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공수부대원의 수기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하면서 광주항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함께 했던 이들은 영화를 보고 눈물짓고 다시 분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만 광주항쟁을 접하게 된 이들도 광주항쟁에 대한 기억을 새로이 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뜨거웠던 5월의 어느 날 광주에서 벌어진 사투와 절규. <시사신문>은 광주항쟁 당시 투입됐던 한 공수부대원의 수기를 통해 그 때를 기억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윤재걸씨의 소설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의 배경이 된 공수부대원의 수기를 지면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다시 요약 정리한 것이다.

역사의 비극이요, 우리 민족의 비극이요, 세계인이 한국은 몰라도 광주하면 코리아를 떠올린다는 광주의 비극은 성큼 다가왔소.

비극의 시작 1980년 5월18일

1980년 5월18일 오전 10시쯤 우리 공수부대원들은 조선대학교 종합연병장에서 약 1백대의 차량에 각 중대 1대씩 탑승하였소. 차량이 전남대 정문에서 금남로, 시외버스터미널을 지나 아세아극장 앞에 도착했을 때 차량에 무전이 오더군요. 쓰고 있던 베레모를 벗고 방탄 헬멧으로 바꿔 쓰라는 지시는 곧 차량에서 하차를 의미하고 어디선가 시위대와 맞닥뜨려 시위진압을 의미한다는 걸 사전교육을 통해 저희는 잘 알았답니다.
금남로를 단숨에 달려가 관광호텔 앞에 정차를 하니 잠시 시간이 흐른 뒤 “하차”하는 명령이 하달되더군요. 이 명령이 곧 우리 귀에는 “무자비하게 젊은 사내는 두들겨 패라”는 지시로 들렸습니다. 그 금남로의 비극은 1980년 5월18일 10시 30분쯤 이미 시작되었답니다.
차량에서 하차하니 이미 다 시위대는 뿔뿔이 도망치고 모두다 그 근처 건물을 수색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때 나는 관광호텔 뒤에 있는 호텔을 7~8명이서 수색하기 위해 갔더니 철문이 닫혀 있더군요.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안 열어주니 담을 타고 다른 사병이 넘어 들어가서 철문을 여니 몇몇 종업원들이 우르르 나와 우리 집에는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요.
차라리 뒷문을 통해 피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 개새끼들이 겁 대가리 없네”하면서 일부는 때리고 일부는 진압봉으로 구타를 시작했습니다. 4~5명의 종업원이 불과 2~3분 사이 하얀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는 간 곳이 없이 시멘트 바닥 위를 나뒹구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일으켜 세워서 벽에 뒤로 기대게 하자 마침 지역대장 소령이 오더군요. 그는 종업원들의 무릎을 꿇게 한 다음 신고 있던 군화발로 있는 힘을 다해서 얼굴을 한 번씩 차는 것이었습니다.
모진 것이 사람의 목숨이었습니다. 얼굴은 뭉개지고 피는 쏟아지고 군화발의 충격으로 인해서 뒷머리를 시멘트벽에 그토록 강하게 부딪쳤지만 쓰러진 사람은 없더군요. 다만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얼굴로 변했지요. 각 객실을 수색해 젊은 사람은 무조건 밖으로 집합시켰습니다. 저희하고는 대화가 필요 없었습니다. 무조건 무자비한 구타요, 연행 이외의 방법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붙잡힌 시민들은 한차례 구타가 시작됐습니다. 도망을 못 가게 한다는 이유요, 기를 죽인다는 이유였습니다.
다음 차례는 무조건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차고 있던 본인의 혁대로 뒤로 손을 묶고 묶인 손으로 자신의 벗은 옷을 들고 저희가 타고 왔던 트럭 옆으로 끌려가서 다른 연행자와 함께 금남로 도로 한가운데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등 혹심하게 기를 죽이고 트럭에 탑승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차량은 조선대학교 종합운동장을 이동했고 그들을 차량에서 하차시켜 다시 기합과 구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시위를 하였던 하지 않았든 젊은 사람이라는 죄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한번 붙들리면 3~4차례 극심한 구타와 기합 등으로 인간의 한계를 지나버릴 정도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 따랐습니다.

