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도큐멘터리-光州-그 비극의 10일간

영화 ‘화려한 휴가’로 1980년 5월 광주에 대해 또 다시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시내 한복판에서 전두환이 저질렀던 그 끔찍하고 처절했던 민족학살극은 27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살아있는 현장’으로서 우리들을 전율케 하고 있다. <시사신문>은 윤재걸, 당시 동아일보 기자의 무삭제 원본 ‘도큐멘터리-光州, 그 비극의 10일간(3백50매)’을 통해 1980년 5월 ‘작전명령-화려한 휴가’로 야기된 광주민주항쟁의 발단과 그 비극적 최후를 지상에다 온전히 펼쳐보려 한다. 그날 숨져간 민주영령들께 다시 한번 명복을 빌면서, 독자 제현의 일독을 바라마지 않는다.

5월18일 오전 9시를 전후, 광주시내 도처에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 무렵, 전남대학교 정문 앞엔 학생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은 “휴교령이 내리더라도 10시에 학교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기억하고 사태추이를 알아보기 위해 평일이나 다름없이 등교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운명의 첫째 날, 5월18일
공수부대의 ‘돌격명령’에 비극 싹트다

그러나 학교 정문 앞에는 이미 공수부대원들이 완전무장한 모습으로 학생들의 출입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오늘은 학교에 들어갈 수 없으니 각자 집으로 돌아가라”고 종용했다. 학생들은 학교 문 앞을 삼삼오오 서성이며 쉽사리 귀가하려 하지 들지 않았다. 30여 분이 지나자 학생들의 숫자는 1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동료들의 수가 불어나자, “점차 겁이 없어지고” 공수부대원들은 긴장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지휘관급으로 보이는 공수부대원이 직접 학교정문 다리 앞까지 나와서 메가폰으로 귀가를 종용했다.
그러나 50여 명의 학생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 난간에 걸터앉아 ‘정의가’ ‘투사의 노래’ 등을 합창하며 ‘계엄군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등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10시를 전후해서 학생들의 숫자가 2~3백명선으로 불어나자, 대치중이던 공수부대 지휘관은 매가폰을 통해 “지금 즉시 해산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해산시키겠다”고 경고를 발했다.
학생들은 더욱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불렀다. 그 순간 갑자기 공수부대 쪽에서 “앞으로 돌격!”하는 명령과 함께 “악!” 소리를 지르며 일단의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비집고 들어와 닥치는 대로 몽둥이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숫자는 7~8명에 불과했지만 공수부대원은 경찰과 전혀 달랐다. 상당수의 학생들이 거꾸러지면서 피를 흘리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인근 골목길로 숨어들었고 사태는 투석전 양상으로 돌변했다. ‘돌비’를 맞으면서도 공수부대원들은 피하려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학생을 겨냥, “끝까지 쫓아가서” 무자비하게 구타를 가한 다음 연행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잡아온 학생들을 옷을 벗긴 채 팬티 하나만 입혀 꿇어 앉혔다. 이렇게 잡혀온 학생들이 삽시간에 6명으로 불어났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들의 ‘비인간적인 진압방식’에 전율을 느끼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극도로 흥분, 시민들과 합세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자는 데로 부지불식간에 의견이 모아졌다.
약 30여 분간에 걸쳐 공방전이 계속됐으나 잘 훈련된 공수부대원들을 학생들이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계속 피해가 늘어나자 몇몇 리더들이 선두에 나서서 상황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이어 “광주역에서 재집결하자”면서 학생들에게 시내진입을 지시했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광주역 앞 광장으로 향했다.
학교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이 보여준 진압방법에 ‘공포감’과 ‘분노’를 동시에 느낀 이들은 보다 짜임새 있는 시위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몇몇 시위주동자들은 광주역에 3~4백명 정도의 학생들이 집결하자, 시민들의 원군을 기대할 수 있는 금남로 도청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을 거쳐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까지 가는 동안 “비상계엄군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번갈아 외쳐가며 시민들의 호응을 유도했다. 특히 이들 학생들은 아직도 많은 시민들이 모르고 있는 김대중씨의 체포 사실을 강조했다.
시민들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호남사람들이 기대를 걸고 있던 김씨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접하자 시민들은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김씨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쉽게 일체감을 이루는 촉매제 역할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떠맡고 있었던 것이다.

