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레스테스〉, 신들의 주사위 놀음에 갇혀



영화는 ‘장엄한 시각적 체험’이라고 말한 스탠리 큐브릭(1928~1929)의 말은 대극장에서 상연되는 희랍비극의 미학과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연극의 스토리에 빠져들다 보면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배우들의 음성이나 음향은 때로 시각적으로 들려온다. 일상의식에서 벗어난 낯선 공감감적 체험이다.

▲ 클리템네스트라와 오레스테스, 살인자와 살해당하는 자, 그런데 이들은 모자지간이며 각자의 신념 속에서 타협할 줄 모른다. 아폴로인 척한 아들과 디오니소스에 취한 어머니.
극단 《백수광부》의 24번째 작품 <오레스테스>의 무대디자인은 단순하고 강력했다. 특히 사각형 장막을 대각선으로 잘라놓은 거대한 백색 삼각형의 위압적인 힘은 무대의 시야를 왜곡해 불균형스런 불가해한 기분 속으로 빠뜨린다. 무대 바닥을 향해서 날을 내리세우고 있는 예리한 삼각형의 꼭지점은 주인공 오레스테스가 자신에게 꿀 같은 젖을 먹여준 어머니를 죽인 칼처럼 언제 무대-대지 위로 떨어질 지 모른다는 위기감과 긴장감으로 관객을 불안하게 한다.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오레스테스의 아버지 아가멤논은 개선한 그 날, 신들의 질투를 자극하는 자줏빛 주단을 밟고 들어간 침실에서 아내의 손에 들린 도끼에 맞아 절명한다. 오레스테스의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는 해신(海神)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사랑하는 딸 이피게니아를 희생양으로 갖다바친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남편을 죽인 여인 클리템네스트라는 간부(姦夫)이자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복수에 미친 요물 아이기스투스와 사랑에 빠진다.

과거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 왕은 왕위 계승을 위해 동생 튀에스테스와 치열하게 경쟁하던 중, 자신의 아내를 유혹하는 튀에스테스의 수작을 알게 된다. 이에 격분한 아트레우스는 죽여버린 조카의 시신으로 요리를 만들어 튀에스테스에게 먹인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튀에스테스는 형 아트레우스를 죽이고,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은 튀에스테스를 살해한다. 아이기스투스는 튀에스테스가 자신의 딸과 가진 성교의 결과물로 복수심에 미친 인간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스메르쟈코프를 연상케 하는 괴물급 캐릭터다.

여기에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부정과 아이기스투스의 오만방자함을 보고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오로지 몸의 고통으로 견뎌야만 하는 비운의 엘렉트라. 아버지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 만큼 강한 실제적인 힘이 없는 그니는 어느 날 버려진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복수의 완성자 역할을 해줄 오빠의 머리털 흔적을 발견하고 기쁨에 몸을 떤다.

▲ 서양 회화에 표현된 복수의 여신들
그러나 10년 동안의 방랑은 오레스테스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 것 같다. 오레스테스는 엘렉트라에게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라고 설득하며 다시 저 지독한 피의 악순환 속으로 들어가길 거부한다. 이 말을 들은 엘렉트라는 자신의 가슴을 마구 때리는 극적인 연기를 통하여 다시금 오빠의 혈관 깊숙이 작열하는 피처럼 흐르는 복수에의 갈증을 불어넣는다. 호머가 노래했던가? ‘복수는 꿀처럼 달콤하다’고.

거친 방랑 속에서 인생의 다양한 인간사를 경험하게 된 음유시인 오레스테스이건만 아버지의 죽음을 앙갚음해달라고 울부짖는 엘렉트라를 보며 새삼스레 심연 같은 가계의 혈통에서 비롯한 핏빛 행위를 갈구하는 저 격렬한 본능에 굴복한다.

