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도큐멘터리-光州, 그 비극의 10일간

영화 ‘화려한 휴가’로 1980년 5월 광주에 대해 또 다시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시내 한복판에서 전두환이 저질렀던 그 끔찍하고 처절했던 민족학살극은 27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살아있는 현장’으로서 우리들을 전율케 하고 있다. <시사신문>은 윤재걸, 당시 동아일보 기자의 무삭제 원본 ‘도큐멘터리-光州, 그 비극의 10일간(3백50매)’을 통해 1980년 5월 ‘작전명령-화려한 휴가’로 야기된 광주민주항쟁의 발단과 그 비극적 최후를 지상에다 온전히 펼쳐보려 한다. 그날 숨져간 민주영령들께 다시 한번 명복을 빌면서, 독자 제현의 일독을 바라마지 않는다.

시위 군중들은 10분도 못되어 완전 해산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흥분된 자세로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시위 참여 여부에 아랑곳없이 주위에 서성이는 청년들과 가게의 젊은 종업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두들겨 팬 후 피가 낭자해지면 손을 뒤로 돌려 포승줄로 꽁꽁 묶어 군 트럭에 던져 올렸다. 차 위에선 또 다른 공수부대원 한 명(주로 무전병)이 젊은이들의 옷을 벗겨 팬티만 입힌 채 계속 난타를 가했다”고 했다.

공수부대의 무차별 구타와 연행

거리는 삽시간에 살기가 낭자하게 흐르고, 골목골목 집집마다에선 사색이 되어 도망쳐온 젊은이들을 숨겨주기에 바빴다. 어떤 학생은 북동우체국 옆 골목 마지막 집으로 뛰어들어 다급한 김에 안방 장롱 속에 숨었으나 곧 뒤쫓아 온 공수부대원이 혼자 집을 보고 있던 할머니에게 방금 도망쳐온 학생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 할머니가 모른다고 답하자, “XX년 거짓말을 해, 맛 좀 봐야겠구먼”하면서 “할머니를 곤봉으로 쳐 실신시킨 뒤 군화차림으로 안방까지 뒤져 기어이 장롱 속의 학생을 붙잡아 난타한 후 연행한 예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오후 4시 반쯤에는 루문동 광주일고 부근에서 공수부대원이 길 가던 여학생을 붙잡아 무조건 구타하는,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는 광경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날 오후 4시30분쯤 벌어진 동명로 입구 청산학원 앞에서의 격돌과, 오후 4시 무렵의 공용터미널에서의 격돌로 인해 5천여 명의 시민·학생시위대 중 최소한 30여 명의 살상이 난 것으로 광주시민들은 알고 있다. 부상자와 사망자는 예외 없이 군 트럭에 실려 “재빨리 치워졌다”고 인근주민들은 증언했다. 미처 실어가지 못한 시체 2구가 다음날(19일) 아침 공용터미널 변소에서 발견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오후 5시쯤, 학생들의 시위대열은 무참히 깨져버렸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의 적극 방어, 공세적 방어는 수그러들 줄 모르고 더욱 기세가 당당해져갔다. 이들은 시내중심부 주요상가와 다방·이발관·음식점·사무실·가정집·당구장 등을 이 잡듯이 뒤져 아직까지 숨어 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학생들을 붙잡아 질질 끌고 나왔다. 많은 사람들은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기조차 싫어했다.
오후 7시쯤에는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 청년·시민·학생 등 3백여 명이 또 다시 공수부대와 충돌, 다수의 희생자를 냈다. 시내에서 몇 차례에 걸쳐 공수부대원들의 적극방어를 경험한 시위대의 손에는 이때 이미 무기가 될 만한 각목과 쇠파이프 등이 쥐어져 있었다. 치열한 공방전이 20~30분 거듭된 끝에 공수부대가 밀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산수동 오거리 방면으로 밀려가자 시위대는 계속 추격, 증강된 공수부대의 반격에 맞닥뜨려 이 부근은 한 순간 공포지대로 돌변하였다. 공수대는 밤새워 인근주택가를 샅샅이 뒤져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이면 빼놓지 않고 연행해 갔다.
이날에 있은 ‘무자비한 만행’과 ‘피내음’은 수군거리는 귀엣말과 전화선을 타고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 윤성민 국방장관은 이와 관련, 6월7일 “이날 출동한 병력은 전주지역에 위치한 7공수단 예하의 33대대 및 35대대였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이날 오전부터 본격적인 시위가 개시된 이래 오후부터 시내 변두리지역인 산수동, 계림동 부근에선 오전에 벌어진 시위상황에 관한 지하유인물이 나돌기 시작했다. 오전 중 자신들이 육안으로 목격한 사태의 진상을 고발하는 이 같은 유인물은 바로 엊그제까지 전남대학교 내에서 지하유인물 <대학의 소리>를 발간하던 제작팀과 극단 <광대> 회원 등 전남대생 4명에 의해 발간된 것이었다.
이들은 “일반 시민들에게 경찰 및 공수부대원들의 잔인성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시내 중심부에서 발생한 상황을 변두리 지역으로 전파시키기 위해 직접 제작 배포에 나섰다”고 말했다. 이들 지하유인물 제작팀은 이로부터 4일후 그동안 산발적으로 여러 팀에서 발간돼온 지하유인물을 통합, <투사회보>라는 이름의 유인물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학생차림의 젊은이는 무조건 연행

