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도큐멘터리-光州 그 비극의 10일간

영화 ‘화려한 휴가’로 1980년 5월 광주에 대해 또 다시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시내 한복판에서 전두환이 저질렀던 그 끔찍하고 처절했던 민족학살극은 27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살아있는 현장’으로서 우리들을 전율케 하고 있다. <시사신문>은 윤재걸, 당시 동아일보 기자의 무삭제 원본 ‘도큐멘터리-光州, 그 비극의 10일간(3백50매)’을 통해 1980년 5월 ‘작전명령-화려한 휴가’로 야기된 광주민주항쟁의 발단과 그 비극적 최후를 지상에다 온전히 펼쳐보려 한다. 그날 숨져간 민주영령들께 다시 한번 명복을 빌면서, 독자 제현의 일독을 바라마지 않는다.


오후에 시민 학생이 시위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금남로에 진주해 있던 특전단 병력이 조선대학교 캠퍼스 뒤쪽으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빠져나간 오후 1시 반경부터였다. 금남로엔 몇 안 되는 공수부대원과 경찰병력이 바리케이를 지키고 있었다.

격렬해진 시위군중

시민들은 골목마다 건물마다 숨어 있다가 슬금슬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톨릭센터 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오전보다 훨씬 많은 4~5천명에 달했다. 이들은 금남로 양쪽을 차단한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계속 몰아붙였다. 오전중의 시위대열에선 볼 수 없었던 40대 이상의 장년층과 부녀자들도 상당수가 눈에 띄었다. 돌과 화염병, 최루가스와 패퍼포그가 난무하는 가운데 쌍방은 계속 공방전을 벌였다.
흥분한 몇몇 청년들이 가톨릭센터 차고에서 승용차 4대를 끌고 나와 차 내부 의자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인 다음, 군과 경찰의 저지선을 향해 시동을 건채로 밀어붙였다. 그중 1대는 CBS 취재차였다. 불붙은 차량이 경찰바리케이드에 부딪쳐 폭발할 때마다 시위 군중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일단의 청년들은 금남로2가 소재 제일교회(현 광주백화점) 신축공사장에서 사용하는 두 개의 기름드럼통에 불을 붙여 군경저지선에 힘껏 굴려 보냈다. 이중 한 개의 드럼통이 커다란 폭음을 내면서 폭발, 화염이 높이 치솟아 올랐다. 시위대는 점차 흥분·고조돼 갔고 숫자 역시 계속 불어났다.
군과 경찰은 가스차와 가스탄을 아껴 쓰려는 심산이었는지 이것들의 사용을 제한하는 대신 갑자기 시위대로 육탄 접근, 곤봉과 총 대검 등을 휘둘렀다. 시위대열은 흩어졌다간 이내 다시 모였다. 시위대는 도로변의 대형화분과 공중전화박스 교통철책 버스정류장 입간판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계속 보도블럭을 깨어 돌멩이를 만들어냈다.
보도블럭을 깨는 작업은 주로 시위대 후미나 중간부분의 아주머니나 아저씨들이 도맡다시피 했다. 지하도 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들도 무기가 될 만한 연장이나 각목 쇠파이프 등을 젊은 청년들에게 계속 공급했다.
오후 3시쯤 군경저지대는 진압 화기가 바닥이 난 듯 방패를 앞세우고 곤봉을 손에 쥔 채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제자리를 고수했다. 바로 이때 군용 헬기 두 대가 시위대열의 머리 위를 저공비행하며 선무방송을 개시했다.
“시민 학생 여러분! 이성을 잃으면 혼란이 가중됩니다. 지체 말고 즉각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여러분들은 지금 극소수 불순분자 및 폭도들에 의해서 자극되고 있는 것입니다. 시민이 가담하거나 동조하면 가정과 개인에게 있어서 중대한 불상사가 닥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더 이상의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가톨릭센터의 처절한 참상

