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살기 위해선 무장을 해야 한다.”

영화 ‘화려한 휴가’로 1980년 5월 광주에 대해 또 다시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시내 한복판에서 전두환이 저질렀던 그 끔찍하고 처절했던 민족학살극은 27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살아있는 현장’으로서 우리들을 전율케 하고 있다. <시사신문>은 윤재걸, 당시 동아일보 기자의 무삭제 원본 ‘도큐멘터리-光州, 그 비극의 10일간(3백50매)’을 통해 1980년 5월 ‘작전명령-화려한 휴가’로 야기된 광주민주항쟁의 발단과 그 비극적 최후를 지상에다 온전히 펼쳐보려 한다. 그날 숨져간 민주영령들께 다시 한 번 명복을 빌면서, 독자 제현의 일독을 바라마지 않는다.

오전 11시 40분 경에는 광주시 일원에 ‘전남민주학생총연맹’의 이름으로 전단이 배포했다. ‘4·19의거로 연결하자’는 제목의 이 전단은 “오늘 2시 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갖자!”면서 “각 대학은 대학별로 집결지를 정해 행동할 것”과 “시민들은 각 동별로 도청 앞에 집결하자!”고 호소했다. 이들이 제시한 각 대학의 집결지를 보면 전남대학교-공용터미널, 조선대학교-계림동파출소 앞, 서강실업 및 간호대-문화방송 앞, 고교생-산수동오거리 등이었다.

▲ 일부 공수대원들은 시위군중을 막기 위해 시위의 선두에 선 시민들에 대해 조준사격을 시작했다. 사망자는 대폭 늘어났고, 시민들은 남녀노소 직업을 뛰어넘어 ‘분노의 일체감’을 이루었다.

무위로 끝난 협상시도

20일 심야에 벌어진 계엄군의 발포개시에 따라 ‘광주사태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시내 곳곳에서 총에 맞은 시체가 나뒹굴자 시위군중 특히 젊은 청년들은 “우리도 살기 위해선 무장을 해야 한다”고 울부짖었다.

계엄군의 총격은 사태를 걷잡을 수 없는 와중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아세아자동차 공장과 관공서 차고에서 끌어낸 차량들은 속속 광주시 인접 외곽지역을 향해 빠져나갔다. 젊은 시위대들을 태운 시위차량들은 화순 동면, 보성 벌교 방면과 남평 나주 무안 목포 영암 강진 해남 완도 방면, 그리고 담양 곡성 구례 장성 영광 등지로 빠져나갔다.

한편 도청 앞 시위군중은 시시각각으로 불어나 이날 오전 11시 무렵엔 30만에 육박했다. 바로 이때 시위군중 맨 앞에 도열해 있던 503 벤츠 고속버스가 군경의 저지선으로 돌격하자 계엄군쪽에서 LMG기관총을 난사, 차에 타고 있던 젊은 시위대원 20여명이 살상 당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시위군중들은 이들 사망자의 시체를 대형 태극기로 덮어 2구씩 군용지프와 리어카 등에 싣고 시내를 돌며 시민들의 동참을 촉구했다.

차량을 이용한 군 저지선 돌파작전은 여러 차례 시도됐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 희생자만 늘어날 따름이었다. 계엄군중 일부 공수대원들은 한발 한발 저지선을 압박해 들어오는 시위군중을 막기 위해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에 잠입, 시위의 선두에 선 시민들에 대해 조준사격을 시작했다. 사망자는 대폭 늘어났고, 시민들은 남녀노소 직업을 뛰어넘어 ‘분노의 일체감’을 이루었다.

“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으로 시위군중들은 ‘총’의 소재지를 찾아 나섰다. 그들이 목표로 하는 곳은 대부분이 예비군 무기고였다. “총에는 총으로!”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 우리도 총을 갖자!”면서 시외로 빠져나간 흥분한 젊은 청년시위대들은 텅 비다시피 한 (대부분이 광주시로 차출되었다) 경찰서와 지서를 파괴하고 무기와 탄약을 모으기 시작했다.

우선 오후 2시경 동양고속버스를 선두로 수십대의 차량이 화순에 진입, 곧장 화순탄광으로 직행하여 광부들의 알선으로 시위대들은 무기고에서 다량의 총기와 탄약을 탈취하였다. 처음엔 광부들이 TNT를 내주려 하지 않았으나 광주시의 피비린내 나는 참상을 듣고선 곧장 다량의 TNT를 인도해줬다고 한다.

무장하기 시작한 시위대들

같은 무렵, 20여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나주방면으로 내달린 5백여 명의 시위대는 나주경찰서를 급습, 카빈 94정, 권총 25정, 공기총 1백51정을 빼앗는 한편, 또 다른 차량에 분승한 1백여 명의 시위대는 나주 금성파출소를 습격, 파출소 내 예비군무기고를 부수고 엠원 2백정, 카빈 5백여 정, 총탄 5만발 등을 탈취했다. 또 오후 2시40분경에는 50여명의 시위대가 광주 지원동 석산화약고에 진입, 다량의 TNT와 뇌관을 날라 왔다.

