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속’터지는 숨겨졌던 끔찍한 사건


영화 ‘화려한 휴가’로 1980년 5월 광주에 대해 또 다시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시내 한복판에서 전두환이 저질렀던 그 끔찍하고 처절했던 민족학살극은 27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살아있는 현장’으로서 우리들을 전율케 하고 있다. <시사신문>은 윤재걸, 당시 동아일보 기자의 무삭제 원본 ‘도큐멘터리-光州, 그 비극의 10일간(3백50매)’을 통해 1980년 5월 ‘작전명령-화려한 휴가’로 야기된 광주민주항쟁의 발단과 그 비극적 최후를 지상에다 온전히 펼쳐보려 한다. 그날 숨져간 민주영령들께 다시 한번 명복을 빌면서, 독자 제현의 일독을 바라마지 않는다.

‘시민항쟁’ 5일째로 접어든 5월22일의 광주시는 두 얼굴로 떠올랐다. 계엄군이 시위군중들의 공격에 못이겨 시외곽으로 퇴각한 데 대한 일종의 ‘승리감’과 한편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낸 데 대한 분노와 허탈감으로 뒤범벅이 돼 있었다. 시내 곳곳에선 총구를 창밖으로 내놓은 채 복면을 한 시위대들의 차량이 시가지를 누비곤 했다.

다섯째 날, 5월22일

▲ 시민피해는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었다. 22일 새벽 시외로 빠져나가려는 효천 철길 부근에선 특히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계엄철폐’, ‘전두환을 찢어 죽이라’ 등의 플레카드를 달고구호를 외치는 이들을 보면서 시민들은 마치 전투에서 막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용사처럼 생각돼 시민군들이라면 너나없이 환호를 보냈다. 도로변 인근주민들과 아낙네들은 각종 드링크류와 청량음료, 푸짐한 음식을 날아와 이들 젊은이들이 배불리 먹도록 했다. 그들은 시민군들이 자신이 가져온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마냥 흐뭇해했다. 가게 주인들은 담배를 몇 박스씩 가져다 시위대 차량 속의 시민군들에게 몸소 나눠주기도 했다.

22일 날이 밝으면서 광주공원에는 많은 시민들과 지난 밤 외곽지역 전투에 참여했던 무장시민군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김원갑(19?재수생)을 중심으로 5~6명의 청년들이 이곳으로 모여드는 차량들에게 모두 번호를 매겨주면서 일종의 ‘차량등록’을 필해주고 있었다.

하얀 페인트로 차량 앞뒷면에 일련번호를 큼지막하게 쓴 차들 중 소형차량은 주로 의료, 연락 등의 임무를, 대형 차량은 병력 및 시민들의 수송과 보급, 청소업무를 맡겼다. 그리고 군용 지프는 지휘 통제 순찰 상황통제와 전달 등 헌병업무를, 군용트럭은 전투업무를 맡겼다. 이들은 몇몇 소형차량을 동원, “등록을 필하지 않은 차량은 즉시 공원으로 모여 등록과 동시에 임무를 부여 받으라”고 홍보하였다.
이날까지 무장한 시위대는 대략 5백 명 정도에 달했는데 이들은 나름의 조직과 편성에 따라 각 지역에 배치, 경계근무에 들어갔다.

이날 오전 금남로와 도청주변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분수대를 중심으로 모여 앉아 도청 내의 지도부 결성 여부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날 새벽 일찍 도청을 점령한 일단의 무장시위대들은 도청을 본부로 확정하고 1층 서무과를 작전상황실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이곳에는 일반시민들이 너나없이 들어가 체계적인 질서와 통제가 결여돼 한동안 혼란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질서와 체계를 갖춰갔다.

‘사태수습위’ 구성

이와 함께 이날 아침 일찍부터 도청상황실 옆 사무실에는 정시채 부지사를 중심으로 한 광주의 몇몇 지명인사들이 모여 계엄사에 요구할 협상조건에 관해 토의했다. 몇 시간의 마라톤회의 끝에 이날 낮 12시30분 경 목사 신부 학생 변호사 관료 교사 등 광주시내의 지도급 인사 15인으로 ‘5·18사태수습대책위원회’(위원장 독립투사 최한영 옹)를 결성하고 다음과 같은 7개항의 요구를 결의했다.

▲ 사태수습 전에 군 투입을 말라
▲ 연행자를 석방하라
▲ 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라
▲ 사태수습 후의 보복금지
▲ 책임 면제
▲ 사망자에 대한 보상
▲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을 해제하겠다.

