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도큐멘터리-光州 그 비극의 10일간

영화 ‘화려한 휴가’로 1980년 5월 광주에 대해 또 다시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시내 한복판에서 전두환이 저질렀던 그 끔찍하고 처절했던 민족학살극은 27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살아있는 현장’으로서 우리들을 전율케 하고 있다. <시사신문>은 윤재걸, 당시 동아일보 기자의 무삭제 원본 ‘도큐멘터리-光州, 그 비극의 10일간(3백50매)’을 통해 1980년 5월 ‘작전명령-화려한 휴가’로 야기된 광주민주항쟁의 발단과 그 비극적 최후를 지상에다 온전히 펼쳐보려 한다. 그날 숨져간 민주영령들께 다시 한번 명복을 빌면서, 독자 제현의 일독을 바라마지 않는다.

시위 군중들은 경찰의 최루탄에 몇 차례 밀리다가 금남로와 중앙로의 교차지점인 지하상가 공사장 부근에 주저앉아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시민들은 겁이 없어진 듯했다. 어떤 시민은 “차라리 우리 모두를 죽이라”면서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어대기도 했다.

▲ 시위군중은 거세게 저항했고 공수대는 그 극한 대립에 총을 꺼내드는 것으로 사태를 정리하려 했다.
맨주먹으로 계엄군과 맞서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앞에 나와 시위 군중들을 향해 구호를 선창하면서 유인물을 낭독했다. 이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아리랑’, ‘정의가’, ‘투사의 노래’를 합창하면서 시민들을 규합했다. 학생들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스피커가 필요하게 되자 곧바로 40여 만원이 모금되었다.

시위 군중들이 대오를 정비하고 있는 동안, 금남로 도청 앞을 지키고 있던 군경 저지선에선 모종의 변화가 일고 있었다. 전면을 담당하고 있던 경찰병력이 뒤쪽으로 빠지는 대신 공수부대원들이 전면으로 배치되고 있었던 것.

공수부대원들은 군중들을 향해 귀가를 종용했으나 시민들이 더욱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자 곧바로 작전을 개시, 군중들을 곤봉으로 해산시키려 들었다. 대검으로 찌르는 방법은 취하지 않았으나 강력한 공세 자세로 나온 건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얼마 후 모금한 돈으로 준비한 스피커가 등장했다. 자동차용 배터리에다 소형앰프를 부착시킨 확성기에선 “우리 모두 이 자리에서 먼저 가신 님들과 같이 죽읍시다”면서 시민들의 시위를 독려했다. 이 같은 가두방송이 있고 나서 시민들은 더욱 흥분, 계엄군과 몇 차례 공방전이 거세게 일었다.

시위대의 자세는 어제와 달리 훨씬 자신에 차 있는 듯 했다. 금남로를 따라 이들은 공수대의 저지선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가곤 했다. 많은 사람들은 얼굴 특히 코밑 부분에 치약을 발라 최루가스를 참아내고 있었다. 이들이 목표로 삼는 도청 앞은 군경저지선이 겹겹이 쳐져 있었고, 그 후편으로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탱크를 위시한 수많은 화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오후 5시50분쯤 충장로 입구 쪽에서 약 5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스크럼을 짜고 도청을 향해 돌진해왔다. 이들은 맨몸으로 계엄군과 정면충돌, 이내 힘에 밀려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물러섰다.
시민들은 “군은 38선으로 복귀하라”는 등의 구호와 “애국가” 등을 부르며 대표를 선출, 경찰저지선으로 보내 “광주시민을 폭도(적)로 취급하는 공수대와 사생결단을 낼 테니 경찰들은 비켜 달라”고 요구했다. 몇 차례의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시민들은 끝까지 물러설 줄 몰랐다. 희생자 수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수백 대의 차량행렬 시위

이때 갑자기 금남로 끝부분인 유동 쪽에서부터 수많은 차량들이 일제히 비상라이트를 켜고 동시에 경적을 울리면서 도청을 향해 돌진해왔다. 맨 선두에는 대한통운소속 12톤 대형트럭과 고속버스 시외버스가 앞장섰다.

대형트럭 4대, 시내·외버스 11대가 선두에 섰고, 그 뒤로 2백여 대의 택시가 도로를 가득 메운 채 뒤따르고 있었다. 트럭 위에는 20여 명의 청년들이 올라서서 태극기를 흔들어댔으며, 버스 속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시민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순식간에 시위대열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사기가 충천했다.

차량시위행렬과 군경의 접전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극”이었다. 군경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있는 대로 차량행렬을 향하여 쏘아댔다. 안개처럼 자욱한 가스에 숨이 막힌 운전사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자 계엄군은 이들 운전사들을 대부분 연행했다. 끌려가는 운전사들을 보며 시위대는 투석을 하며 차량시위대를 엄호했다.

이날 밤 시위군중과 군경 간에 수십 차례의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밤이 깊어지면서부터는 시 외곽지역에서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민들이 합세, 시위군중은 거의 20만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오후 8시30분, 광주소방서를 공격해 소방차 3대를 탈취한 시위대가 차를 앞세우고 금남로에 나타나 소방호스로 최루가스를 제거하면서 군경저지선쪽 장갑차 앞으로 밀어닥치자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다시 벌어졌다.

