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도큐멘터리-光州, 그 비극의 10일간

영화 ‘화려한 휴가’로 1980년 5월 광주에 대해 또 다시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시내 한복판에서 전두환이 저질렀던 그 끔찍하고 처절했던 민족학살극은 27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살아있는 현장’으로서 우리들을 전율케 하고 있다. <시사신문>은 윤재걸, 당시 동아일보 기자의 무삭제 원본 ‘도큐멘터리-光州, 그 비극의 10일간(3백50매)’을 통해 1980년 5월 ‘작전명령-화려한 휴가’로 야기된 광주민주항쟁의 발단과 그 비극적 최후를 지상에다 온전히 펼쳐보려 한다. 그날 숨져간 민주영령들께 다시 한번 명복을 빌면서, 독자 제현의 일독을 바라마지 않는다.


1980년 5월, 10·26 직후의 혼란기를 한 고비 넘긴 우리사회는 새로운 위기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군부의 정치세력화 조짐에 대한 반발이 학생운동권으로 하여금 정치 중심부에로의 진입을 가속화 하고 있었다.

암울했던 ‘사태’의 전야

5월에 들어서면서 서울대를 비롯한 학생운동권은 학생들 스스로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급속한 변화에 돌입하고 있었다. 5월2일에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개최된 ‘민주화 대총회’에 1만여 명에 가까운 서울시내 각 대학생들이 결집한 것도 그중 하나였다.
이후 10여 일간 계속된 이른바 ‘민주화 성회’를 통해 학생들은 운동을 지구화한다는 전략을 수립, 이를 바탕으로 ‘참 민주화’의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5월13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는 서울시 6개 대학생 2천5백여 명이 집결, ‘계엄철폐’를 외치며 본격적인 가두시위에 돌입했고, 그 이튿날(14일)은 전국 37개 대학이 일제히 가두로 뛰쳐나와 민주화 열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정부당국은 이에 대해 경고와 회유를 병용, “중동을 방문 중인 최규하 대통령이 귀국하면 확실한 정치일정을 밝히겠다”며 거듭 학생들의 자제를 촉구했다. 그러나 대다수 시민들과 학생들은 당국의 저의를 의심하였고, 시위대는 경찰차를 불태우는 등 점차 가열, 연 3일째 야간 가두시위가 계속되었다.
중동을 방문 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은 당초의 예정보다 앞당겨 5월16일 급거 귀국했다. 최대통령은 귀국 즉시 청와대에서 시국과 관련한 비상대책회의를 소집, 심야회의를 가졌다. 밤 11시부터 1시간 동안 계속된 이 회의에는 김종환 내무, 주영복 국방, 이희성 계엄사령관,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참석, 우여곡절 끝에 18일 0시를 기해 확대비상계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10여 일간의 ‘민주화 성회’ 이후, 서울시내 각 대학들은 5월16일에 접어들면서 어느 정도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서울시내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이날 모임을 갖고 “우리의 의사가 충분히 전달 것으로 보인다”면서 교내 및 가두시위를 일단 중단하고 시국의 추이를 관망,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자는 데 합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는 전혀 예외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학생시위가 전국적으로 소강상태로 접어들 무렵, 광주에서는 5월16일 전날보다 훨씬 더 많은 3만여 명의 학생·시민이 도청 앞 분수대에 모여 횃불시위를 벌였다.
당시 전남대학교는 전국의 어느 대학보다도 일사불란한 조직체계를 확립 “박관현 총학생회장(법대 행정학과 3년)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고 한다. 특히 박관현 회장의 탁월한 선동성 대중연설은 학생들은 물론 광주시민들로부터도 화제를 불러일으킬 만큼 “논리와 신념에 가득 차 있었다”는 것.
전남대학교는 80년 3월, 31명이나 되는 ‘문제의 복적생‘을 안게 되었는데, 이들은 ‘어용교수문제’와 ‘유신세력 척결 문제’에 대해서 끈질기리만큼 치열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총학생회와 복적생들은 한 치의 틈도 없이 합일된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고 당시의 학생회 한 관계자는 회고했다.
그러나 조선대학교는 10·26이후 결성된 민주회복추진위원회가 학교측의 끈질긴 방해공작으로 총학생회조차 제대로 구성하지 못한 채 5월을 맞고 있었다.
서울지역의 ‘민주화 성회’가 불붙기 시작한 5월13일, 전남대·조선대 학생들은 서울시내 6개 대학생들의 가두시위에 자극받아 5월14일을 새로운 기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거기다가 5월15일 서울역 광장에서 벌어진 ‘30개 대학 총10만 여명의 대규모시위’는 광주의 SM권(학생운동권)에 커다란 자극제가 됐다. 그런 의미에서 ‘5·18광주사태’는 그날부터 며칠 거슬러 올라간 5월14일부터 이미 불꽃이 일었다고 봐야 할 터였다.
5월14일 오후 1시, 전남대학교 도서관 앞에 집결한 1만 여명의 학생들은 가두진출을 시도, 정문 앞에서 기동경찰대의 완강한 저지에 직면하자 일단 후퇴하여 총학생회 지휘아래 각 단과대학별로 담당구역을 설정하고 분산적으로 가두진출을 감행했다.

