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답사 1번지 전남 강진 병영면



따스한 가을햇살이 흙돌담을 비춘다. 돌담 위로는 빨갛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담장 위에 늘어진 호박덩굴도 정겹다. 돌담으로 이어진 마을이 참 푸근한 느낌을 준다. 순간 옛 추억이 떠오른다.

“○○야! 놀∼자.”

어린 시절을 생각할 때 먼저 떠오르는 풍경 가운데 하나다. 친구의 집 앞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같이 놀기를 권했던 시간이다. 그때 골목길은 친구를 불러내 고만고만한 어깨를 마주하고 돌아 나오던 추억의 공간이었다.

담장은 전체적으로 돌과 흙을 번갈아 쌓은 토석담 형식으로 이뤄졌다. 아래는 비교적 큰 화강석을, 중단 이후로는 어른 주먹만한 정도의 돌을 사용해 쌓아 올렸다. 담 위에는 기와로 지붕처리를 했다.

요즘 좀처럼 보기 드문 이 돌담길은 ‘남도답사 1번지’로 알려진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에 있다. 마을 이름은 병마절도사의 영(營)이 있던 곳이란 뜻. 전라도의 군수권을 통괄했던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던 병영성이 있던 곳으로, 성 안에는 군사들이 머물렀다.



백성이 사는 마을에는 돌을 쌓아 담을 올렸다. 말을 타고 순시를 해도 집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쌓았다.

담 쌓는 방식도 이채롭다. 지그재그로 15도 정도씩 눕혀 촘촘하게 쌓고 그 다음 층에 엇갈려 쌓은, 이른바 ‘빗살무늬’형식이다.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네덜란드 사람 하멜(?∼1692)의 영향을 받은 것이란다.

제주에서 표류하다 선원 33명과 함께 이곳으로 압송된 하멜은 1656년부터 7년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마을 담장도 이때 쌓여진 것이라고.

이렇게 쌓은 돌담길은 병마도사나 군관들이 말을 타고 수인산성을 순시할 때 이용했다는 것. 중앙을 가로지르는 골목의 폭은 6∼7m로 보통 골목보다 넓다. 당시 조성된 마을길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걸 보면 계획에 의해 골목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전라병영성지는 사적(397호)으로 지정돼 있다. 병영성은 조선태종 17년(1417)에 초대 병마절제사 마천목(馬天牧 1358∼1431) 장군이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축조했다. 이후 고종 32년(1895)년 갑오경장까지 제주도를 포함해 53주 6진을 총괄했으니 그 위치와 역할이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총 길이 1000m가 넘는 병영성지에는 옹성이 12개, 포루가 2개, 우물이 9개 있었고 2층 누각의 남문, 동문, 북문 등이 있었단다. 하지만 동학농민전쟁 때 화재로 없어지고 성곽만 남았을 뿐이다. 지금은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병영에서 가까운 곳에 한국문학사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인 영랑 김윤식 선생의 생가가 있다. 고려시대 500년 동안 청자를 생산했던 고려청자 도요지와 전국 유일의 청자박물관도 강진에 있다.

도요지에서 만든 상감도자기를 마량포구로 옮겼는데, 이를 노리는 왜적을 막기 위해 병영성을 쌓았던 선조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질 것이다. 실학사상의 산실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체취가 묻어나는 다산초당에 들러도 좋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