금남로의 연좌데모

약 3km(전남대 정문→광주역→공용버스터미널→가톨릭센터)를 순식간에 달려온 3백여 명의 학생들은 피로도 풀 겸 11시경부터 가톨릭센터 앞 금남로 도로상에서 연좌데모에 들어갔다. 학생들의 숫자는 5백여 명 선으로 불어나고 금남로 일대의 교통은 차단됐다. 연좌농성중인 학생들을 빙 둘러선 시민들의 숫자는 대략 2천 여명에 달하고 있었다.
연좌농성에 들어간 지 10분도 채 못 되어 대기 중이던 전투경찰들이 이들을 포위하고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대오는 급작스레 무너지면서 경찰에 의해 많은 숫자가 연행돼갔다. 경찰들의 태도는 엊그제의 횃불시위 당시와는 판이했다.
곤봉세례와 구둣발로 짓이기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를 지켜본 시민들은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하면서 서서히 학생세력과 동화되는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시위에 직접 합세하는 시민은 아직 별로 없었다.
전투경찰의 완강한 저지를 받은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충장로 황금동 불로동을 무리지어 행진하면서 구호를 외쳐댔다. 이날 시위대는 두 방향으로 나뉘었는데, 충장로 쪽으로 향한 시위대열은 황금동→수기동→광주공원→현대극장→한일은행 4거리를 거치면서 5백여 명으로 숫자가 불어났고, 또 다른 시위대열은 광주천에서 광주공고와 동구청을 돌면서 3백명선으로 불어나 있었다.
양 시위대열은 곧 합류하여 공용버스터미널 로타리를 거쳐 시민관 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공용 버스터미널을 지나면서 학생들은 각 지방(목포 여수 순천 해남)주민들에게 광주의 시위사실을 알려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영터미널 안쪽으로 들어간 학생들은 순식간 포위되고, 터미널은 삽시간에 최루가수에 휩싸였다. 헬리콥터가 계속 공중을 맴돌면서 학생들의 시위현황을 무전으로 연락, 학생들은 군·경 합동저지망을 뚫기가 힘들었다. 계림극장 부근까지 피신한 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많은 수가 붙잡혀 곤욕을 치렀다.
마지막 무리를 지은 학생 수자는 겨우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계림극장 부근 탁구장에 숨어들어 다음의 상황을 숙의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중요매개체라는 걸 확인,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다. 오후 1시30분쯤 계림극장을 빠져 나온 이들은 각자 해산형식을 취하고 오후 3시 충장로 우체국 부근의 광주학생운동기념관에서 재집결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들 말고도 시내 곳곳에선 20~30명의 학생들이 함께 모여 산발적으로 시위를 계속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전후, 5월18일의 광주 시가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한 상태를 되찾는 듯했다. 오전의 시위로 인해 중심가 상가들은 대부분이 셔터를 내려고 철시상태로 들어갔다.
한편 오후1시쯤 수창국민학교에는 20여대의 군용트럭이 집결, 공수부대원들을 속속 토해내고 있었다. 그들은 운동장에서 한 두 시간에 걸쳐 작전지시를 받으며 조를 편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무장한 채로 얼굴에는 투석방어용 철망이 부착된 철모를 썼으며, 총은 등에다 비스듬히 어깨총으로 멘 상태였다. 한손에는 대검을, 다른 한손에는 곤봉을 들고 있었다. 이들은 오후 2시가 지나면서부터 시외버스터미널을 시작으로 시내 곳곳으로 분산돼 진압작전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에 포위된 시위군중

