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철 시인의 '무청 실가리'

목이 잘린 채
축 늘어진 머리카락으로
빨랫줄에 걸려 있다

언제쯤에나
시린 세상 풀어헤치고
보글보글 거품 게워내며 끓어오를까
새벽 인력시장 꽁탕 치고 돌아앉은
다리 밑 식객들의
허기진 창자에 몸 풀까



낙엽이 툭, 툭, 떨어져 뒹구는 가을의 끝자락입니다. 괜스레 마음이 빛 바랜 저 낙엽처럼 쓸쓸하고 허전하기만 합니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장터에 앉아 소주나 한 잔 할까 싶어 가까운 재래시장으로 나섭니다. 시장 곳곳에는 밭에서 금방 뽑은 듯한 싱싱한 가을 무가 배추더미 속에 널려 있습니다.

시장 저 쪽 빌딩숲을 바라보면 온통 흥청망청 넘쳐나는 물질에 겨운 사람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구나 칼처럼 주름이 잘 잡힌 좋은 옷을 입고 다니고, 누구나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하고 반듯한 자가용을 빵빵거리며 보란 듯 마구 으시대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눈높이를 낮추어 재래시장의 구석진 곳을 자세히 살펴보면 엄청난 오물더미 속에 지독한 내음이 나는 폐수가 흐르고 있습니다. 또한 그 오물더미처럼 수많은 시장 사람들이 하루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움푹 패인 눈동자를 두리번 거리고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들의 몸에서는 한결같이 폐수처럼 냄새가 나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습니다.



흑과 백.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온통 흑과 백뿐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들이 꿈꾸는 갖가지 빛깔들, 그런 아름다운 빛깔들은 아예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주고 받는 것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그대로 쓰레기처럼 버림받는 그런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무는 주로 뿌리를 먹는 채소입니다. 하지만 무청이 없는 무 뿌리가 어찌 존재할 수 있을까요. 또한 무 뿌리를 자를 때에는 비록 쓸모 없어 보이던 그 무청도 잘 말려 찌개를 끓여먹으면 무 뿌리는 흉내도 낼 수 없는 독특한 맛을 냅니다. 그리고 우리들 허기진 뱃속에 들어가 무 뿌리처럼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시인은 무청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을 꼬집어내고 있습니다. "목이 잘린 채/ 축 늘어진 머리카락으로/ 빨랫줄에 걸려 있"는 무청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바로 오늘 새벽에도 인력시장에 몸 팔러 나갔다가 "꽁탕 치고 돌아앉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무청과 인력시장에 나온 사람들이 모두 같은 처지라는 그 말입니다.

그래서 아랫도리만 잘린 채 버려진 무청이,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그런 사람들의 "허기진 창자에 몸"을 푸는 것입니다. 무청은 그들과 함께 울분과 분노를 삭이기 위해 지금 빨랫줄에 걸려 제 살을 말리고 있습니다. 유유상종이라고 했던가요. 이 시에서 시인은 버려진 무청이 결국 버려진 사람들의 허기진 속을 채워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뒹구는 노숙자들, 전화와 전기마저 끊겨버린 달셋방 사람들, 카드빚에 몰려 하루 아침에 파산해버린 사람들, 무 한 뿌리, 배추 한 포기 팔기 위해 목에 핏대를 올리는 시장 사람, 200원짜리 오뎅 하나 집어들고 뜨거운 오뎅 국물만 계속해서 퍼마시고 있는 노인들….

그들이 어떻게 하여 우리 사회에서 버림받게 되었습니까. 그 때문에 그들이 뭇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따가운 눈총과 가슴을 콕콕 찌르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겨울 들머리, 다시 한번 그들의 아픈 삶을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보아야 할 때입니다. 왜냐구요? 그 모습은 어쩌면 다가올 내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르니까요.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