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웅 시인의 '목숨을 걸고'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사과가 저토록 발갛게 잘 익어가고 있지만, 전국 곳곳에서는 쌀협상 국회비준을 막기 위한 농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지금 농민들은 쌀협상 국회비준을 막기 위해 나락을 가득 실은 농기계를 타고 고속도로를 이용, 서울 여의도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도로 곳곳에서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갈 길을 막고 있는 경찰들에게 말합니다.

이번 투쟁은 성난 농심의 표현 정도가 아니라 쌀은 죽어도 지킨다는 사생 결단의 의지'라고 말입니다. 또한 이번 투쟁은 정부가 쌀을 목숨으로 여기는 전국 농민들의 농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어떤 타협이나 포기도 있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일이든 참으로 이루어내려면 목숨을 걸어야만 합니다. 진짜 술꾼이든 참된 연애든 좋은 선생이든 참된 농꾼이든 목숨을 걸어야 진짜가 될 수 있습니다.


한때 저 또한 술을 맹물 마시듯이 그렇게 많이 마신 적이 있었습니다. 한때 눈에 허깨비가 끼도록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때 시를 쓴다고, 하이네나 헤세나 릴케보다 더 훌륭한 시를 쓰겠다고, 여러 종류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밤을 하얗게 새우며 글을 쓴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목숨을 걸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지금까지 진짜 술꾼도, 참된 연애도, 좋은 시인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뜨겁게 살아왔건만 지금 제게 남은 것은 여기저기 망가진 건강과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과 시가 되지 못하는 산문 나부랭이들 뿐입니다. 그동안 어줍잖은 시집도 몇 권 내었지만 그 시집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대체 목숨을 건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어떤 일을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최선을 다했지만, 이라는 말을 합니다. 최선을 다했다, 라는 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 일테면 지식이라거나 육체적인 노동같은 것을 바닥이 날 때까지 깡그리 소비했다는 그런 뜻일 것입니다.



목숨을 건다는 것과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같은 뜻일까요? 아닙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결국 나는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나 다른 그 어떤 것에 맡겨도 좋다, 라는 그런 뜻일 것입니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그 어떤 참된 것을 가지기 위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 어떤 다른 일도 할 수가 없고, 아무도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라는 뜻일 것입니다.

어떤 일에 목숨을 건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일이 진정 내 목숨을 걸어도 좋을 만한 그런 참된 일이어야 하겠지요. 어떤 일에 대해 섣불리 판단을 잘못하여 내 소중한 목숨을 건다면 얼마나 어리석고도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목숨을 걸기 전에 그 일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부터 먼저 해야겠지요.

이 시에서 시인은 좋은 선생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시인은 진짜 좋은 선생이 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술을 마시는 것처럼,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하는 것처럼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좋은 선생이 되는 일은 교육자로서 진정 목숨을 걸 만한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오송회' 사건을 아십니까? 5공화국 시절, 군사독재정권의 대표적인 용공조작사건이었던 그 '오송회' 사건. 1982년에 일어난 이른바 오송회 사건의 오송회는 군산에 있는 평범한 고교 교사들이 만든 책 읽는 모임 같은 그런 친목단체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졸지에 '빨갱이'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 시를 쓴 시인도 바로 그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었던 교사이자 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지금 이 세상에 없습니다. 1992년에 53살이라는 나이로 이 세상을 훌쩍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가도 시는 남습니다. '목숨을 걸고'라는 시를 읽고 있으면 어느새 해맑게 웃는 이광웅 시인의 얼굴이 다가옵니다.

목숨을 걸고 쌀협상 국회 비준안을 막으려 전국 곳곳에서 싸우고 있는 농민들의 성난 눈빛이 다가옵니다. 농민들의 그 성난 눈빛을 지켜보며 발갛게 잘 익어가고 있는 저 사과들이 자꾸만 눈에 밟힙니다. 주렁주렁 매달린 저 바알간 사과가 풍년농사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구겨져버린 농민의 핏발 선 눈빛처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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