5·16 횃불시위와 경찰의 대응

시위대는 여러 갈래로 흩어져 오후 3시경 도청 앞 분수대를 장악 ‘민주화 성회’를 개최했다. 성명서가 낭독되는 동안 시민들도 숙연한 자세로 경청, 궐기대회를 마친 학생들은 ‘의기양양하게’ 학교로 되돌아와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5월15일의 가두진출은 의외로 별다른 저항 없이 이뤄졌다. 도청 앞까지 무난히 진출한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생 등 1만6천여 학생시위대는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비상계엄 해제’ 등을 요구하며 ‘민주화 성회’를 개최했다.
이날 모임에서는 전남대의 ‘시국성토문’ 낭독에 이어 광주교대,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의 ‘시국선언문’ 전남대의 ‘대학의 소리’ 전남대-조선대 학보사의 ‘결의문’ 광주교대의 ‘시민에게 드리는 글’ 등이 차례로 낭독되었으며, 전남대 총학생회에선 교수들에게 ‘민주화 동참’이란 글자가 쓰인 리본을 가슴에 달아 주었다.
학생들이 요구하는 주 내용은 ‘비상계엄 즉각 해제’와 ‘노동3권 보장’ ‘정치일정 단축’ 등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학생과 시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질서정연한 시위 자세를 견지했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이 고장 출신의 김준태 시인은 전했다.
5월16일은 열아홉 돌을 맞는 5·16군사쿠데타의 날이자, 광주를 제외한 서울과 다른 지역에선 시위중지를 결정한 날이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학생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도청 앞 분수대에 진출, 시국성토대회를 벌였다.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 조대공전 동신실업전문 송원전문 성인경상전문 기독병원 간호전문 서강전문대 등 광주시내 9개 대학과 전문대생 3만 여명은 이날 오후 3시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대학별 학생대표들이 작성한 ‘제2시국선언문’을 낭독한 데 이어 복적생을 대표한 정동년씨(당시 38세·전남대 공대 화공과 4년)가 ‘시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학생들은 오후 6시30분부터 분수대 주위를 돌며 시위에 들어갔다. 8시경엔 다시 모여 ‘계엄철폐’ 등의 구호와 함께 ‘정의가’ ‘투사의 노래’ 등을 합창하며 야간 횃불시위로 돌입했다.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4백 여개의 횃불과 각종 구호가 쓰인 플래카드, 피켓을 들고 조선대생들을 선두로 한 1개조는 금남로→유동 3거리→복개상가→중앙여상→현대극장을 거쳐 다시 금남로로 되돌아 왔으며, 전남대를 선두로 한 또 한 개조는 광주체신청→산장입구→산수동 5거리→동명파출소→노동청 등을 거쳐 다시 출발지인 도청 앞 분수대로 집결, ‘5·16 화형식’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한가지 특기할만한 사실은 경찰들이 보여준 대응자세. 횃불시위 과정에서 경찰들은 사고방지를 위해 학생회 간부측과 상호협조적인 자세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러한 대응은 서울을 비롯한 타지방의 학생시위에서 보여준 경찰들의 자세와는 판이하게 다른 면이었다. 이날의 시위에 대해 한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이날의 시위는 바로 몇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처절한 사태를 암시하듯, 태풍전야의 고요함과 평온함으로 일관되었다. 시민들은 학생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감동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흥분된 모습을 감추지 못한 채 횃불시위대의 행렬을 따라 길 양옆으로 질서정연하게 함께 행진함으로써 학생들과 의식의 연대감을 보여주었다…”.