이때 갑자기 가톨릭센터 앞에서 함성이 터지면서 2백여 명의 청년들이 가톨릭센터 안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9층 옥상에서 6명의 무장 공수부대원이 시민들의 시위상황을 무전기로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이 목격된 직후였다.
빌딩 안으로 올라간 청년들 중 몇몇은 공수부대원의 대검에 찔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수많은 청년들이 집중적으로 돌 세례를 퍼붓자 공수대원들도 비틀거리며 손을 들고 말았다. 공수대원들이 비틀거리자 청년들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몽둥이와 쇠파이프로 때려 눕혔다. 그리고 한 청년이 그들로부터 빼앗은 M-16소총 한 자루를 번쩍 치켜 올리자 도로의 시위대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가톨릭센터 빌딩으로 올라가 공수부대원을 인질로 삼은 것도 잠시였다. 오후 3시20분경 점심을 끝낸 공수부대병력이 다시 도청 앞과 광남로 4거리에서 점차 포위망을 좁혀왔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돌과 각목을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열세에 몰린 시민들은 차츰 뒤로 밀리기 시작하면서 골목골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고, 주 대열도 마침내 금남로를 벗어나 뿔뿔이 흩어졌다. 캐리버-60 기관총으로 무장한 장갑차가 무서운 속력으로 시위대를 향해 돌진해왔다. 바로 이 순간 가톨릭센터 안으로 올라갔다가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고 인질로 잡은 공수부대원을 지키고 있던 청년들은 일시에 들이닥친 공수대에 의해 최후를 맞아야만 했다. 이곳에서 수많은 살상자가 생겼다.
공수부대의 공격에 밀려 문화방송쪽으로 밀린 시위대열은 중앙국민학교 후문 부근에서부터 화염병을 투척, 저항하면서도 계속 열세를 면치 못했다. 시위대는 문화방송을 표적으로 삼았다. 일부 시위군중은 방송국 내부로 들어가 공격하는 한편, 또 한 시위대는 차고로 들어가 취재차량 2대와 승용차 3대 등 5대를 끌어내 불을 질렀다. MBC방송국 사장이 직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바로 옆의 전자제품상인 문화상사에도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이곳에도 공수부대가 급습,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위청년들을 뒤쫓던 공수부대원들도 흥분한 시민들에 포위되어 희생당한 예가 적지 않았다. 광주천변을 따라 양림교회 쪽으로 뒤쫓아 오던 한 공수대원은 수많은 시민들이 포위 역습하자 다급한 김에 광주천으로 뛰어내렸으나 시민들이 가만 놔두지 않았던 것.
공원다리에서도 몇 명의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에 밀려 다리 밑으로 떨어진 일이 있었으며, 양동시장에서도 한 젊은 청년을 추격하던 공수부대원이 시장상인들로부터 몰매를 맞아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밖에도 시민을 얕보고 단신으로 젊은 학생시위대를 추격했던 공수부대원 상당수가 분노한 시민들의 희생물이 된 예가 적지 않았다.

시위학생을 향한 최초의 발포

이날 오후 4시반경에는 동구 학동 및 남광주 역전 등 외곽지역으로까지 시위가 확산됐다. ‘피의 살상전’은 이제 광주시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 무렵이 되면서부터는 고등학생들도 시위대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전남고 대동고 중앙여고생들은 오후 수업을 거부하고 시가행진에 돌입할 기세였지만, 이미 계엄군이 진주, 학교정문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또 광산군 송정읍에 소재한 광산여고와 정광고교 학생 1천여 명도 수업거부농성을 벌이다가 방과 후부터는 시위대열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5시 전남 도교육위원회는 중고등학생들의 동요가 있자 다음날(20일) 하루 동안 휴교조치를 취한다고 시달했다.
오후 4시30분, 공용터미널 바로 윗 편의 구 광주역 4거리에선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전옥주·32)가 휴대용 확성기를 붙들고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가두방송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닙니다. 난동자도 아닙니다. 단지 선량한 광주시민의 일원일 뿐입니다. 아무 죄 없이 우리 학생 시민들이 죽어 가는 것을 더 이상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나섭시다. 학생들을 살립시다. 계엄군을 물리치고 우리 스스로 광주를 지킵시다.”
가두방송에 접한 시민들은 눈시울을 적시면서 이내 수천명의 시위대열을 형성, 시내로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잠시 후 공수부대가 들이닥치면서 이곳은 또 한 차례 피바다를 이루었다.
시위대열은 바로 옆 공용버스터미널 쪽으로 피신하면서 대오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다시 모여든 시민들의 수는 2~3천명에 달했다. 이곳에서도 한차례 커다란 살상전이 벌어졌다. 공용버스터미널 앞 지하도로 피신한 사람들은 지하도 출입구를 완전 봉쇄당했기 때문에 특히 희생이 컸다.
처참을 극한 ‘전쟁’이 30분 만에 또 한 차례 벌어졌다. 부상자를 실어 나르던 택시운전사가 이곳에서 최소한 3명이 죽은 것으로 시민들은 증언하고 있는데, 이 같은 사건은 다음날(20일) 벌어진 ‘차량시위사건’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공용버스터미널이 아수라장이 된 후 시외버스의 착·발은 광주역으로 옮겨 행해졌다.
오후 5시10분경에는 계림동 광주고교 앞에서 시위대와 공수대원 간에 또다시 충돌이 벌어졌다. 포위된 장갑차 속의 한 공수부대원이 최초로 발포한 총에 맞고 한 고등학생(조선대 부속고교 야간생)이 현장에서 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5월19일의 계속된 ‘살육전’이 진행되면서 “임신부의 배를 갈라 태아가 튀어 나왔다”는 소문과 함께 “광주역 분수대에서 여학생을 발가벗겨 놓고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시민들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이 같은 소문은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온 시내에 퍼져나갔다. 이날 밤 7시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헤어질 줄 모르고 요소요소에 집결, “광주시를 구하자”면서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힐 줄 몰랐다.