5월18일은 광주시민들에게 있어서 전율과 공포, 치욕과 분노의 날이었다. 밤새워 공포 속에서 잠을 못 이루던 시민들은 5월19일 날이 밝기가 무섭게 거리로 얼굴을 내밀고 주변 분위기 염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가족들 중 학생이나 젊은이가 있는 집안에선 모두가 걱정이 앞섰다. 특히 지난밤 돌아오지 않은 자식이 있는 집안에선 밤새워 가슴만 조였다. 어디다 수소문해 볼 수조차 없었다. 한마디로 무법천지였다.
5월19일을 기해 많은 가정에선 자식들을 지방이나 시골 친척집으로 피신시키는 예가 생겨났다. 부모들의 강권에 못 이겨 집안에 ‘갇힌 몸’이 된 젊은이들도 적지 않았다. ‘살육의 현장’으로 나갔다간 언제 맞아죽을지 모르는 판국에 부모들의 이 같은 성화는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결과적인 얘기이긴 하나, 사상자 중 상당수가 광주가 객지인 학생이나 시골청년 종업원 등 후견인이 없는 인물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바로 그러한 점을 잘 대변해 주고 있었다.
대학을 제외한 초중고교는 아직 정상 수업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시내 중심가의 몇몇 상가가 철시한 것을 제외하고 관공서와 일반기업체 공장들은 대체로 정상근무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5월19일 아침이 밝기가 무섭게 군인과 경찰은 시내 전역에 걸쳐 삼엄한 경비를 편 가운데 학생차림의 젊은이들을 보면 무조건 연행했다. 금남로는 일체의 차량통행이 금지되었으나 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은 계속 모여들어 오전 10시경엔 1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오전 10시반경, 기동경찰이 확성기와 군 헬기를 동원, 시내 중심가에 운집한 시민들의 해산을 종용했다. 그러나 군중들의 숫자는 계속 불어나 10시40분경부터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도청 앞 금남로 입구와 광남로 네거리를 완전 차단한 5백여 명의 경찰병력에 맞선 시민 학생들은 광주관광호텔 앞과 서울신탁은행 앞에 교통철책과 노변의 대형 화분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애국가’·‘훌라송’·‘정의가’· ‘전남도민의 노래’·‘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을 부르며 시위를 시작했다. 삽시간에 군중은 5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 군중들은 페퍼포그 최루탄 등을 마구 쏘며 진압하려는 경찰에 화염병과 벽돌 각목 등으로 맞섰다. 경찰이 시위 군중을 진압시키지 못하자, 10시50분경 군용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대부대원이 도청 앞과 광남로 네거리에 진출, 장갑차 4대씩을 앞세우고 시위 군중들을 포위, 압축해가기 시작했다. 이때 시민들은 금남로 3가 신축건물 공사장에서 각목과 철근 쇠파이프 등을 뜯어내 군과 정면충돌 했고, 군의 무차별 폭력에 흥분한 인도변의 많은 시민들도 시위대열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시위 군중 앞에서 공포의 총검술 훈련