한편 시민들이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할 무렵, 광주 시가지 위를 떠돌던 군용헬기가 도청 부근을 선회하더니 갑자기 고도를 낮추고는 MBC가 소재한 제봉로 부근에다 기총소사를 하기 시작하자, 금남로 부근의 골목에서 웅성거리던 시위군중들은 혼비백산, 길바닥에 엎드리거나, 건물 가장자리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헬기로부터 날아온 탄환에 죽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뒹굴었다.

오후 2시30분쯤 2백여 명의 시민들이 중앙로 지하상가 공사장 부근에 모여 앉아 농성중이었는데, 앞쪽과 도청쪽에선 총격세례가 계속되고 있었다. 바로 이들에게 시외에서 돌아온 젊은 시위대들은 카빈소총 30여정과 실탄 한 클립씩을 분배하기 시작했다.

시 외곽지역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빼앗아온 다량의 총기류와 탄약이 광주에 반입된 오후 3시30분 이후 수백명의 무장 청년시위대는 도청 앞 군경저지선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공수대원과 청년시위대와의 총격전이 개시된 것이다.

광주사태는 어느 새 ‘시가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온 시내는 그야말로 귀가 아플 정도의 총성에 휩싸였다. 계엄군의 공수부대원들은 도청건물과 관광호텔, 전일빌딩을 중심으로 각종 돌출물을 은폐물 삼아 조준사격을 가했으며, 청년시위대들은 눈에 익은 골목길에 숨어서 조심스레 접근하며, 도청을 향해 응사했다.

이같은 시가전은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하는 오후 5시반까지 계속되었다. 수많은 부상자와 사망자가 거리마다에 쓰러져 있었다. 이들은 급속하게 병원으로 이송 조치되었다.

계엄군이 도청에서 물러난 직후 광주 시가지는 순간 극도의 혼란에 직면했다. 수많은 시민과 차량행렬, 최루가스 내음과 피내음이 뒤범벅되어 모두가 우왕좌왕 헤매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과 무질서를 정리하기 위해 젊은 청년들은 몇대의 군용지프에다 마이크를 가설, 시민홍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광주시내에 너무 많이 들어온 차량들을 우선 정리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차량은 광주공원과 유동삼거리로 모이자”고 가두방송을 했다. 무질서하게 시가지를 배회하던 각종 차량들은 이 방송이 개시된 지 얼마 뒤 광주공원 앞과 유동삼거리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공원 앞에는 수백대의 차량과 수천명의 시민이 모여 한 40대 남자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여러분 지금 이런 식으로 무질서하게 돌아다니기만 하면 우리는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저의 통제에 따라 각자 부대를 편성해서 행동합시다” 하고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우선 사람들을 탑승한 차량으로부터 내리게 한 뒤 10여명씩 줄을 세웠으며, 무기소지자는 따로 조를 편성, 대열을 만들었다.

편성된 대열은 대부분 10대 후반과 2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직업은 그곳에서 당장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노동자와 종업원 등 현장근로자와 구두닦이 넝마주이 술집아가씨 일용품팔이 부랑아 등이 대부분이었으며,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도 상당수가 끼어 있었다.

점차 조직화되는 무장시위대

조별로 부대가 편성되자 조장은 먼저 자기 대원들에게 총기 조작법과 수류탄 투척법 등을 교육시키고 사격요령 등에 관해서도 구두로 설명을 해주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유동삼거리에서도 광주공원에서와 마찬가지로 2백여 명의 무장시민들에게 총기조작법과 교전요령을 가르치고 있었다. 40대 초반의 리더는 “오늘밤 격전이 예상된다”면서 아세아 극장 옥상과 그 아래 도로변 양옆에 화분대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LMG와 기관단총 3정을 배치토록 지시했다.

학동 시장입구에선 30여명의 무장시위대가 화순방면의 진입로를 차단하는 무장경계에 들어갔으며, 기독병원 부근에선 40-50명이 수피아여고 앞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이곳에 배치되기 직전 수피아여고 강당에서 실탄 장전 요령과 조준 및 야간사격 요령을 교육받았다. 해남?강진?무안?목포?나주 방면으로 통하는 백운동 철도건널목에도 20여 명의 시위 병력이 배치되었다. 이들은 도로 양옆 3층 건물로 들어가 전방관측이 잘되는 목표 쪽에 각자 위치를 잡았다.

한편 이날 오후 5시쯤 계엄군을 도청으로부터 결정적으로 퇴각케 하는 무장작전이 전남의대병원 12층 옥상에서 일단의 젊은 시위대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은 LMG 2정을 의대병원 옥상의 계엄군임시본부인 전남도청이 정확히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는 지점에 설치한 것이다. 도청과 병원의 거리는 불과 3백m 내외에 불과했다.