누이 엘렉트라의 혈통(Blood line)를 향한 맹목적인 집착은 다른 사내와 사랑에 빠진 어머니에 대한 반감과 결합하여 되돌이킬 수 없이 강렬해진다. 어느새 내면화한 복수의 화신으로 변해 버린 엘렉트라는 오레스테스에게 ‘피는 속일 수 없다’는 통속적이지만 지긋지긋하게 잔인한 힘의 실체를 깨닫게 해준다.

아트레우스에서 아가멤논, 아가멤논에서 오레스테스로 이어지는 남성적 권력도취는 피와 명예와 정복으로 상징된다.

류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술에 취한 채 스파르타 등지를 방랑하면서도 오레스테스의 가슴 한켠을 움켜쥐고 놔주지 않았던 욕망은 그 질기디 질긴 복수욕이었다. 아가멤논의 초라한 무덤을 류트로 내려치는 순간 감춰둔 칼이 떨어진다. 그 칼은 복수의 완성의 도구이면서 오레스테스가 남몰래 숨길 수밖에 없었던, 타인을 압도하는 잔인한 응징의 상징물이다.

결국 그 칼은 아이기스투스의 창자 속을 뚫고 들어간다. 이어 자기 젖가슴에 균열을 가한 칼에 맞아 쓰러진 클리템네스트라는 죽어가면서 부르짖는다. “내가 독사에게 젖을 먹여 키웠구나.” 혈통이 끊어질 때까지 피안개 속으로 피가 숨는다.

프리기아의 왕 미다스가 산야(山野)의 요정 실레노스에게 인생의 지혜를 청하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최선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요, 차선은 가장 빨리 죽는 것이다.”

오레스테스가 모친을 살해한 후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김을 견디지 못해 아테네 시민들과 원로들에게 재판을 받을 것을 호소한다. 판결은 무죄.

무죄 처리를 받은 오레스테스가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광야에 앉아서 엘렉트라와 나란히 앉아 힘없이 류트를 치는 모습은 자멸하기 직전처럼 애처로워 보인다. 복수를 위해 갖은 지략을 발휘하고 피 묻은 칼을 들고 날뛰던 오레스테스의 이전 모습과는 사뭇 다른 황폐한 정경을 감상하면서 자연히 관객은 이 비극의 재현 뒤편에 숨은 힘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그것은 ‘숫자계산처럼 똑 떨어지지 않지만’ 그런 대로 정해진 숙명을 피해 갈 수 없는 실존의 희롱성(戱弄性)이다.

▲ 클리템네스트라 역을 맡은 서이숙, 자신의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막지 못하고, 그 딸을 죽인 남편을 도끼로 살해하고, 아들의 손에 죽음을 당하는 역을 '비극적인' 연기에 관객은 찬사를 보냈다.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는 어깨를 맞대고 나무 한 그루만이 있는, 언제나 탁한 안개가 껴 있는 광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오누이 간의 근친상간의 가능성을 암시하면서 극은 끝난다. 피는 다시 피 속으로 잠긴다.

기원전 500여 년 전의 그리스의 극작가 아이스퀼로스의 3부작 <아가멤논>, <제주(祭酒)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 등을 바탕으로 고영범 씨가 각색한 이번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본능을 ‘정의’로 착각한 열정적인 맹목형 인간들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정통 비극은 인생의 소소한 갈등을 다루지 않는다. 비극 배우의 몸짓은 간결하되 힘이 있어야 하고 동선은 직선적이어야 하며 억양에는 장중한 기품과 힘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클리템네스트라 역을 맡은 배우 서이숙은 남편의 힘에 눌려 사랑하는 딸 이피게니아의 희생을 막지 못하고 결국은 자신의 아들 오레스테스의 칼에 복수당하는 어머니의 비극적 중량감을 호소력 있게 표현했다.

음악/음향팀은 극의 리드미컬한 긴장을 청각적인 율동감으로 살려냈으며 김창기 씨의 조명디자인은 정갈했다. 음향과 조명은 비극적 한계 안에 갇혀 일방향으로 내몰리는 배우들의 고통과 절망을 표현하는 데 유효하다.

▲ 공식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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