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지향 시의 새 지평.4



이 점에서는 남북한이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냥 고향 가고 싶다, 가족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은 그리 어려울 것도 없을 것 같지만, 원초적인 것일수록 더 어렵다는 문학적 창작의 원리 그대로 이런 시야말로 고도의 기교를 요한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향수를 노래한 그 많은 시들 중 명작은 몇 편 안 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요지인즉 남북의 통일 지향시는 그 풍성함과 공감대의 확산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멀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남북한의 다수 통일시가 구호와 목소리 높이기에 바쳐지고 있는데, 그나마도 정작 왜 어떤 대목에서 높여야 하는지를 착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다 보니 통일이란 구호 아래 도리어 분단의 경각심을 고조시켜 주는 예도 있고, 때로는 무력 통일을 가상한 예도 있으며, 흔히 보는 것으로는 상대편을 은근히 깔아 뭉개며 자기 쪽의 우월성을 찬양 고무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반공시’거나 ‘반한시’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통일시는 얄타체제가 남긴 냉전의식과 함께 사라져야할 유물이 아닐까 싶다.

이 단계를 넘어선 통일시가 바로 고향과 이산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데, 이런 노래의 배경에는 역설적이게도 휴전선이 너무나 탄탄하여 통일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을 때가 오히려 찬연히 빛났다면 어떨까.

그리고 은연중 자기 쪽의 승리를 전제로 하면서 상대편을 흡수하려는 무의식이 행간에 깔려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몇몇 예외가 없지 않으나 대부분 남북한 시인들의 뇌리 깊숙이 자리한 무의식의 정체다.

이제 통일시는 이 농경사회의 정서에 익숙했던 전쟁 체험 세대를 극복하고 분단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노래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산가족이 만났을 때 부둥켜 안고 울 수 있는 세대는 이제 사라져 가고 있다. 통일은 이제 이 세대의 몫이 아니라 그 후세의 몫이며, 시문학 또한 그들의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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