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로비 리스트가 공개되기 전에는 수사 불가능해”

‘삼성 비자금 의혹’이 사법당국과시민단체의 갈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참여연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검찰이 삼성 비자금 수사 착수 여부를 둘러싸고 장외 공방전이 벌이고 있다. 검찰에서는 공정성 확보를 위해 ‘떡값 리스트’가 공개되지 않는 이상 수사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반면 고발주체인 시민단체들은 이 같은 검찰의 답변에 억지변명이라며 성토하고 있다.


▲ 민주노동당은 삼성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민 앞에 머리 숙이고 진실을 고백할 것”을 촉구했다. <사진/맹철영 기자>
삼성 비자금 의혹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하나 같이 검찰의 수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참여연대와 민변은 공동으로 지난 11월6일 대검찰청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참여연대 임종대 공동대표와 민변 백승현 회장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을 고발했다.

고발장에 따르면 범죄 혐의는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불법 비자금 조성과 삼성그룹 지배권 승계를 위한 불법 행위, 에버랜드 사건 조작, 불법 로비, 불법 계좌 개설 관련 의혹이다.

'검찰, 삼성장학생 인정한 셈'

그러나 당초 고소장이 제출되면 수사에 착수하기로 입장을 밝혔던 검찰은 막상 고소장이 제출되자 난색을 표하고 있다. 고발장을 받은 대검찰청의 김경수 홍보기획관은 “만약 수사 검사나 수사지휘 라인에 있는 검사가 삼성의 로비 대상 검사라면 수사의 공정성을 크게 의심 받을 수 있다”며 “김용철 변호사가 가지고 있다는 로비 리스트가 공개되기 전에는 어느 검사에게 수사를 맡길지 결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시민단체들은 이 같은 검찰의 태도에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다음은 각 시민단체가 배포한 성명서를 정리한 내용이다.

참여연대는 성명서를 통해 검찰이 수사를 하지 않는 것은 검찰 수뇌부 스스로 검찰조직에 삼성장학생이 넘쳐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 누워서 침을 뱉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검찰 수뇌부가 삼성의 눈치를 보느라 검찰의 권한과 위신마저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 참여연대의 주장이다.

참여연대 측은 “과연 대한민국 공권력의 중추인 검찰총장을 포함한 검찰 수뇌부가 할 말인가”라며 “고발장을 제출해야 수사하겠다고 해서 고발장을 내주면서 수사착수를 위한 멍석을 깔아주고 그나마 밥상을 차려줬더니, 밥상 위 숟가락을 자기 손에 쥐어달라고까지 하는 검찰 수뇌부를 뭐라 지칭할지 합당한 말을 찾기 어려울 지경”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역시 참여연대와 같은 주장이다. 경실련은 성명서를 내고 특별검사를 통해 삼성 비자금 의혹을 성역 없이 수사할 것과 정치권은 정파와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즉각 특검도입을 위한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경실련측은 “고발장이 접수되면 수사하겠다더니 고발장이 접수된 후에는 소위 ‘떡값’ 명단의 공개 없이 즉각적인 수사가 어렵다고 말을 바꾸는 검찰의 태도가 수사주체로 합당한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며 “떡값 로비에 연루된 검사명단이 존재한다는 양심선언이 있은 만큼 피조사당사자인 검찰이 수사주체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으로 촉발된 삼성그룹의 비자금 조성 및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진행한 조직적 로비 의혹은 어떠한 정치적, 경제적 고려 없이 명확하게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경실련의 설명이다.

삼성 “검찰 조사 응하겠다”

경실련에 따르면 김 변호사의 고백대로 현직 검찰 최고위 수뇌부도 삼성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뇌물을 받고, 60여개 계열사를 통해 막대한 불법 로비자금을 관리·운영한 사실이 진실로 밝혀질 경우 국가 공권력마저 기업 로비에 휘둘리고 있다는 엄청난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뿐만 아니다. 차명계좌를 통한 막대한 비자금 조성, 에버랜드 사건, 이건희 회장의 로비 지시 등 실체가 밝혀질 경우 우리 사회의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위법행위에 대한 의혹도 더욱 증폭될 전망이다. 시민단체들은 이에 따라 삼성 비자금 의혹을 철저하게 파헤쳐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편 삼성그룹은 시민단체의 고발이 알려지자 곧바로 신속하게 대응준비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그룹은 시민단체의 고소장이 제출되던 당일 보도자료를 내고 “소모적 분쟁에 역량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깝다”며 “향후 검찰에서 조사를 하면 성의껏 임하겠다”고 밝혔다.



▶ 삼성그룹 법무팀은 어떤곳?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연일 이어지면서 삼성그룹의 법무실에 세인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 변호사는 지난 1997년부터 2004년까지 7년간 삼성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에서 근무했고, 이중 2년여 동안 법무팀장직을 수행했다.

현재 삼성 법무실은 이종왕 실장(변호사)이 진두지휘하고 있다. 김 변호사의 뒤를 이은 법무팀장 김용철 전무의 퇴사 이후인 지난 2004년 8월 대검 수사기획관을 지낸 이종왕 변호사가 영입된 것이다. 삼성은 이 변호사의 영입과 함께 법무팀을 법무실로 승격해 조직을 재정비한 상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종왕 법무실장의 삼성 내 대우는 사장급이다. 그만큼 법무실의 파워가 높다는 반증이다. 현재 법무실에는 이종왕 법무실장과 서우정 부사장을 비롯해 김수목 전무, 엄대현 상무, 여남구 상무, 이기옥 상무가 움직이고 있다.

서 부사장은 특수부 부장 출신이며, 김 전무와 이 상무는 ‘이용호 게이트’와 ‘린다 김 사건’을 담당해 주목을 받았던 검사로 유명하다. 엄 상무는 증권과 경제지식에 해박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고, 여 상무는 판사출신이다.

이처럼 화려한 전관출신을 자랑하는 삼성의 법무실. 이건희 회장 일가의 각종 민·형사 소송을 포함해 그룹 차원의 법적분쟁 전반을 총괄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법률 제정과 개정에 이르기까지 삼성그룹의 사전대처와 사후해결까지 돕는 것으로 재계에 정평이 자자하다.

한편 삼성그룹의 법무실 소속 변호사 수는 지난 3월말 기준으로 총 1백70여명이다. 머지않아 5백여명까지 늘린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계획대로라면 국내 최대 로펌인 김&장을 능가하는 또하나의 로펌이 삼성그룹 내부에 존재하는 셈이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