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역학(易學)의 3대 구성요소는 천문역경·풍수지리·인사명리

노병한 칼럼니스트
노병한 칼럼니스트

[노병한의 사주산책] 우주를 지배하는 2가지의 율법은 시간과 공간의 질서이다. 동양철학에서 시간을 연구하는 학문분야는 역(易)을 중심으로 하는 천문역경(天文易經)철학이고, 공간을 연구하는 학문분야는 풍수지리(風水地理)학이다. 이를 인간의 일에 적용하기 위해 발전된 학문이 인사명리(人事命理)학이다.

그래서 동양역학(易學)의 3대 요소가 바로 천문역경·풍수지리·인사명리로 구성되어 있음이다. 다시 말해 천문역경(易經)철학은 시간을 연구하는 것이고, 지리풍수(風水)철학은 공간을 연구하는 것이며, 인사명리(命理)철학은 인간의 타고난 근본 바탕과 그 행태인 행동이론을 연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공간에 대한 궁금증에 다가가 보려고 한다. 공간이란 과연 그 실체가 뭐고 또 그 본래적인 성질은 어떠할까? 동서고금의 철학서나 과학서를 모두 다 뒤져보아도 현대인으로서 공간에 대해 충분히 만족할 만한 해답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는 게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서 특기할만한 사정이 생겨났다. 과거에는 공간을 시간과 따로 분리·독립시켜 3차원으로만 생각하였던 것을 20세기에 들어와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공간에 시간을 결부시켜 시공(時空) 4차원의 세계를 주장했기 때문에 더더욱 궁금증이 더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주장한 이 4차원의 시공(時空) 세계는 시공에 대한 물리적인 단면만을 논했을 뿐이어서, 아직까지도 공간이나 시간 그 자체에 대한 지적(知的)인 수수께끼와 갈증이 대부분 가시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첫째 가장 먼저 전일(全一)과 부동(不動)의 성질을 가진 공간(現象) 자체는 절대공간이다. 뉴튼이 주장했던 절대공간이론을 여기에 소개하려함이 아니다. 여기서 언급하려고 함은 뉴튼의 절대공간이론과는 전혀 다른 근거와 논리로 절대공간을 부정하면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강조한 상대성이론을 언급하려고 함이다.

결론적으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주장한 상대공간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논리이다. 그렇다고 상대공간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또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공간에 대한 의문과 함께 공간이 지닌 그 수수께끼를 한번 풀어보자는 말이다.

우선 공간의 <장(場)이론>을 전제하지 않는, 정적인 상태에서 순수한 공간의 자체만 검토하여 본다면 다음과 같은 전제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 공간은 등방(等方)이다. 즉 공간은 동서남북이든 상하든 어느 부위든지 모두 동일하다는 전제를 할 수 있다.

둘째. 공간은 전일(全一)하다. 즉 우리 인간이 속해있는 대우주와 그 외부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광대한 태원(太原)의 공간까지 포함하여 모든 공간은 그 전체가 하나의 단위로서 형성되어 있다. 즉 2개 이상의 부분이 결합 또는 접촉하여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가 하나로 되어 있다는 전제를 할 수 있다.

셋째, 공간은 부동(不動)이다. 즉 공간은 전체이든 그 일부분이든 장소적으로 이동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장소적 이동이란 상대적인 표현이다. 전체의 공간이 유일무이하게 하나의 단위이므로 공간 전체의 장소적인 이동에 대해 비교할 상대가 없음이다.

또한 하나의 단위인 공간의 일부가 장소적으로 이동한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다. 이는 공간의 일부가 분할될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성립할 수 없는 이론이다.

인간은 수십만 년 간 감각기관을 통해 감지하고 실험하고 경험한 습성으로만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과 함께 공간 그 자체도 이동할 것이 아닌가하고 속단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장(場)이론을 떠나서 관찰하여 본다면 순수한 공간의 일부가 이동할 수 있다함은 사리(事理)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불교의 법성게(法性偈)에서는 ‘제법부동(諸法不動) 본래적(本來寂)’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법(法)이란 용어를 여러 의미로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법(法)은 현상(現象)’이라는 의미이고 ‘현상(現象)은 공간(空間)의 성질(性質)’이므로 결국 ‘법(法)은 삼라만상의 근원인 공간’을 지칭하고 있다고 풀이해야 바를 것이다.

그러므로 제법부동(諸法不動)이란? ‘공간(法) 그 자체는 부동(不動)’이라는 뜻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 같은 공간(法)의 부동(不動)의 성질을 가진 공간(現象) 자체를 절대공간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공간은 누가 왜 어떻게 존재하게 하였을까하는 의문이 생겨야 당연한 일이다. 공간은 실체가 없으며 물(物)이 아니기에 가공된 피조물(被造物)이 될 수 없다. 공간뿐만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그 어떤 물체도 역시 제3자로 인한 피조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주내의 모든 삼라만상은 생명체를 포함하여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공간은 공(空)한 상태로 자연 그대로 영겁동안 꿈쩍하지 않고 단지 그곳에 있을 뿐이다. 과거에도 그대로 그곳에 있었으며, 현재도 역시 그 모습 그대로 그곳에 있으며, 미래에도 또한 변동과 변함없이 그대로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절대공간의 자연 그대로 본래 모습인 것이다.

공간(空間)은 무(無)와는 달리 준별(峻別)되어야 한다. 무(無)는 절대무(絶對無)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은 일정한 성질과 성능을 지니고 있는 그 어떤 무엇(Something)이기 때문에 절대무(絶對無)라고만은 볼 수가 없다.

이렇기에 공간(空間)은 무(無)라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공간(空間)을 존재의 범주 속에 넣어 유(有)라고 해석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공간은 무(無)도 아니고 유(有)도 아닌 위치에 놓여 있다.

공(空)을 인도의 고어(古語)인 산스크리스트어로 ‘Sunya 또는 Sunyat’라 쓰고 있다. ‘Sunya’는 형용사로 ‘속이 텅 빈’ ‘부풀어 오른’ ‘공허한’ 등의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 그리고 ‘Sunyata’는 명사로 ‘공한 것’ ‘공성(空性)’ ‘영(零)’ 등의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공(空)의 본래 의미는 ‘부풀어 오른 모양으로 속이 텅 빈 현상’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공(空)은 역시 무엇인가 충만 되어있는 공(空)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Sunya 또는 Sunyata’를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해 옮기려니 적절한 단어가 없어서 ‘빌 공(空)’자로 쓴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자의 ‘빌 공(空)’자에 얽매어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경계인 셈이다.

그러나 한자의 공(空)이라는 글자도 파자(破字)를 한번 해보자. 가만히 들여다보니 구멍 굴(穴)의 속에 공(工)자가 들어 있음이 아닌가? 공(工)은 장인(匠人)이 공작(工作)·공역(工役)·공사(工事)·공예(工藝) 등을 한다는 뜻이려니 이는 바로 ‘허공 속에서 일체의 삼라만상이 일어난다는 뜻’이 공(空)이라는 글자 속에 품고 있음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易學에서 보는 공존하는 절대공간과 약동하는 상대공간?>에서 계속.

□글/노병한:박사/한국미래예측연구소(소장)/노병한박사철학원(원장)/자연사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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