통곡하는 광주

5월19일 밤 7시쯤부터 내리던 비는 20일 아침 9시부터 차츰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비극의 도시 광주는 어제의 참극을 그대로 간직한 채 소리 없이 통곡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오전 9시가 넘으면서부터 하나 둘씩 시내중심가로 나오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얼굴표정 속에선 이미 공포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도 군인과 경찰은 시내 요소요소에 병력을 배치하고 지나는 차량과 사람들을 철저하게 검문·검색했다. 특히 다리나 로타리 부근, 통행이 잦은 중심가의 사거리에선 검문과 경비가 더욱 삼엄했다.
도로변에선 비를 맞으면서 주저앉아 통곡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목격되기도 했다. 어떤 아주머닌 자신의 치맛자락을 찢어가면서 “내 아들을 살려내라”고 거의 발광하듯 울부짖고 있었다. 누구 하나 뭐라고 위로해줄 수도 없었다. 많은 시민들도 함께 눈시울을 붉히면서 따라서 울먹일 뿐이었다.
비가 그치기 시작하면서 오전 10시경엔 대인시장 주변에 1천여 명의 시민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가정주부와 고등학생, 40~50대의 장년층까지 합세한 군중들은 전날의 시민들의 피해상황을 주고받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새벽 6시쯤 전남주조장 앞길에서 시체 한 구(김안부씨·36세)가 온몸이 짓이겨진 채 발견되었는데, 이 소식에 접하자 시민들은 더욱 흥분하였던 것.
1천여 명의 시위 군중들은 주로 대인시장의 상인들과 인근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장사마저 접어두고 시민관 방면으로 진출해 나갔다. 금남로 도청 앞이 목표였지만 시위대들은 금남로에 채 이르기도 전에 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뿔뿔이 흩어졌다. 흩어진 시민들은 삼삼오오 금남로 부근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와의 접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수부대원들은 어제와 달리 M16소총에 착검도 하지 않은 데다 말씨마저 달랐다. 공수특전단의 한 장교(중령)는 시민들에게 자신의 고향이 전남 곡성이라고 하면서 “질서를 지켜줄 것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이날 광주역과 공용터미널, 서방 삼거리를 경비하는 공수부대원들은 화염방사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화염방사기에 의한 최초의 희생자가 서방 삼거리에서 생겨났다고도 했다. 공수부대원과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던 시민들 중 맨 선두에 섰던 사람이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불에 타고 말았으며, 그 외 몇 명은 높은 도수의 화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화염방사기에 그을려 죽은 시체와 부상자들은 재빨리 군용 트럭에 옮겨져 실려 갔다고 전했다.
동명동 부근에서는 하교하던 3백여 명의 중학생들이 길거리에 늘어선 계엄군에게 돌을 던지며 대치하다 최루탄과 페퍼포그 세례를 받고 물러났다.
한편 어제 사태에서 부상자를 실어 나르던 동료운전사가 최소한 3명이 죽은 데 대해 택시기사들은 저마다 흥분하고 있었다. 시내 어느 누구보다도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이들은 당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책을 세워보자고 연락을 취했다. 이 같은 택시기사들의 움직임은 불과 서너 시간 후 커다란 위력을 발휘, 시민들의 환호를 받게 된다.
5월20일 오후3시.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의 숫자는 수만명에 달했다. 할머니의 손목을 잡은 다섯 살짜리 어린 꼬마에서부터 아저씨·아주머니·점원·공원·술집아가씨·회사원·방위병·학생 등 남녀노소와 직업의 구별 없이 수많은 시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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