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사북에서 억 잃은 선배를 만나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으로 가는 길은 카오스다. 좁은 계곡엔 철길이 지나고 있으며 기존의 2차선 도로 위로 4차선 도로가 만들어진다. 4차선 도로는 계곡을 넘나들며 산과 하늘 풍경을 막는다.

사북으로 향하는 차량이 꼬리를 문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외지 차량이 유난히 많다. 카지노로 향하는 차량일 것이다. 사북의 시작은 안경다리 앞의 육거리다. 좁은 계곡 마을에 육거리라니. 어디로 가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오가는 차들로 인해 갓길 주차도 쉽지 않다.

어렵게 차를 세우고 표지판을 본다. 우측으로 가면 카지노로 알려진 강원랜드이다. 나머지 길은 사북역과 사북 시내로 통하는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예전보다 복잡해진 길이 여행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사북에도 극장이 있었어요?"

작은 다리에서 개천을 내려다본다. 지장천이다. 사북을 관통하는 지장천의 물은 탁하다. 지장천은 함백산에서 발원해 고한을 지나 사북으로 온다. 몇 개의 지류를 만난 지장천은 증산을 지나면서 동남천으로 불린다.

동남천은 별어곡과 선평을 지나 광덕에서 멋진 풍경 하나를 만든다. 광덕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 동남천은 가수리에서 동강과 한 몸이 된다. 지장천에서 어릴 적 추억 하나를 꺼낸다. 초등학교 시절 사북은 검은 땅이었다. 학생들의 그림에 검은 강물이 그려지던 곳도 사북이었다.

사북엔 사촌 누나가 살고 있었다. 누나의 남편은 동원탄좌의 광부였다. 성냥갑 같은 사택이 누나의 집이었다. 마당까지 탄가루가 풀썩거렸다. 집안이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방바닥은 애초 검은 빛이었으며 심지어는 밥상 위에도 탄가루가 떠 다녔다.

뒤척거리며 밤을 보낸 다음날엔 개울을 막아 만든 얼음판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맑고 투명한 얼음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얼음은 검은 물을 들인 아이스케키와 비슷했다. 넘어지면 엉덩이에 검은 물이 들었다. 검은 얼음 위에서도 사북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그날 저녁 사북의 영화관에서 <쥐띠 부인>이라는 영화를 봤다. 객석은 검은 옷들로 가득했다. 영화 화면은 겨울임에도 비가 계속해 내렸다. 질 나쁜 화면을 보면서도 검은 옷의 사람들은 웃고 울었다.

검은 물 대신 누런 폐광의 오수가 흐르는 지장천에서 옛 기억은 추억에 불과했다. 얼음판도, 영화관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이에게 영화관이 있었던 자리를 물었다.

"사북에도 극장이 있었어요?" 오히려 놀란 눈으로 되묻는다. 사북에 언제부터 살았냐고 물으니 10년째라고 한다. 가슴 속에 남아있던 오랜 기억이 갑자기 누추했다.

영화관이 있었을 법 한 터엔 고층의 모텔 건물이 들어서 있다. 예전 사촌 누나가 살던 터엔 안마시술소와 호텔이 들어서있다. 사북거리도 예외는 아니다. 작은 터만 있으면 고층의 모텔이 건설되고 있었다. 나는 변한 사북의 풍경을 소설에다 이렇게 썼다.

언젠가부터 사북은 아이보다 어른이 더 많아졌다. 또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다. 그래서 사북엔 아이들이 할 눈싸움을 어른들이 하고 소녀들이 까르르, 웃으며 할 눈싸움을 거친 사내들이 한다.



도로는 온통 빙판으로 변해있었다. 차들이 설설 기며 좁은 길을 곡예 하듯 빠져나갔다. 외지에서 온 차들은 아예 젬병이다. 접촉사고를 일으킨 차들은 예외 없이 카지노를 찾은 외지 차량들이다. 이럴 땐 두 다리가 더 쓸모있다. 넘어진다 해도 벌떡 일어나면 그뿐이다.

나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빙판을 미끄러진다. 미끄럼 타는 재미가 여간 아니다. 어릴 적엔 먹빛 얼음이 깔린 냇가에서 미끄럼을 탔다. 넘어지면 물 얼룩이 지기보다 검은 자국이 남는 먹빛 얼음. 그 먹빛 얼음이 사라진 건 몇 해 전이다. 탄광이 문을 닫기 시작하고 지루한 여름 장마가 몇 차례 있은 후였다. (단편소설 <내 이름은 투사> 몇 토막)

폐광으로 인해 버려졌던 사북거리는 유흥의 도시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가족형 고원관광 도시는 그야말로 선전문구에 불과했다. 복잡한 거리를 지나 안경다리로 간다.

옛 기억 속 사북은 존재하지 않아

안경다리는 1980년 4월 사북 사태의 중심에 서 있던 곳이다. 안경다리를 넘으면 동원탄좌가 있었다. 사북의 광산노동자들은 사북역과 안경다리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동원탄좌의 어용노조에 반발하여 촉발된 사북 사태는 80년 신군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대규모 노동항쟁이었다. 사흘간이나 이어진 시위는 계엄군의 투입으로 막을 내렸다.

