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흘린 피의 대가를 보상하라”


영화 ‘화려한 휴가’로 1980년 5월 광주에 대해 또 다시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시내 한복판에서 전두환이 저질렀던 그 끔찍하고 처절했던 민족학살극은 27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살아있는 현장’으로서 우리들을 전율케 하고 있다. <시사신문>은 윤재걸, 당시 동아일보 기자의 무삭제 원본 ‘도큐멘터리-光州, 그 비극의 10일간(3백50매)’을 통해 1980년 5월 ‘작전명령-화려한 휴가’로 야기된 광주민주항쟁의 발단과 그 비극적 최후를 지상에다 온전히 펼쳐보려 한다. 그날 숨져간 민주영령들께 다시 한 번 명복을 빌면서, 독자 제현의 일독을 바라마지 않는다.

5월23일을 기해 계엄군과 시민군의 전선이 형성된 시 외곽지역에서는 광주시내를 빠져나가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그런가 하면 광주에서 학교에 다니는 자식들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시골에선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광주시 빠져나가는 피난민 줄이어

그들은 계엄군과 시민군의 대치지역을 피해 주로 들판 가운데로 난 작은 오솔길이나 소로를 통하여 광주시내로 진입해 들어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무고한 희생자는 발생하고 있었다. 젊은이가 끼어 있는 행렬은 시위대의 의심을 받아 총격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날까지도 광주시내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계엄군을 시민 스스로의 힘으로 몰아냈다”는 승리감, 해방감으로 고조돼 있었다. 사태과정에서 수없이 흘러나온 차량들은 통제를 받아 점차 질서가 잡혀가는 반면 시민들 사이에선 ‘무기회수’ 문제가 쟁점으로 등장하면서 여러 의견들이 백가쟁명 식으로 분출하기 시작했다.

오전 11시경 도청 앞 광장은 시내 각 방면에서 모여든 시민들로 거의 메워지다시피 했는데, 여러 자료에 따르면 “10만여 명의 시민이 모인 것”으로 돼 있다. 도청주변 담벼락엔 ‘민주시민 만세’, ‘살인마 전두환 찢어 죽여라’, ‘노동3권 보장하라’, ‘어용노조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죽을 때까지 싸운다’, ‘승리의 그날까지’ 등등 빨간색과 검은색 페인트로 씌어진 각종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또한 도청 오른편쪽의 남도예술회관 벽면과 충장로 방향의 YMCA부근 담 벽에는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 명단과 함께 참혹하게 죽은 시체나 부상자들 그리고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는 응급처치 환자들의 모습을 급히 담은 흑백사진들이 무수히 걸려 있었고, 그 주변에는 많은 시민들이 운집, 엊그제의 분노와 울분을 되새기고 있었다.

이날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는 원래 오후 3시로 예정돼 있었으나 엄청난 인파가 몰린 데다 수습위원들의 불화로 인해 열리지 못하고 있던 중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한 운동권이 시민궐기대회의 진행을 주도, 11시30분경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날 모임은 먼저 한 학생의 제안에 따라 ‘광주민중?민주항쟁기간 중 목숨을 잃은 민주영령에 대한 묵념’과 애국가 제창으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시민들 중 노동자 농민 교사 주부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차례대로 분수대 위로 올라와 자신의 신분을 밝힌 다음 의견을 토로하고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면서 “싸워서 쟁취한 해방을 끝까지 수호하자”고 한결같이 주장했다.

이날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에선 시민과 학생의 피해상황이 임시 파악된 대로 보고 되었는데 “전대의대병원, 조대의대병원, 기독교병원, 적십자병원 등 종합병원을 전부 합하여 가족에 의해 신원이 확인된 시신 30여구를 포함, 미확인 사망자 6백여 명과 중경상자 3천여 명, 그 외에 공수부대에 의해 옮겨진 시체와 실종자는 파악할 수조차 없다”고 했다.

시민들은 대회를 치르는 동안 연신 울기도 하고 연사에게 박수를 치기도 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시민들은 또 누군가의 제안에 의해 장례준비를 위한 즉석모금운동을 벌였는데, 모금된 액수는 1백여 만원으로 곧 수습대책위에 전달되었다.