광주, 총성 울리다

19일, 전날과 조금도 다름없는 진압작전이 이어졌습니다. 진압한 이들 중 반항하는 이에게 진압봉 세례가 이어지는 동안 2~3명은 구석에서 거의 숨을 거둬가고 있었습니다.
광주시는 시위대로 덮여 이제는 저희들도 서서히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위대를 물리치고 아세아극장 앞쪽으로 도로를 장악하고 진격했답니다. 아세아극장 앞에서 또 시위대와 맞닥뜨려서 또 한 차례의 결투를 벌이고 진격을 하는데 통신병이 다급한 무선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광주고교 앞에서 지위를 하던 작전장교가 장갑차와 함께 고립 포위돼 있으니 빨리 오라는 무전이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저희 팀이 달려가니 M16소총 소리가 자동으로 20여 발 쏘는 소리가 연달아 나는 것입니다. 광주 투입 후의 첫 총소리였습니다. (이 총성은 장갑차를 타고 조선대로 복귀하던 작전장교 모 대위가 사고로 장갑차가 꼼짝을 못하게 되고 시위대가 던져넣은 화염병에 질식될 위기에 처하자 M16공포를 쏘는 과정에서 난 소리였다. 이때 고교생 1명이 목에 총을 맞아 최초로 ‘발포’ 사망하게 된다.)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시민들도 시위대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80만 광주시민 모두가 저희를 적으로 간주하고 구멍가게에서 담배도 팔지 않으려고 하고 빵으로 식사를 대신 때우고 뛰어다니면서 시위 진압을 하자니 힘도 빠지고 지칠 대로 지친 육신이었습니다.
20일 아침 무전으로 하달된 지시에 따라 충장로에서 시위대에게 “어제까지 여러분을 때리고 가혹하게 했던 병력은 밤새 교체됐고 우리는 새로운 병력”이라고 외치면서 귀가를 종용하고 북괴군이 남침을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거짓말하지 마라” “너희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있던 살인박쥐다”라는 말을 외치며 우리를 포위했습니다. 무서운 격투가 시작됐고 저는 허리와 어깨 등을 각목으로 맞아서 걷기도 힘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시위대로 부딪치면 겁이 났습니다. 그리고 살아야 하기에 더욱 악이 생기고 수많은 시위대와 충돌하면 이제는 아무 곳이나(머리) 진압봉으로 폭행하는 사례까지 속출했습니다. 시위는 끝이 없었고 우리도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약 2천명이 넘는 특전사 병력과 전남에서 차출된 경찰병력으로 시위를 진압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습니다. 아니 수십만명의 병력이 광주에 온다고 해도 광중 시민의 분노는 삭힐 수 가 없었습니다. 시민의 분노는 너무나 커졌습니다.

그대의 핏물, 나의 핏물

시위대는 이제 남녀노소 누구나 참석했습니다. 손에는 흉기가 될 만한 것은 다 들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처음 우리의 구타에 치를 떠는 시민들이라 당연했습니다. 저녘나절이 되자 시위는 온 시가지를 덮고 있었습니다. 애국가를 부르고 “계엄군은 물러가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조선대학교로 임시 철수하기로 하고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MBC문화방송국과 세무서 등이 불에 탄다고 문화방송국 앞으로 출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뛰어갔습니다. 시위대와 대치한 문화방송 앞은 ‘피의 바다’였습니다. 분노에 찬 시위대, 대항해서 싸우는 저희. 무장을 하고 무서운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끝이 없는 시위대, 지칠 대로 지친 육신, 배고픔, 수면 부족, 군중들의 고함소리, 불타는 차량들, 건물, 모든 것의 주위는 지옥 그대로였습니다.
“도청 앞으로 철수”하라고 해서 도청만을 사수할 때였습니다. 세무서 앞에서 시위대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하는데 갑자기 마이크가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 모두 ○○○부대 놈들을 찢어죽입시다” “살인마 ○○○은 물러나라” “○○야 내 자식 살려놓아라”
여자의 음성은 밤하늘 아래 시민에게는 슬픔과 울분, 분노 등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전율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전옥주라는 여인의 선무방송 소리에 나도 이곳을 이탈해 집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내 고향에서 이래야만 하는지 몰랐습니다.