당시 신군부는 사북 사람들을 폭도라 규정했으며, 사북을 불순세력과 간첩이 암약하고 있는 곳이라 정의 내렸다. 반공 포스터에 북한군이나 김일성을 도깨비로 그리며 커왔던 사람에게 사북은 금기의 땅과 다름없었다.

사북 사태 이후 오랫동안 사북을 찾지 않았다. 그 무렵 광부로 일하던 매형의 죽음으로 사북에 갈 인연도 사라지고 없었다. 사북은 그렇게 폭도와 불순분자의 땅이라는 인식만 남긴 채 잊혀졌다.

안경다리에는 강원랜드 입구를 알리는 거대한 문이 덧씌워져있다. 화려한 조형물 뒤에 가려진 안경다리는 그 시절의 증언을 거부하는 듯 여전히 말이 없다. 화려함 속에 가려진 1980년 사북 사태는 여전히 '사북 사태'일 뿐이었다.

안경다리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 전당포 타운이 보인다. 강원랜드 카지노가 만든 풍경이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줄어든 것이라 한다. 전당포 앞에는 맡긴 차들로 주차장이 비좁을 정도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모든지 맡길 수 있다는 곳이다. 그 때문인지 함께 온 여자를 급히 맡기고 돈을 빌리는 남자도 있단다.

전당포 타운을 지나면 동원탄좌가 있던 건물이 보인다. 폐허처럼 남아있는 건물은 옛 영화를 무색케 한다. 건물과 함께 우뚝 서있는 수직갱 뒤로 탄더미가 산처럼 쌓여있다.

탄더미 옆으로 강원랜드가 수직갱보다 높게 서있다. 광부들의 죽음을 딛고 선 강원랜드에는 국내에서 유일한 내국인 카지노가 있다. 카지노에서 선배를 만났다. 그는 한 평도 안 되는 흡연실에서 급하게 담배를 빨았다.

"천천히 피세요."
"빨리 게임해야 해."
"오늘 많이 땄어요?"
"잃었어."
"직장은요?"
"그만둔 지 오래야."

한때 공무원이었던 그가 서둘러 게임장으로 돌아간다. 야윈 몸과 불안정한 눈빛이 애처롭다. 따라가면서 그동안 얼마나 잃었는지 물어본다. 40억은 잃었단다. 돈이 어디 있었냐고 물으니 상속 받은 땅을 팔았다고 한다. 아직 땅이 더 남아있으니 계속할 작정이란다.

"그 땅이라도 지키지 그래요?"
"그게 잘 안 돼. 깊은 늪에 빠진 기분이야."

선배가 칩을 여기저기에 걸며 말한다. 지금 거는 돈이 얼마냐 물으니 대충 1백만원은 된다고 한다. 한번에 1백만원이라는 말에 소름이 끼친다. 외국영화에나 나오는 도박장에서의 멋진 모습과는 거리가 가 먼 모습이다.

카지노를 나오며 사진을 찍으려는데 직원이 가로막는다. 카지노를 오가는 사람들이 사진 찍히는 걸 원하지 않는단다. 그랬다. 카지노를 찾는 일이 불법이 아님에도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극구 감추었다. 당당하게 게임을 하는 겜블러를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리란 말인가.

불법과 합법의 경계는 정부가 정한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바다이야기는 불법이고 강원랜드의 카지노는 합법이다. 승률 차이가 불법과 합법의 경계라 한다. 겨우살이 걱정이 앞선 가난한 사람들이 보기엔 불법이나 합법이나 그게 그거 같다.



40억을 잃었다는 선배 "늪에 빠진 기분이야"

카지노를 떠나 이번엔 고한으로 내려온다. 고한도 사북과 마찬가지로 어수선하다. 거리를 오가는 건 외지 차량과 공사 차량뿐이다.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은 사북과 고한 어디에도 없다.

다시 사북으로 내려오다 국도를 벗어난다. 샛길로 접어든 길에서 연탄 배달부를 만난다. 배달부는 산중턱의 집에 연탄을 배달하러 가는 길이란다. 배달부의 손이 가리킨 곳엔 조가비같은 집들이 위태롭게 걸려있다.

맞은 편으로 강원랜드 건물이 보인다. 강원랜드가 위용을 자랑해도, 거리에 유흥업소가 우후죽순 들어서도, 그들의 형편은 달라지지 않는단다. 강원랜드 정식 직원은 커녕 허드렛일을 하는 비정규직이라도 취직만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사람들이 살고있는 집들이다.

십여년 전 3.3 투쟁으로 들어선 강원랜드는 광부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품고 가야하지만 그럴 기미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광부들의 자식들은 아직도 어둠의 자식들로 살아간다.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면 번듯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매달 월급을 타는 월급쟁이가 아니던가.

다시 사북으로 돌아온다. 레미콘 차량 몇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한다. 굉음에 머리가 아파온다. 사북을 온전하게 벗어나는 길은 무섭게 달리는 공사 차량을 요령있게 피하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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