그러나 이들 수습대책위의 결의사항에 대해 “시위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임시방편적인 ‘수습’에만 급급했다”는 비판이 젊은 시위대들부터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오후 1시30분경 이들 수습위원 중 8명이 상무대로 전남북계엄분소를 찾아 군 측과 협상을 개시했다.

도청 앞에서는 주최 측은 없는 채 자발적으로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가 나와 발표를 하고 또 이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궐기대회의 연장으로 이날 오후 5시경엔 수습위원들이 계엄군 측과 논의한 협상보고대회가 정시채 부지사의 사회로 이어졌다.

협상자 8명은 연단에 나와 차례로 협상결과를 보고했는데 이들의 발언 중 ‘유혈방지’와 ‘질서유지’ 부분에 대해선 너나없이 적극 찬동했다. 김종배씨(27·조선대 3년)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대회에서 ‘무기회수’에 합의함으로써 도청과 공원에서 약 2백여 정의 총기가 회수되었다.

수습위원들의 협상보고대회가 끝난 직후 김창길씨(23·전남대 농경과 3년)등이 “이번 사태는 대학생이 책임을 져야 할 성질의 것이므로 우리들이 사태수습에 나서자”고 제안하자, 이에 대해 약 50명 정도가 동조, 전남대 조선대 등 종합대에서 각 5명, 그리고 나머지 전문대에서 5명을 뽑아 ‘15인 학생수습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전남대의 송기숙, 명노근 교수와 함께 오후 6시경 1층 서무과에 들어가 위원장에 김창길, 총무에 정해민(23·전남대 경제과 4년), 대변인에 양원식(조선대 재학중), 허규정(조선대), 부위원장 겸 장례담당에 김종배(조선대), 기타 총기회수반, 차량통제반, 수리보수반, 질서회복반, 의료반 등의 부서를 각각 두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광주시위사태 수습대책위는 15인의 일반수습위와 15인 학생수습위로 2원화 됐다.

그러나 이들 수습위에 대해 광주시민들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였다. 특히 젊은 청년세력을 중심으로 한 시민군과 운동권에선 이들을 불신하는 생각마저 갖고 있었다. 그 결과,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이 고장의 운동권을 형성하고 있던 많은 젊은이들은 “윤상원을 중심으로 한 민중항쟁지도부 결성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지도부 싹터

이런 과정 속에서도 시민피해는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었다. 22일 새벽 시외로 빠져나가려는 효천 철길 부근에선 특히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또 이날 오후 3시쯤엔 의료반에 배치된 차량이 적십자마크와 헌혈차라는 플래카드를 부착한 채 화순으로 가던 도중 지원동 너릿재 고개에서 잠복 중이던 계엄군으로부터 집중사격을 받아 차안에 타고 있던 대학생, 남녀 고등학생 청년 등 20여 명이 한명의 생존자를 제외하고 몰살당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유일한 생존자는 춘태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 홍 모양이었다.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했다” 고 한 시민은 기왕의 상황을 전하면서 “이번 사건도 사실 한명의 생존자가 있기에 망정이지 다 죽어버렸으면 아무도 몰랐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보다 앞서 이날 오전 중엔 “전남대 박물관 뒷 편 숲 속에선 대학생과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시체 2구가 마대 푸대에 싸여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를 계기로 노천과 우물 속 하수구 복개상가 화장실 등에서도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증언이 뒤를 이었다. 한마디로 많은 시민들은 “19, 20일 양일간에 희생된 상당수의 시신들이 이같은 방법으로 암장됐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정확한 보도와 정보교환이 차단된 상황에서 시민들은 사태실상과 추이에 대해 무척 궁금해했다. 이러한 일차적인 정보욕구 충족과 더불어 시민들을 선무할 매체에 골몰하던 운동권에선 5월18일 사태발생 이후 중단된 ‘투사회보’를 다시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유인물은 ‘투사회보’ 말고도 단발적으로 대략 3군데에서 발간된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유인물 제작 작업은 학생들과 일부 지식인, 노동자들에 의해서 이뤄졌는데, 최초의 유인물은 전남대학교의 ‘대학의 소리’ 팀이 제작·배포했으며, 또 다른 것은 광천동 노동야학인 ‘들불’ 팀을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며칠 후인 22일~23일엔 극단 ‘광대’ 팀을 중심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대학의 소리’ 팀과 ‘들불야학’ 팀은 5월20일 광천동의 들불야학에서 합류, 윤상원의 지도를 받아 ‘투사회보’ 라는 제목의 합동유인물을 발간키로 했다. 노동자(야학생)와 대학생(강학담당)들로 구성된 투사회보 팀 10명은 차량임무 규정, 투쟁대상을 정한 구호, 보급문제, 시체운반 등에 관한 사항을 집중적으로 담기로 했다.