죽음과 죽음과 죽음

5월21일 10시 금남로의 상황은 이미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달리고 있었습니다. 약 80만의 광주시민 중 40만이 금남로나 도청 주위에서 시위를 한다고 했습니다. 왜 그토록 많은 시민이 모였을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강경진압에 시민들이 무서운 힘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건은 오후 1시쯤 일어났습니다. 도로 한가운데서 시동을 걸고 있던 장갑차가 잠시 시동을 끄자 시위군중이 일제히 차량을 앞세우고 돌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가 몰고 왔던 장갑차가 2병의 병사가 치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참한 죽음을 많은 병력이 보았습니다. 흥분한 모 장교가 “사격 해버려” “사격!”하고 고함치자 일제히 실탄을 총에 삽탄시키고 금남로쪽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수천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거의가 공중으로 쏘는 공포였습니다.
하지만 곧 저격수들이 건물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시위대는 쓰러져갔습니다. 모든 것이 생지옥이었습니다. 여기저기 살상자가 도로에 누워 있었습니다.
얼마 후 철수명령이 하달돼 팀 단위로 철수하게 됐습니다. 철수과정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야간에도 산을 타며 철수를 했고 가슴 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산에서 사태를 파악하고 있을 때 산 아래서 시위대 13명을 사살하고 3명의 부상자를 데리고 온다는 무전이 왔습니다.
잠시 후 리어카에 2명을 싣고, 1명의 여고 2년생이 오른손에 총상을 입어 손가락이 2개가 잘린 상태로 왔습니다. 모진 것이 인간의 생명이라고 했던가. 2명의 젊은 시위대는 온몸에 수많은 실탄을 맞았건만 정신도 확실했고 살아 있었습니다. 특히 한 젊은이는 눈에 총알이 관통했는데도 살아 있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살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헬기로 군병원으로 이송할 줄 알고 헬기를 기다리는 줄 알았더니 ○소령이 오더니 “저 새끼들 뭐하러 데리고 왔어, 빨리 밑으로 데려가 죽여 버려”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뒤따라갔습니다. 최소한 병원에 이송 치료해주기 바랐고 살상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죽일 필요 없다. 다시 시위대에게 보내자”라고 말하자 “이 자식 왜 그래 임마, 너도 똑같은 놈이네”하는 소리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머리에 다시 3발씩 사격을 실시하는 것입니다. 꿈틀거리거나 비명 등 아무 소리도 없었습니다. 오직 시체가 떨고 있을 뿐….
23일부터 광주시 전역에 참모총장 명령이 라디오를 통해 하달됐습니다. 모든 총기를 반납하고 ‘폭도’는 자수하라는 소리였습니다. 누가 폭도인지 모르겠고 누가 누구를 학살했는지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써온 광주사태는 제가 혼자 느끼고 보고 행동했던 사항을 적은 것입니다. 많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았지만 사태진압은 저와 비슷했습니다. 지금 생각건대 시민에게 ‘폭도’라는 누명을 벗기고, 그때 핵심인물은 모든 것을 공개하고 사과하고, 사태진압에 투입됐던 계엄군과 시민이 다시 만나서 화해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나는 생각하오. 시민도, 계엄군도 모두가 현재는 피해자이기 때문이죠. 처음 과잉진압, 무자비한 구타로 광주사태는 불을 당겼고 고위층의 사과가 없이 계속 포고령 등으로 시민의 요구조건은 묵살했음으로 시민은 총을 놓지 않고 무력진압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원한에 차 있는 사태의 피해 입은 광주시민 여러분께 깊은 반성과 사과를 드리면서 삼가 이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윤재걸의 '작전명 화려한 휴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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