁다가 땅위에 떨어진다”(<손가락 한마디>)고 쓴 이유조차도 “당국에 대하여 문둥이와 빨갱이를 판별 못하도록 하자는 농간이 있는 것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하운의 시 <데모><명동거리 1> 등과 이병철의 <한하운 시초를 엮으면서>란 선자의 말 중 한 두 구절씩을 인용하여 “공산주의 프로파간디스트”로 짜맞춰 부각시켰다. 물론 한하운을 발굴한 시인 이병철을 거론하여 이제 그가 월북하여 사라진 자리에다 조영암을 동원하여 이병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고 꼬집으면서 한하운과 그 배후세력의 가차없는 수사를 촉구했다.

이 글은 한걸음 더 나아가 정음사 최영해 사장이 서울신문 취체역(이사)이며, 한하운의 시를 한국 대표시의 하나라고 소개한 <<현대시 감상>>의 저자 장만영은 서울신문 출판국장이란 사실까지 거론하여 은근히 서울신문 전체의 좌경화 이미지를 덧칠해냈다.

한하운을 좌경분자로 보게 된 배경 설명에서 이정선은 “그 당시 필자와 <<신문의 신문>> 발행인 최흥조(崔興朝)씨와 그리고 아동문학가 김영일(金英一)등 세사람”이 모여 “<<한하운 시초>>의 발간은 문화빨치산의 남침”이며, 더구나 이병철의 글 내용을 살짝 고쳐 조영암의 이름으로 쓴 <후기>가 “민족적인 것으로 캄푸라쥬하여 전국 서점에 배본하고 있음은 틀림없는 신각도의 북한괴뢰들의 대남공작으로 간파하여야 한다”는 견해에 일치했었다고 역설했다.

여기까지의 사건 개요를 요약하면 이렇다. 한하운 시집 재판이 나온 게 6월, 반공투사 셋은 잽싸게 각기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신문의 신문>>(최흥조),<<태양신문>>(김영일은 당시 태양신문 발행 주간지 <<소년태양>>에 근무),<<평화신문>>을 통해 여론화 했는데 중과부적인 <<서울신문>>은 특종한 3일만에 두 간부의 목만 억울하게 자르고 말았다.

바로 그날 관계당국은 한하운을 본격 수사한다고 발표(11.20.실은 이미 11월 초부터 내사)했고, 몇몇 언론의 고발에 국가기관이 본격적으로 개입하자 관망하던 언론들도 일제히 수사착수 기사를 쓰게 되어버려 이제 거지 한하운의 운명은 수사권에 당그라니 매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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