도청앞 광장 맞은편에 위치한 상무관(유도체육관)에도 많은 시체들이 질서정연하게 흰 무명천에 덮여 진열돼 있었고, 관이 부족하여 아직 입관 처리되지 못한 시체들도 수십 구가 넘었다. 이들 시신을 덮은 흰 무명천들은 빨갛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곳 입구에는 분향대가 설치돼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체들은 부패되지 않도록 방부제가 뿌려졌으며, 많은 시민들은 계속 줄을 이어 분향하면서 간간이 오열을 터뜨리기도 했다.

행방불명자 신고 접수 개시

▲ 도청앞 광장 맞은편에 위치한 상무관(유도체육관)에도 많은 시체들이 질서정연하게 흰 무명천에 덮여 진열돼 있었고, 관이 부족하여 아직 입관 처리되지 못한 시체들도 수십 구가 넘었다.
이날 아침부터 도청 내에서는 각 가정에 돌아오지 않은 행방불명자 신고를 접수하면서 동시에 각 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와 사망자 명단을 입수 확인하고 있었다. 이 같은 확인행렬은 끝이 없었는데, 주로 나이 먹은 아주머니들이거나 노인네들이 많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눈물을 짓고 있거나 수심에 싸인 표정들이었다. 도청 정문에는 ‘수습대책위원회’라는 글씨가 쓰인 띠를 어깨로부터 가슴으로 비스듬히 두른 청년들이 출입을 통제했다. 도청 내에 안치돼 있는 사망자를 확인하러 오는 시민들의 신원을 확인한 다음 이들을 직접 안내해 사망자를 확인시켰다.

대부분의 사망자들은 그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총을 맞았거나 대검과 몽둥이로 난자·난타 당한 상태가 역력히 남아 있었다. 어떤 경우는 팔이 떨어져 따로 관속에 놓여 있거나 목이 다 잘리어져 몸통과 목이 거의 분리된 시신도 있었으며, 얼굴은 상당수가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푸르스름하게 퉁퉁 부어올라 있어 그 비참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이날 오전 일반수습대책위는 당초 15명에서 5명이 사퇴, 10명만이 남았는데, 여기에 학생수습위를 통합, 총 30명의 확대수습위원회(일반수습위 10명, 전남대생 10명, 조선대생 10명)를 구성했다. 위원장에는 윤공희 대주교가 추대되었으며, 일반수습위원으로는 조비오 신부, 신승균 목사, 박영봉 목사, 박윤봉 적십자사 전남지사장, 독립투사 최한영 옹, 변호사 이종기, 태평극장 사장 장휴동, 교사 신영순씨 등이 위촉되었다.

오후 1시 회수된 총기 2백정을 장휴동 김창길 양씨가 계엄사를 찾아 반납한 후 연행됐던 34명의 신병을 인수해 오자, 수습위는 ‘무조건 무기반납’ 측과 ‘조건부 무기반납’ 측으로 갈라져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무조건 반납을 주장하는 김창길(전남대생) 등은 “계엄사가 실제로 구속된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우리가 무기만 모두 회수하여 반납한다면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것이고, 만약 이 상태에서 더 이상 계엄군과 대결했다가는 엄청난 피를 흘릴 것이다. 서둘러 무기를 반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김종배(조선대생) 등은 “지금 이 시점에서 무조건 무기를 반납한다는 것은 광주시민의 피를 팔아먹는 행위이다. 시위대가 반납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시민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리 광주시민을 폭도라고 주장하는 정부의 태도에 변화가 있어야 되며 구속되어 있는 학생과 시민이 석방되어야 하고,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가 정당하게 보상되고 사망자의 장례식이 시민장으로 치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언성을 높였다.

무기 회수율 50%에 육박

5월23일 밤 도청 안의 수습대책위원 중 대부분의 일반수습위원들은 귀가하고 학생수습대책위원들만 남아 계속 ‘무기회수’를 둘러싸고 의견대립을 보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도청 내에 장치돼 있던 거대한 양의 TNT는 화순탄광에 근무한다는 모씨에 의해 뇌관이 전부 제거돼 버렸다.

도청수습위원중 신부 목사와 학생수습위원들은 무기회수에 주력, 23일 새벽 7군데의 시 외곽지역을 돌면서 총기 반납을 권유, 모두 2천5백정이 회수됨으로써 애초의 시민군 무장상태(총 5천4백여 정)에 비해 50% 가까이가 무장해제 된 셈이었다.