5월21일 첫 호가 나온 ‘투사회보’는 5월25일 8호까지 발간하다 그 다음 호수는 이어서 9호로 하면서 제목만 ‘민주시민회보’로 변경, 발간하였으나 마지막 호인 10호는 미처 배포되기 전 계엄군에 의해 압수되었다고 한다. 당시 제작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문안작성조-윤상원(27·전남대 정외과 졸 양동신협직원 광천동 들불야학 창립·본명 윤개원)등 ▲필경조- 박용준(20·YMCA 신협이사) ▲ 등사조-김성섭(들불 야학생) 등 ▲종이보급조-김경국(20·전남대 중문과2년 강학) ▲배포조-나명관(18·공원 야학생) 윤순호(22·공원 야학생)등.

5월18일 시민들의 시위사태가 발생한 이래 6일째로 접어든 5월23일 광주시의 표정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가는 듯했으나, 시 외곽 지역에서 들려오는 간헐적인 총성에 여전히 긴장감을 씻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새벽 6시부터 남녀고교생 7백여 명(여학생 50명)은 시내 전역의 청소작업에 앞장섰다. 이에 대해 수많은 시민들이 호응, 청소를 함께 했으며 대다수의 상가들도 문을 열기 시작했다.

여섯째 날, 5월23일

그러나 아직 ‘전쟁상태’는 끝나지 않고 있었다. 22일 밤, 공수부대원 2명이 외곽 경계근무 중이던 일단의 시민군들에게 생포되었는가 하면, 23일 아침 7시경에는 나이어린 학생 3명과 할머니가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놓고 시민 측에선 공수부대원의 소행으로 보는데 반해 계엄사 측에선 시민군의 소행이라고 맞섰다. 그간 숨겨졌던 끔찍한 사건들이 터져 나와 시민들을 다시 한번 경악케 하는 경우도 적잖았다. 23일 오전 11시 광주세무서 지하실에 시체1구가 있다는 제보에 접한 시민군 측에선 현지에 나가 직접 시신을 확인했는데, 이 시신은 “유방과 음부가 도려내져 있었고 얼굴이 대검으로 난자당한 여고생 이었다”고 했다.

교복에서 나온 학생증으로 이 시신의 신원은 광주시내 모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인 이모양으로 확인되었다. 주소를 찾아 시신을 인도하자 부모들은 그만 실신하고 말았다고 한다.

오후 2시경엔 백운동 지역을 경계하던 시민군들은 50엠티 무장헬기가 시내 동태를 정찰하는 것을 발견하고 대공사격을 개시, 헬기를 추락시켰다. 이로 인해 헬기에 타고 있던 중령 1명과 사병 1명 조종사 1명 등 3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날 저녁 무렵엔 시위대 4명이 군용차를 몰고 화순 너릿재 고개를 넘어가던 중 헬기로부터 기총소사를 받아 차에 타고 있던 4명 전원이 몰살당하기도 했다.

오후 8시쯤에는 광주시 외곽에 위치한 교도소부근을 지나던 시민군들이 공수부대원들의 공격을 받고 총격전을 벌였다. 계엄군은 교도소 수비를 위해 교도소 옥상에다 케이 50 대공기관단총을 설치해 놓고 시위대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날 총격전에서 시위대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후에도 시민군 교도소를 경계중인 계엄군 사이엔 몇 차례에 걸쳐 충돌이 일어났으며, 그때마다 많은 수의 희생자가 뒤따랐다. 시위대들은 21일 다량의 차량을 노획, 담양 곡성 순천 여수 방면으로 진출키 위해 교도소 부근의 고속도로를 통과하려다 교도소 경계경비가 철통같이 엄해 많은 사상자를 냈던 것이다.

시민군은 교도소 옥상으로부터 날아오는 기관총의 포화를 피하기 위해 폭발물을 장치한 3~4대의 차량으로 진격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계엄군에 의해 모두 저지되었다. 이에 대해 계엄사는 “남파간첩 및 좌익수만 해도 1백70명이나 수감된 광주교도소를 습격해 이들을 탈옥 시켜 시위에 가담시키기 위한 시위대들의 교도소 습격”이라고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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