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라 해상풍수에서 관찰되는 47종의 바람과 파도의 유형도 공간의 작용

노병한 칼럼니스트
노병한 칼럼니스트

[노병한의 사주산책]…<易學에서 보는 공존하는 절대공간과 약동하는 상대공간?>에서 계속…상대공간의 다음으로 살펴보려함이 바로 다양한 현상이 약동하는 자기현현(顯現)의 공간(現象)반응이 나타나는 상대공간이다. 상대공간은 각양각색의 다양한 현상들이 약동하고 있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통일장과 같은 현상은 왜 생기는가? 그것은 공간 자체의 경향성의 발로임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경향성은 왜 생기는가? 그것은 공간의 자기현현(顯現)의 성질에 의한 것이라 할 것이다.

공간의 속성은 상호작용으로 끊임없이 찰나적으로 제자리에서 자기현현(顯現)의 경향성을 되풀이하게 된다. 여기서 현현(顯現: Epiphany)이란 본래의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거나 드러냄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현현(顯現)은 스스로 자기 본래의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거나 드러냄을 뜻하는 말로 이해하면 바르다.

그렇다면 공간의 자기현현(顯現)과 같은 성질은 왜 생기는가? 한 장소에서의 자기현현(顯現)은 그 주위의 장소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 가지 자극에 대한 반응현상이다. 전체의 공간은 하나의 단위로서 각 부분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것을 바라고 있음이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무한한 공간 속에서 완전한 균형과 조화란 항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망망대해(大海)의 해수면(海水面)이 잔잔한 수평으로 늘 균형을 이루고자 하나 바람이나 해류의 자극 등으로 인해서 균형과 조화가 깨져버리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바다에서 출렁거리는 파도의 종류는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총47종에 이른다. 이러한 파도를 만들어내는 원인은 바람에 있음이니 해상(海上)에서 부는 바람의 종류가 총47종에 이른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해상에서 부는 바람의 종류가 더 많이 분류되겠지만 말이다.

공간을 연구하는 학문인 풍수지리학의 첫출발선상이 바로 바람(風)이다. 바다라고 하는 공간상에서 일어나는 공간의 성질과 특성을 이해하려는 해상풍수(海上風水)도 결국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바람(風)과 그로 인해 발생·성장·노쇠·사멸해가는 해류(海流)와 파도(波濤)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해상이라는 공간에서 바다 위의 파도(波濤)와 바다 속의 해류(海流)는 늘 주위의 자극에 대한 반응 작용을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자 시도하고 있다. 이 또한 하늘이라고 하는 천문(天文)의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쉼 없는 반응 작용을 계속하고 있음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공간 내에서의 경향성의 발로는 역시 주위에서 이루어진 불균형에 대한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찰나적인 반응 작용을 일으키고 있음이다. 즉 절대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등방(等方)의 기본원리가 상대공간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균형과 조화의 대(大)원리가 자기표현의 경향성으로 나타나며 그 같은 공간의 자기현현(顯現) 현상은 크고 작은 여러 다양한 지역들을 점하게 된다. 이 같은 현상 중에서 어떤 것은 무핵장(無核場)이라는 장(場)까지도 형성하기에 이르게 된다.

찰나적으로 생멸을 거듭하고 있는 장(場)이지만 수억 겁 년의 장구한 세월을 거치는 가운데 어떤 장(場)은 유기적인 심성장(心性場)으로까지 발전을 보게 되며, 또 어떤 장(場)은 그 중심부위에 핵(核)을 동반하는 물리화학적인 장(場)을 형성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되기도 함인 것이다.

그렇다면 절대공간과 상대공간은 과연 어떠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 수수께끼 중의 수수께끼이다. 즉 공간 내에 통일장 등이 형성되면 상대공간이 탄생하고 동시에 절대공간은 영원히 사멸해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면 절대공간과 상대공간이라는 2개의 공간이 중첩하여 함께 공존할 수도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영화를 상영할 때의 영사막(映寫幕)을 한번 보자. 백색의 영사막 자체를 등방(等方) 단일(單一) 부동(不動)의 절대공간이라고 가정을 해보자. 그럴 경우에 영사막에 나타나는 영상은 상대공간의 속에서 생멸하고 있는 삼라만상으로 이해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비유를 좀 더 한 차원 비약시켜 보자. 2차원의 백색 영사막이 아니라 공간에 영상이 나타나는 상영방법을 생각하여 보자는 말이다. 영화를 상영하기 이전의 원래의 공간을 절대공간으로 가정할 경우에 영사기에 의하여 상영된 영상은 상대공간을 형성하고, 시공(時空)의 4차원의 세계를 현출하게 될 것이다. 영상의 내용에 따라 각양각색의 통일장과 다양한 생물도 등장할 것이다.

이 같은 2가지 사례로 영화가 상영된다고 해서, 2차원의 영사막 자체나 또는 원래의 절대공간이 변질되거나 소멸될 것인가? 영상의 바탕이 되고 있는 영사막이나 원래의 공간자체는 그대로 보존되고 하등의 영향을 받음이 없이 영상들은 통일장과 시공(時空)의 4차원 세계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결론적으로 원래의 절대공간과 상대공간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즉 상영되고 있는 영상은 영사막 자체에는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고서 자유롭게 별개의 세계를 현출시키고 있음이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시공4차원 세계에 현출된 모든 현상과 물체들은 알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투영된 그림자’라고 했다. 과연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투영된 바탕이 된 원래의 모습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이론에 의하더라도 상대공간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절대공간은 그대로 남아 있어야함이다.

불교의 반야심경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불생불멸(不生不滅)·불구부정(不垢不淨)·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는 구절이 있다. 모든 현상(空)의 현상(現象)이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제기한 바와 같이 투영된 현상이 그림자이든 아니든 간에 모든 현상은 실체가 없이 존재(Being)한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공간자체의 경향성으로서 성질의 찰나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러므로 존재(Being)로서 발생하고 소멸함이라 볼 수 없음인 것이고, 태고로 대(大)공간 내에 실체가 있는 그 어떠한 물(物)도 탄생하거나 소멸한 일이 태초에 없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현상들의 찰나적인 생멸(生滅)은 그 본바탕인 절대공간 자체에 아무런 변화나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함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불구부정(不垢不淨)’이 가리키고 있는 지향점인 것이다.

예컨대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은 ‘분필로 칠판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과도 같음이 아닐까? 그림으로 무엇을 그리든지, 그림이 아름답든지 밉든지, 그림이 지저분하든 깨끗하든지 간에 그 그림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칠판자체에는 전혀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과 같음이 아닐까?

여기서 칠판은 절대공간이고 그림은 상대공간이다. 이렇게 절대공간과 상대공간은 영겁을 거듭해 이어가면서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고 뭘까?

□글/노병한:박사/한국미래예측연구소(소장)/노병한박사철학원(원장)/자연사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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