한편 계엄사령부는 공식적으로 광주지역 일원에 투입된 계엄군의 행동조치 결과를 발표, “시민들이 점차 시위군중에 합세하여 난폭화 되기 시작, 계엄군 병력을 증원, 주요 시설의 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난폭시위자는 연행 조사했다. 군중시위가 과열되자 계엄군은 외곽지대로 철수, 교도소 등 주요시설을 경비하면서 난동자들이 총격을 가하더라도 발포를 억제하고 전단 등을 활용한 선도활동을 전개해왔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구상용 광주시장은 ‘80만 광주시민에게 호소합니다’ 라는 호소문을 통해 “불행한 마찰로 인명이 더 이상 희생되어선 안되겠다. 전 시민이 머리를 맞대고 수습책을 강구하자”고 호소했다.

일곱째날, 5월 24일

사태발생 7일째인 5월24일 아침8시, 계엄사는 임시 재개된 KBS라디오 방송을 통해 “24일 정오까지 광주시는 광주국군통합병원에, 기타 지역은 각 경찰서에 무기를 반납하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요지의 방송을 했다.

어제의 승리감과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광주시민들은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승리와 해방감에 도취돼 있었던 열광적인 흥분상태에서 조금씩 벗어나 시민들 사이엔 투쟁열기가 서서히 식어 가는 징후가 역력했다.

도청 앞 광장 주변의 담 벽엔 여러 종류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와 사진 대자보 등이 어지럽게 나붙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수습대책위의 ‘투항주의적 자세’를 맹렬히 비난하는 문구도 나붙기 시작했다. 광주시민 궐기대회의 기사와 사진이 실린 일본의 마이니찌 신문이 붙어 있기도 했다.

이날 오전 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사 측과의 협상 답변 내용 8개항을 인쇄하여 시내 일원에 배포하였다. 그 내용은 계엄군이 시내에 한 명도 없다는 점과 과잉진압을 인정하며, 연행자 9백27명중 79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하였으며, 보상계획 수립과 치료대책 완비, 사실보도에 대한 노력, 폭도나 불순분자라는 용어의 사용 중지, 비무장 민간인의 시외통행, 사태수습 후 보복금지 약속 등이었다.

그러나 이를 본 많은 시민들은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였다. 이러한 불만은 오후에 제2차 시민궐기대회에서 구체적으로 폭발하였다. 어제에 이어 24일 오후 2시30분께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참여인파는 어제와 비슷하게 10만을 넘어섰다.

상무관 주위에는 그윽한 분향 냄새와 함께 시신이 부패하는 냄새로 가득 했으나 시민들은 떠날 줄을 몰랐다. 대회 개최에 앞서 흥분한 시민들은 수습대책위의 무성의한 자세와 투항주의적 자세를 맹렬히 비난했다.

이들은 마이크 시설이 부착돼 있는 전경의 개스 차량 속으로 들어가 “지금 도청 안에서는 수습대책위원회가 대다수 시민들의 뜻과는 반대로 계엄당국과 야합하여 무조건적인 타협을 시도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음모를 막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피 흘린 대가를 보상받도록 강력히 촉구합시다”라고 외쳤다.

수습대책위에 대한 일부 시민들의 불신과 분노는 아예 이 단체를 해체시켜버려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시민들은 수습대책위를 향하여 계엄사와의 협상내용을 소상히 밝힐 것을 요구하였고, 수습대책위는 2~3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지못해 8개항의 협상 내용을 이종기 변호사가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시민들은 “시민들의 근본적인 요구와는 다르다”면서 노골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대회 도중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분위기가 한순간 어수선해졌으나 사회자가 “ 이 비는 원통하게 숨을 거둔 민주영령들이 눈을 못 감고 흘리시는 눈물입니다”라고 말하자 잠시 혼란스러웠던 군중들은 곧 우산을 접고 다시 숙연한 분위기로 되돌아가 안정을 찾았다. 허수아비 화형식과 ‘전국 민주시민에게 드리는 글’이 낭독된 데 이어 한 여고생에 의해 ‘민주시’가 낭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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