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내 사랑 전라도...그 살가운 정 우짜꼬?

내가 태어난 곳은 경남 창원이다. 나는 내 고향 창원에서 스무 살 중반까지 살았다. 그 뒤 서울에 올라가 10여 년 남짓 살다가 낙향했다. 사업에 실패하여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낙향이었다. 그렇게 또 10여 년 남짓, 나는 내 고향 경상도 땅 언저리를 떠돌며 식의주를 힘겹게 해결하고 있었다.



경상도 머스마인 내가 전라도 땅인 순천에서 살게 된 것은 인터넷종합일간지 <뉴스큐>의 창간과 함께 그 신문사의 편집국장을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때부터 경상도 머스마는 전라도의 산과 들, 바다를 눈에 새겨 넣으며 전라도를 품기 시작했다.

경상도 머스마인 내가 전라도를 제2고향처럼 끌어안기 시작한 까닭은 크게 서너 가지가 맘에 쏘옥 들었기 때문이다.전라도에서는 어느 식당을 들어가더라도 음식 맛이 정말 기가 막힌다. 반찬 가지 수도 많아 푸짐하다. 오죽했으면 전라도 사람들조차도 식당 열 집 중 아무 데나 들어가더라도 8~9곳은 성공한다는 말까지 하겠는가.

전라도 사람들은 처음 본 사람에게도 이웃사촌처럼 살갑게 대하는 넉넉한 정을 가지고 있다. 길을 가다가 행여 길을 잘못 들었을까 지나치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마치 아주 가까이 친했던 사람처럼 두 번 세 번 자세하게 가르쳐 준다.

전라도의 산과 들 또한 경상도의 산, 들과는 좀 색다르다. 경상도의 산은 대부분 삼각형 형태의 민둥산이 많은데 비해, 전라도의 산들은 바위가 오밀조밀 솟아 있어 아기자기한 맛을 준다. 더불어 경상도의 들은 비좁고 울퉁불퉁한 데 비해 전라도의 들은 끝 간 데 없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바라보는 순간 저절로 마음이 넉넉해진다.

전라도의 바다는 백사장이 많은 경상도의 바다와는 달리 갯펄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내가
전라도에 와서 순천, 여수의 드없이 넓게 펼쳐진 갯벌에 놀라 입을 반쯤 벌리고 서 있을 때 같이 동행했던 살가운 벗 한 명이 ‘저건 수평선이 아니라 개평선’이라고 속삭였다. 맞는 말이다. 갯벌이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으니 ‘개평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경상도 머스마인 내가 전라도 땅을 처음 밟은 것은 70년대 끝자락이었다. 새파랗게 젊었던 스무 살 시절, 그때에는 나뿐만 아니라 또래의 아이들은 무작정 낯 선 곳으로 기차여행을 떠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스무살 시절, 내가 마산역에서 순천역까지 가는 기차표를 끊었을 그때는 이른 봄이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날, 나는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경상도의 산과 들을 지나 마침내 전라도의 풍경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순천역에 내렸을 때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긴 생머리가 바람에 출렁거리는 모습이 몹시 아름다운 내 또래 나이쯤 되어 보이는 가시나였다.

“혼자 기차여행 다니는 걸 즐기시나 봐요?”
“???”
“아까부터 기차 안에서 쭉 지켜보고 있었어요. 저도 기차여행 다니는 걸 참 좋아하거든요. 여기 지리 잘 모르시죠? 제가 순천만까지 모셔다 드릴 게요? 제 고향이 여기 순천이걸랑요. 마산에는 이모댁이 있어 다녀오는 길이에요.”

행운이었다. 그날, 나는 정말 우연찮게 순천이 고향이라는 그 가시나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아름다운 갈대 서걱이는 순천만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가시나와 함께 다시 순천 역전으로 와서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까아만 눈동자가 참 예뻤던 그 순천 가시나. 전라도와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일요일마다 서로 마산과 순천을 오가며 만났다. 그때부터 그 가시나는 경상도를 애인으로 품었고, 나는 전라도를 애인으로 품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해 가을, 마산 역전 근처 대추나무가 갈빛으로 익어갈 무렵 그 가시나가 전라도 순천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가버렸다. “한 달에 한번씩 마산과 서울에서 만나, 편지할게”라는 말을 남기고 훌쩍 서울로 떠나버린 그 가시나. 그게 끝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가슴 깊숙이 뿌리내린 그 가시나와의 사랑 때문에 꽤 오래 열병을 앓아야 했다. 그리고 그 가시나가 떠난 뒤부터 나는 한번도 전라도 땅으로 여행을 가지 않았다. 전라도의 산과 들을 바라보면 온통 그 가시나의 얼굴만 어지럽게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올해 중순, 나는 정말 우연찮게도 그 가시나의 고향인 순천에서 4개월 정도 살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싫으나 좋으나 전라도를 새롭게 가슴에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 가시나와의 아픈 사랑도 넉넉하게 쓰다듬어야만 했다.

아, 내 사랑 전라도! 경상도 머스마는 지금도 그 순천 가시나와 그 산과 들, 그 바다와 음식, 그 넉넉한 정을 잊지 못하고 있다. 전라도와 순천 가시나는 그렇게 경상도 머스마의 영원한 그리움이자 잊을 수 없는 옛 고향처럼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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