밤 9시경, 비교적 시내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시청건물의 군경저지선이 무너지면서 시민들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문화방송국과 KBS방송국이 시민들의 공격을 받아 방송이 중단되는 사태를 낳았다. 이 무렵 시내 외곽 지역의 시위대들은 곳곳의 주유소를 점거하여 휘발유를 퍼내 화염병을 만들거나 시내 전역의 파출소를 파괴하였다.
또 밤 9시20분 경에는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 광주고속버스 10여대를 몰고 나온 시위대가 경찰저지선을 그대로 돌파하는 바람에 함평경찰서 소속 경찰관 4명이 차에 깔려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시위대의 열기는 밤이 깊어갈수록 높아가 마침내 밤 10시경에는 시 외곽지역으로 통하는 군경저지선이 곳곳에서 무너져 M16 총성과 예광탄 신호탄이 계속 터져 올랐다. 경찰력은 마비상태에 빠져들었으며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두절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됐다. 마치 전시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다.

이제 군경은 도청과 광주역 조선대·전남대 등에서만 볼 수 있었다. 20만에 육박한 시위군중이 도청 앞의 군경저지선을 압박해 들어오자 도청 방어가 위태롭다고 판단한 계엄군은 20일 밤 11시5분 마침내 공식적으로 발포를 개시하기에 이르렀다. M16의 총성이 콩 볶듯이 광주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선두에 섰던 시위대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유혈공방전 ‘신역(新驛)사태’

도청 앞 시위과정 중 전옥주라는 여성은 휴대용 확성기로 “물러서지 맙시다. 모두들 도청으로. 전투경찰 아저씨 우리에게 최루탄을 쏘지 마세요. 여러분과 우리는 다 같이 힘을 합쳐 우리 민족을 못살게 구는 전두환을 몰아내야 해요” 하고 외치면서 밤새 시위대열을 독려했다. 계엄사령부는 한때 이 여인을 간첩으로 발표한 적이 있었지만, 연행 조사 결과 사실과 다름이 밝혀졌다.
이날 밤 도청 3층 도지사실에 있던 장형태 지사는 1층 서무과로 피신했다가 얼마 안 있어 상무대에 있는 계엄사령부로 몸을 피하고 말았다.

밤 11시가 넘으면서 계엄군의 진압 화력이 약화되어 최루탄을 쏘는 속도가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군경저지선은 여전히 요지부동으로, 시위대와 군경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거듭했다. 이보다 앞서 밤 10시경엔 MBC부근에서 갑자기 폭음이 일며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시위대에 의한 화염병 투척이 분명했다. 주위경계를 맡고 있던 10여 명의 계엄군도 재빨리 철수해 버렸다.
MBC는 무방비상태에 빠지고 시위대의 수중에 들어갔다. 곧 이어서 MBC는 화염에 휩싸였다. 방송국의 불길로 전 시가지가 대낮같이 훤해졌다.

20일에 있은 주요 공방은 금남로와 신역(광주역)에서 벌어졌다. ‘금남로 전투’는 앞에서 본 그대로였다. ‘신역 전투’는 밤 10시30분쯤 한 청년이 공용터미널에서 광주역으로 통하는 지점의 길 옆 주유소로부터 드럼통 2개에다 휘발유를 가득 담아 트럭에 싣고 불을 붙인 뒤 계엄군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림으로써 촉발되었다.

계엄군 20m전방에서 그 청년은 불이 붙은 트럭에서 재빨리 뛰어내렸다. 트럭은 그대로 계엄군 진지로 돌진, 바리케이드를 박살내고 역전 분수대를 들이받았다. 순간 꽝! 하는 폭발음과 함께 불기둥이 하늘높이 치솟았다.

광주역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와 계엄군의 유혈공방전은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다. 수많은 차량들이 광주역 앞 분수대 주위에서 불타오르고, 시위군중들은 그 곳을 가득히 에워싸고 있었다. 시위대들의 끈질긴 공략을 이겨낼 수 없다고 판단한 계엄군측은 처음 한동안은 공포탄으로 위협사격을 가하며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려 안간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미 노도처럼 밀려드는 시위대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시위대의 손에는 무기가 될 만한 각종 잡구가 쥐어져 있었다.

계엄군의 총구의 각도가 갑자기 아래로 수그러들었다. 그 순간 시위 군중들이 풀썩 풀썩 고꾸라졌다. 피투성이가 된 시신을 보면서도 시위 군중들은 겁을 먹지 않고 계속 계엄군과 대치하며 위협했다. 계엄군들은 서서히 퇴각준비를 서두르는 듯했다.

