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籍(적)’의 비밀을 파헤쳐라!

‘하늘 천(天) 땅 지(地)’를 읊던 조선시대, 이웃집 박 도령을 짝사랑하는 연지아씨가 있었다. 하지만 연지아씨는 엄격한 유교 사상 때문에 박 도령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며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지아씨는 우연히 박 도령이 떨어드린 염낭을 줍게 되고 몸종 만득이를 통해 박 도령에게 쪽지를 전달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쪽지를 전해 받은 박 도령은 고개만 갸우뚱거린다. 쪽지에는 ‘籍’(서적 적), 달랑 한 글자만 쓰여 있는 게 아닌가. 훈장을 찾아가 도움을 청해보지만 허탕을 치고 다음날 더욱더 의문의 사건이 발생한다. 연지아씨가 목을 맨 채 발견된 것이다. 현장에는 ‘籍’자가 적힌 쪽지가 발견되고 사또는 살해사건이라고 직감, 박 도령과 만득이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사건을 재구성 했다.

때는 조선 영조시대, 누가 퍼뜨린 소문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천하의 이몽룡도 울고 간다는 도령이 있었으니 그 이름 하여 박 도령. 조선의 여인네라면 그 누구라도 도령을 마음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짝사랑은 비극의 시작

박 도령의 이웃에 살며 남몰래 박 도령을 훔쳐보는 연지아씨도 그 중 하나였다.
“박 도령님은 역시 학식이 높으셔…”
“아씨 그만 하셔유. 철천지 원수 같은 집안의 도령님을 어쩌시려고 이러셔유.”
“삼월아, 내가 내 맘을 어쩌지 못하니 대체 무엇으로 달래면 좋으냐.”

연지아씨는 박 도령에게 심하게 눈이 멀어 있었다. 짝사랑의 화살이 연지아씨의 가슴에 꽂혀 여러 날을 전전긍긍 방안에서 혼자 고민 하는 시간은 길어만 갔다. 그런 연지아씨의 열아홉 순정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자식 속은 모르는 부모님이었다.

“내 좋은 소식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다. 조만간 너의 혼담을 성사시킬 생각이야. 정판서댁 자제가 이번에 장원급제를 하였다는구나.”
“아버님… 소녀 아직은 때가…”
“네가 이 애비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을 내가 안다마는 좋은 기회이니 혼인이 성사 될 때까지 몸 단정히 하고 지내 거라.”

이쯤하면 몰려도 심하게 몰린 상황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박 도령에게 마음 한번 못 전하고 시집을 가버릴 수는 없었다. 연지아씨는 드디어 고백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연지아씨의 사랑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우연히 마주친 박 도령의 염낭이 연지아씨 눈 앞에 툭 하고 떨어지는 게 아닌가… 재빨리 염낭을 주워 집으로 돌아온 연지아씨, 하지만 염낭 하나로 뭘 어째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밤이 깊도록 염낭을 핑계로 박 도령과 접선할 계획을 세운 연지아씨는 몸종 만득이를 조용히 불렀다.

연지아씨는 만득이에게 쪽지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것을 박 도령님에게 전해주거라. 대신 아무도 몰라야 한다.”

연지아씨의 청을 받은 만득이는 박 도령에게 쪽지를 전달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쪽지를 받아 들은 박 도령은 고개만 갸우뚱거린다. 쪽지에는 달랑 서적 적(籍) 한 글자만 적혀 있는 것이었다. 박 도령은 그 뜻을 알 길이 없어 결국 훈장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한다.

“정녕 이것을 연지아씨에게 받았단 말이냐? 내 이 뜻을 그믐날까지 알려줄 터이니 내일 모레 다시 찾아 오거라.”
“알겠습니다. 훈장님 고맙습니다.”

‘籍(적)’자의 비밀을 풀어라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음날 연지아씨가 목을 매단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현장에 출동한 사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눈빛으로 현장을 살피던 중 ‘籍(적)’자가 씌어진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만 보고도 사건의 전말을 눈치 챈 것일까. 사또는 그날 밤 바로 박 도령과 만득이를 관아로 불러들였다.

“스스로 목을 매달 경우 혀가 나오고 눈을 감기 마련인데, 시체를 보아 하니 입을 다물고 눈은 떠있는 상태였다. 이것은 분명 자살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사또가 큰 소리로 말하고 박 도령과 만득이를 차례로 취조했다.
“너는 28일 밤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
“그날 밤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때 연지아씨의 몸종 삼월이가 나서서 그날 밤 만득이와 함께 물레방앗간에 있었음을 증명했다. 그렇
다면 범인은 박 도령이란 말인가. 사또는 박 도령에게 물었다.

“연지아씨가 손에 쥐고 있던 이 염낭은 네 것이 아니더냐?”
“아니… 그게 어떻게…” 이때 또 삼월이가 나서 “사실 그것은 연지아씨가 주워온 것이구먼유. 그것 때문에 만득이가 쪽지를 건네 준 것인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쪽지를 받은 사람이 박 도령 네놈이라는 것인데. 연지아씨가 숨진 현장에서 이 쪽지가 발견됐다. 이것은 어찌 설명하겠느냐?”
“제가 쪽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오나.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내용인지 알 수가 없어 훈장님을 찾아갔습니다.”

박 도령의 말을 들은 사또는 그 길로 훈장을 찾아가 호통을 쳤다.
“네 죄를 아뢰지 못할까!”

사또는 ‘籍(적)’자가 적힌 쪽지를 보여주며 훈장에게 말한다.
“이것은 사대부를 가르친다는 네 놈은 능히 알 수 있는 암호다. 이질직고 하거라.”

사대부는 아니었지만 평소 머리가 좋았던 연지아씨가 암호를 이용해 박 도령에게 쪽지를 보낸 것이었다. 그러니까 서적 적(籍)자는 대나무 죽(竹,) 둘 이(二), 열 십(十), 여덟 팔(八), 저녁 석(昔)자를 합해놓은 암호로 ‘28일날 대나무 숲에서 만나요’라는 뜻이었다.

훈장은 “사또 제가 대나무 숲에 간 적은 있지만 진정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라며 발뺌했다. 훈장의 말을 들은 사또는 “미쳐 네가 이것은 생각했지 못했겠지?”라며 무엇인가를 꺼내 보인다. 그것은 바로 연지아씨가 목을 맨 끈이었다.

“이 끈은 바로 찢겨진 너의 두루마기가 아니냐?”

연지아씨를 살해한 범인은 바로 훈장이었던 것이다. 박 도령으로부터 쪽지를 건네받은 훈장은 쪽지의 암호를 해독했고, 28일밤 대나무 숲으로 가서 연지아씨를 겁탈하려다 그만 살해하고 만다. 당황한 훈장은 벌이 두려워 자신의 옷고름을 찢어 자살로 위장해 놓은 것이었다.

박 도령이 암호의 뜻을 알았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살인사건, 이래서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학문에 힘써야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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