학생 ‘시위조’들은 (아직 ‘시위대’에 이르지 못했다) 오후2시 이후 시내 중심가와 공원 앞 광장에 집결, 학생회관 앞길과 황금동 콜박스로 서서히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보를 선취한 경찰이 대기 중에 있어 학생들은 주로 충장로 5가 부근의 파출소와 태평극장 사이로 몰려들었다.
오후 3시. 학생 ‘시위조’들은 5백여 명의 ‘시위대’로 불어났다. 그들은 구호와 함께 산발적인 투석전을 벌이며 시민과 미참여 학생들을 끌어들이는 작전을 폈다. 공원 주위에서도 3백여명의 학생들이 투석전을 벌이며 경찰과 대치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오후4시가 가까워오면서 학생 시위대는 1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애초에 약속했던 광주학생회관 앞으로 밀고 들어갔다. 20~30명의 경찰들이 지프를 중심으로 긴장을 풀고 서 있다가 학생들이 몰려오자 혼비백산해 도망쳐버렸다.
학생들은 경찰들이 남기고 간 장비를 남김없이 부셔버렸다. 한 학생이 무전기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자 다른 학생이 큰 돌멩이를 들어 박살을 내버렸다. 다 부서지다시피 한 가스 지프에 불을 붙이고 옆으로 넘어뜨렸다. 불길과 함께 연기가 치솟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날 오후의 시위는 오전보다 훨씬 밀도 있게 전개돼 갔다. 오후 2~3시를 넘기면서부터 시위대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시위의 물결은 보다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양상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가로변의 시민들은 시위학생들에게 음료수와 빵 등을 공급, 무언으로 격려했다. 시위대가 점차 불어나고 구호의 내용이 격렬해지면서부터 시민들 중 상당수는 직접 학생들의 대오에 참여하기도 했다.
거의 1천5백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광주천변을 지나면서 공원부근에 집결해 있던 5백여 명의 또 다른 시위대와 맞닥뜨렸다. 환호성이 터져 올랐다. 이들은 합세해서 광주천변 도로를 따라 황금동 입구의 구시청 부근으로 나아가 충장로 입구와 도청 앞으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경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시위대는 도교육위 쪽으로 방향을 선회, 돌을 던지며 “어용 교육집단”이라고 규탄했으며 인근의 호화주택(화천기공사 사장 저택으로서, 개인집으로는 가장 호화주택으로 알려져 있다)에 일제히 돌을 던지기도 했다.
시위대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곳은 동명파출소였다. 파출소는 이내 폐허로 변해버렸다. 정부 주요인사의 사진을 비롯한 집기 대부분이 밖으로 내던져지고 불길에 휩싸였다. 경찰용 오토바이 2대와 자전거 2대, 그리고 전화기를 비롯한 기물과 서류 일체가 도로 한가운데서 불타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40여 명의 경찰을 포로로 잡아 동명로 입구 청산학원 부근에 이르렀을 때, 3백여 명의 경찰 저지병력과 부딪쳤다. 시위대와 경찰은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소득은 없었다. 협상이 결렬된 오후 4시40분쯤, 갑자기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포위, 학생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경찰과 합세하여 학생들에게 곤봉으로 ‘본때’를 보여주었다.
우선 곤봉으로 어깨쭉지와 머리통을 난타, “학생들이 쓰러지면 2~3명이 함께 달려들어 군화발로 머리를 차고 밟고 하면서, 특히 얼굴을 앞으로 돌리게 하여 그대로 전면을 군화발로 짓밟았다. 곤봉으로 쳐서 피가 낭자하게 돼 실신하면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 움켜쥐고 들어 올려 차량위로 쓰레기 치우듯 던져버리더라”는 것. 시위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버렸으며, 이를 지켜본 주위 시민들은 모두가 발을 동동 굴렀다.
경찰병력에 밀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안쪽으로 몰린 시위대에게도 강압적인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오후3시쯤, 공수대원들이 이들을 향해 투입되었다. “이들은 3~4명이 1개조가 되어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 청년이면 무조건 붙잡아 M-16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때리고 사정없이 구타하고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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