신역(광주역) 방어는 계엄군으로선 작전상 아주 중요한 지점이었다. 광주역과 고속도로 입구가 시위대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병력수송과 보급품 공급을 비롯, 고속도로가 차단됨으로써 빚어질지도 모를 ‘치안부재’를 노출, 전반적인 행정기능의 마비를 재촉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발포, 금남로의 처절한 비극

한편 금남로에서는 자정이 가까워오면서 20만에 육박하는 거대한 시위군중이 도청 앞 계엄군을 완전 포위, 시위대의 도청점거는 다만 시간문제일 따름이었다. 순간 총성이 몇 차례 울려 퍼졌다. 공포의 위협사격이었다. 밤하늘은 기관단총에서 내뿜은 예광탄이 검은 하늘을 가르며 날았다.

‘위협사격’임을 이내 감지한 시위 군중들의 공격이 계속 죄어 들어오자 드디어 계엄군측 M16 총구에서 콩 볶는 듯한 총성이 계속 튀겼다. 전열에 위치한 시위 군중들이 쓰러졌다. 순간 도청 앞 광장은 아수라로 변했다. 시민들은 밟히고 넘어지면서 저마다 길옆으로 피했다.

‘발포’가 공식적으로 개시된 이후 시위군중은 두 갈래 나뉘어졌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한 시민들은 서둘러 시위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은 발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단 골목길과 건물 옆으로 몸을 피신,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며 ‘공격자세’를 늦추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시가전에 직접 참가했다”고 한 학생의 말처럼 이날 밤의 도청 앞은 “처절을 극한 이 땅의 최대비극”으로 기록돼야 할 것 같다.

21일 새벽 1시쯤엔 광주세무서가 불탔으며, 새벽 2시 무렵엔 광주역 부근에 있는 KBS방송국이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고 광주로부터 외부로 통하는 모든 시외전화는 ‘고장’이라는 이유로 두절되었다.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족상잔의 ‘피내음’은 더 이상 전선을 타고 시외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밤에 불타버린 두 방송국과 함께 ‘전남일보’ ‘전남매일신문’의 편집제작이 중단됨으로써 광주시는 완전히 고도(孤島)로 화했다.

한편 정부당국은 20일 오후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전 국무위원이 최근의 소요사태와 관련하여 사표를 제출하였다고 발표, 과도정부를 주도했던 신현확 내각은 출범 후 5개월 6일 만에 물러났다. 그러나 광주지역의 심각한 사태에 대해선 아직도 공식적인 발표가 없었다.

헌혈자들의 눈물겨운 행렬

5월21일. 이날은 음력 사월초파일로서 ‘부처님 오신날’이었다. 그러나 광주에는 저주와 분노, 끔찍한 살육의 총성만이 난무했다. 지금도 광주시민들은 이날의 참상을 ‘초파일의 유혈극’이라고 부르고 있다.
계엄군의 발포가 개시된 후 광주시내 전역의 병원이란 병원은 총에 맞은 ‘총상환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운전자들은 앞장서서 부상자와 사망자들을 병원에 실어 날랐다. 병원마다 총상환자들의 신음소리로 넘쳐났으며, 분주한 모습으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의사와 간호원들에게 시민들은 경의를 표했다.

병원 앞엔 미처 들어서지 못한 부상자들이 줄을 이었고, 헌혈자들의 눈물겨운 행렬이 상처받은 시민들의 마음을 그나마 위로해 주었다. 특히 적십자병원에선 인근의 속칭 ‘황금동아가씨’들이 떼 지어 몰려와 헌혈을 자청하는, ‘가슴 찡한’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새벽 4시까지 지속된 ‘신역 전투‘를 거쳐 오전 9시30분쯤에 이르자 외곽지역의 시위 군중들은 금남로 시내 중심가를 향해 몰려들었다. 10시경엔 이미 시위대열이 10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 운전을 할 줄 아는 많은 젊은 시위대들은 군납방위산업체인 아세아자동차공장에 진입, 대형버스 22대, 장갑차 3대, 군용트럭 33대, 민간트럭 20대를 몰고 와 도청으로 진격하거나 외곽으로 몰며 시민들을 실어 날랐다.

이날 오전 8시를 기해 전국 각지에선 광주행 고속버스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시위대는 계엄군과 협상을 시도, 오전 9시50분쯤 시위군중이 뽑은 시민대표 김범태(27·조선대 법대 1년)씨와 전옥주(32·가정주부)씨 등 2명을 도청에 들여보내 장형태지사와 협상토록 했다. 이 자리에서 양 대표는 ①유혈사태에 대한 당국의 공개사과 ②연행학생 및 시민들의 전원 석방과 입원중인 시민과 학생들의 소재와 생사를 알려줄 것 ③계엄군은 21일 정오까지 모든 병력을 시내 전역에서 철수할 것 ④전남북 계엄분소장과 시민대표간의 협상을 주선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렇다 할 답변을 얻지 못했다.
오전 10시30분에 이르자 군 헬기가 분주히 도청과 조선대 전남대 등에 이착륙하는 모습이 보였다. 계엄당국은 이들 헬기를 통해 도청 지하실의 진압무기류와 사망자를 어디론가 공수하는 한편, 도청 내의 주요 기밀서류를 이송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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