공포의 밤, 5·17

이날 시위를 종결하는 과정에서 학생지도부는 “연일 계속된 피로를 풀고 전국의 타대학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시국의 추이를 관망한 뒤” 월요일인 5월19일 다시 성토대회를 갖기로 약속하고, 밤 10시30분쯤 자진해산 형식으로 시위를 종결했다. 이와 함께 휴교령이 내려지면 즉각 오전 10시에 전남대 정문 앞으로 모일 것도 약속했다.
한편 전국 55개 대학 대표 95명은 이날(5월16일) 오후5시30분부터 이화여대에 모여 제1회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회의를 열고, 최근의 정세분석과 학생운동방향을 토의했다. 이 회의는 다음날까지 마라톤으로 계속되었으나 뚜렷한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서울과 여타 도시의 이와 같은 진정된 분위기와는 달리 광주시는 며칠 전서부터 고조되기 시작한 흥분과 긴장감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심상치 않은 몇 가지 조짐들이 포착되기도 했다. 16일 광주 외곽 고속도로에선 공수부대 병력을 실은 군용차 행렬이 많은 시민들에 의해 목격되었다.
5월17일 오후. 전남대 총학생회장단은 서울의 급박한 사태에 접하고 (“서울의 대학생회장단이 모두 당국에 연행돼 갔으니 알아서 처신하라”는 긴급 전화연락을 받음), 일단 무등산장으로 모두 몸을 피했다. 이들은 밤 9시쯤 시내 중심가에 있는 대지호텔로 피신처를 옮기고 서울에 몇 차례 연락을 시도했으나 불통이었다. 이들은 사태의 긴박감을 재차 확인, ‘각자가 알아서 피신할 것’에 합의했다. 일단의 경찰이 대지호텔을 급습한 것은 이들이 흩어진 1시간쯤 뒤였다.
5월17일 밤 11시40분, 이규현 문공장관은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실시 한다”고 발표했는데, 이보다 앞선 밤 11시를 전후, 광주시내 곳곳에선 민주화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던 다수의 인물들이 예비검속 돼, 연행되고 있었다. 서울에서도 이날 밤 김대중씨를 비롯한 26명의 재야인사와 구공화당계 정치인들이 체포되었다.
광주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1980년 봄에 복귀했던 전남대 복적생 정동년 하태수 박형선 문덕희 김상윤 박선정(전남대 인사대 학생회장) 윤목현(자연대학 학생회장)과 조선대 복적생 유재도 유소영, 그리고 교수 2명이 군부대로 연행돼 갔다.
이로부터 두 시간 뒤인 5월18일 새벽 1~2시 무렵, 전남대와 조선대 캠퍼스엔 공수부대원들이 진주했다. 당시 두 대학에는 16일의 횃불시위 등 연이은 시위로 지친 많은 학생들이 피곤한 몸으로 농성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학교에 계속 머물면서 정부 당국의 반응과 정세 추이를 예의 관망하고 있었다.
18일 새벽, 일단의 공수부대원의 급습을 받은 학생들은 ‘미처 손쓸 겨를도 없이’ 이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와 군화발에 짓이겨졌다. 대부분의 학교 잔류학생들은 학교본부 건물에 감금되었고, 몇몇 운이 좋은 학생들은 강의실 옥상 변소 등을 통해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대학교뿐만 아니라 광주시내 주요관공서와 요소요소의 거리에도 경찰과 전경 군인 공수부대원들이 배치돼 있었다.
동이 트면서 광주시의 공기는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시민이나 경찰들 모두의 표정은 한결같이 굳어 있었다. 평소처럼 출근길에 나선 많은 젊은이들은 요소요소에서 당하는 불신검문에 약간의 저항을 보이긴 했으나 별다른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폭풍전야의 정적’ 바로 그것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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