금남로에 투입된 1천여 명의 공수부대 병력은 곤봉을 마구 휘두르며 착검한 소총으로 시위군중의 어깨와 다리 등을 마구 찔렀다. 금남로 일대는 삽시간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군중과 이를 지켜보고 비명을 지르는 시민 등으로 아비규환의 소용돌이로 변했다.
시위 군중들은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밀려 충장로 등 인근 골목으로 피하거나 건물 등으로 뛰어들었다. 군인들은 이들을 건물 안과 골목길까지 추격, 붙들어내 길바닥에 무릎을 꿇리고 턱을 걷어차거나 엎어진 사람들의 머리와 등을 마구 짓이겨 길가 곳곳에 2열 횡대로 머리를 처박은 자세로 꿇어앉히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시위대열은 산산이 흩어졌다. 공수부대원들의 끈질긴 추격전은 계속됐다.
이들은 아무 집이나 가게를 밀치고 들어가 “젊은 사람들만 보이면 곤봉으로 난타를 한 후 피투성이가 된 채로 질질 끌고 나왔다.” 그들은 길가로 끌고 나온 젊은이들을 가능한 한 많은 시민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게 한 후 군대의 유격훈련장에서 실시하는 가혹한 기합을 주었다.
젊은이들은 팬티만 걸친 몸으로 화염병 유리조각 돌멩이가 널려 있는 길바닥에서 손을 뒤로 묶인 채 엎드려서 아랫배만으로 기어가는 ‘올챙이 포복’과 ‘통닭구이’·‘원산폭격’ 등 고문에 가까운 잔인한 기합에 시달렸다. 여자들 역시 예외 없이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긴 마찬가지였다.
인근 도로변이나 건물 옥상에서 이를 지켜보던 많은 시민들은 이때부터 울분과 분노를 참지 못한 나머지 시위대열에 자발적으로 합세하는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공수대원들은 오전 11시15분부터 군 지프에 장치한 확성기나 핸드폰 등을 통해 건물 옥상이나 창밖을 내다보는 시민들에게 “문을 닫고 커튼을 치라”고 소리쳤다.
장갑차를 앞세운 이들은 도청 앞 광주천 광남로 제봉로 노동청 등을 포위한 상태에서 빙빙 돌며 시위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위협했다.
이 때문에 금남로 광남로 충장로 일대의 관공서와 공공건물은 낮 12시를 전후해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직원들은 외곽지대로 피신했다.
시위대열이 일단 해산해 버리자 공수부대원들은 골목 안 과 건물 안을 뒤져 30대 이하의 남녀 시민들을 집단구타 하면서 길가로 끄집어 내오는 한편, 금남로 노상에서 5백여 명의 무장병력이 우렁찬 구령과 함께 총검술 비슷한 진압훈련을 펴 시민들을 위압했다.
공수부대원들은 피를 흐리며 길가에 쓰러져 있는 시민들을 후송하는 경찰에게까지 곤봉을 휘둘렀다. 특전단 소속의 한 중령은 부상 시민의 후송을 지휘하던 안수택 전남도경 작전과장에게 “부상 시민을 빼돌리거나 시위 학생을 피신시키면 당신들도 동조자로 취급하겠다”는 등의 폭언을 퍼부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진압경찰의 한 간부(경감)는 핸드마이크로 충장로 등 골목길에서 서성이는 시민들을 향해 “제발 돌아가라. 군인들에게 걸리면 죽는다”고 안타까워하며 울먹였다.
오후 12시 30분쯤에는 금남로 1가 소재 YWCA빌딩 내에 있는 무등고시학원에서 몇몇 수강생들이 경고를 무시하고 밖을 내다봤다고 공수부대 1개 소대가 학원으로 난입, 50여 명의 학원생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면서 학원 밖으로 내몰았다.
그러자 밖에 대기하고 있던 또 한 패의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이 문밖으로 몰려나오자 곤봉으로 무차별 난타, 수강생들은 거의 반죽음이 되다시피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어디서나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청년들을 군화발로 닥치는 대로 걷어찬 뒤 군 트럭에다 던져 올리곤 지나버렸다.
수창국민학교 앞에선 청년 한명을 전봇대에다 발가벗긴 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곤봉으로 온몸을 난타하는 반인륜적 광경이 벌어져 시민들로 하여금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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