시민시위대는 12층 옥상에서 4층에 불과한 도청건물을 내려다보며 유리한 위치에서 기관단총의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도청내의 계엄군 임시본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민들의 끈질긴 저항에도 그다지 심각성을 느끼지 않던 도청임시본부는 전남의대 옥상에서 날아오는 총격은 피할 수 없다고 느꼈는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휘발유를 가득 만재한 소방차가 도청문 돌파를 위해 시위대의 엄호를 받으며 속속 접근해 오고 있다”는 정보에 접하면서 더욱 초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계엄군임시본부는 오후 5시30분 일단 철수를 결정, “장갑차 한 대가 도청에서 학동방면으로 질주하면서 길 양옆에다 기관총을 쏘면서 빠른 속도로 지원동 입구까지 9회나 왕복을 하였다. 퇴로 확보를 위한 필사적인 위협사격임이 분명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병력을 가득 실은 군용차량 10여대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면서 M16을 길 양옆으로 난사했다. 주택가 안방까지 날아 들어온 총탄에 안타까운 희생자가 여기서도 많이 생겼다.

이와는 별도로 계엄군들은 각 소속부대 별로 조선대학교 쪽으로 집단 퇴각했다. 전남도경찰국 중요간부는 부하직원들에게 “사태가 지극히 심각하니 각자가 알아서 행동하라”면서 도청 뒷담을 넘어 피신하였다.

시위군중들은 계엄군 임시본부가 도청 내에서 완전 철수한 것도 모른 채 한동안 도청을 포위하고 시위를 계속하다가 이날 오후 8시경에야 비로소 도청 내로 진입, 드디어 도청을 시민의 손으로 ‘접수’ 했다.

그 후 광주공원, 유동삼거리 등지로 모였던 무기들은 즉시 도청 내로 모아졌다. 이날 시민들의 손을 통해 도청에 모아진 무기류는 카빈 소총 2천2백40정, 엠원 소총 1천2백25정, 38구경권총 12정, 45구경 권총 16정, 기관총 2정 등 모두 3천5백5정이었으며, 실탄은 4만6천4백발, TNT 4박스, 뇌관 1백개, 장갑차 5대, 수십대의 무전기, 방독면 등이었다(이 숫자는 계엄사가 5월22일 발표한 내용이다).

신현확 총리 사퇴, 박충훈 신내각 들어서

5월21일 밤의 광주 시내 전역은 칠흑 같은 암흑으로 일관했다. 무섭게 질주하는 시민시위대들의 암호연락 차량과 무장차량 외에 길거리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이날 밤 시민시위대의 암구호는 ‘담배연기’였는데, 이 암호는 비상연락 지프를 통해 각 지역을 경계중인 시위대원들에게 신속하게 전달되었다.

이날 밤을 기하여 계엄군은 송정리 방면으로 통하는 화정동, 화순방면으로 통하는 지원동, 목포방면으로 통하는 대동고교 앞, 장성방면의 동운동, 여수·순천방면의 문화동, 31사단방면의 오치, 그리고 교도소 일대 등 7개 지점에서 광주시를 타지역과 차단·봉쇄시키는 작전으로 전환했다.

특히 이날 밤 퇴각 과정에서 퇴각하는 계엄군 공수부대와 교체병력 00사단 사이에 서로를 확인할 수 없었던 관계로 오인 총격전이 벌어져 최소한 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인근주민들은 추정했다.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한 직후, 작전이 광주차단·봉쇄위주로 바뀌면서 이날 밤 9시경부터 서울발 광주행 하행열차가 장성까지만 운행되었다. 이와 함께 계엄사는 광주시위사태를 처음으로 밝히고 “민간인 1명 군경 5명이 사망했다”고 거짓 발표했다.

또한 “광주소요는 서울을 이탈한 소요주동 학생 및 깡패들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유언비어를 날조해 퍼뜨린 데 기인되었다”고 발표했다. 이 날짜로 신현확 총리가 사퇴하고 박충훈 내각이 수립되었다.
또 이 날을 기해 광주시내 거주 미국인 약 2백명은 송정리 비행장을 통해 서울로 빠져나갔다. 또한 송정리 미군비행장에서는 이날 밤 9시부터 자정에 이르기까지 그곳에 착륙 중이던 전투기들을 비롯 모든 비행기들을 군산 혹은 오산 비행장으로 이동시켰다.

한편 이날에야 동아일보에는 ‘광주사태 대책강구’라는 제하에 “지난 18일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짤막하게 보도했다. 계엄사는 이날 동시에 김대중씨에 대한 중간조사 내용을 발표, “학원시위사태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배후조종자”로 규정했다.

21일 오후 총격전이 개시되고부터 무장한 시위대를 광주시민들은 일반 시위군중과 구별 ‘시민군’으로 호칭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비조직적?분산적이던 시위대들은 30-40대의 장년층이 참여하면서부터 예비군조직과 군대경험을 살려 점차 조직적이고 질서정연한 편대를 갖춰갔다.

시민군을 중심의 무장항쟁 성격으로 광주 시위사태가 성격이 바뀌어가는 동안, 학생운동권에선 윤상원을 중심으로 녹두서점과 보성기업에서 수차례에 걸쳐 모임을 갖고 ‘현 상황에서의 학생운동의 진로’에 관해 논의를 벌였다. 이 자리에는 윤상원을 비롯, 정상용, 이양현, 정해직 등 7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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