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간에서 펼쳐지는 ‘기기묘묘한 이야기’

밖으로는 전쟁과 제국주의의 포화가, 안으로는 모던과 신문물의 유입이 끊이지 않았던 1942년 경성. 거리마다 자유연애를 즐기는 젊은이들로 넘쳐나고 서구문물의 혜택을 누리려는 부르주아들의 향락은 절정에 이른 반면, 청계천 주변으로는 빈민들이 모여들고 무능한 지식인 룸펜들의 담배 연기가 짙어져 가는 1940년대. 끔찍스러울 정도로 이질적인 문명들이 한데 부딪치며 내는 혼란과 ‘현대화’에 대한 무모한 경외가 공존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공포스릴러물이 관객들을 찾아간다.

얼마 전까지 1930~40년대는 일제 강점과 독립투쟁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등장하지 못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닫혀 있는 역사관에서 조금만 틀어 보면 그 시대에도 불륜 도피 행각이나 낭만에 취한 젊은이들, 끔찍한 살인 등 현재와 다를 것 없는 사건들이 분명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이러한 열린 시선이 가져다 준 다양한 시대적 변주는 이 시대를 무궁무진한 이야기와 풍성한 감성이 가득한 공간으로 주목받게 했고 늘 새로운 소재를 찾는 충무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영화적 공간으로 다가가고 있다.

1942년,공포로 물들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 시대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영화들이 여러 편 제작되고 있고, 그 가운데 <기담>이 첫 크랭크 인에 들어갔다. <기담>은 누구도 실제 보지 못했던 매혹의 ‘경성’을 배경 위에 ‘공포’라는 장르를 하나 더 얹혀 낸 보기 드문 수작.
낮엔 최신식 건물 사이로 아름다운 벚꽃이 휘날리는 활기찬 거리로 보이지만, 밤엔 전차줄과 전기등이 얼기설기 들어서 있는 모습의 경성 시내 풍경. 정체 모를 이질감을 안겨주는 경성의 이중적인 모습은 그 공간 자체만으로도 기묘함을 자아낸다.
혼란과 매혹이 공존하던 경성을 극단의 공포가 발생하는 영화적 공간으로 선택한 <기담>. 미지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공포 <기담>은 예측할 수 없기에 더욱 증폭되는 호기심과 두려움을 담고 그간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공포를 선사하게 될 것이다.
섬뜩한 러브 스토리가 시작된다

현대인들이 실제로 겪어 보지 못한 시대에서 벌어지는 공포라는 점에서 더욱 호기심을 자아내는 <기담>은 ‘사랑이 야기한 끔찍한 공포’라는 점에서 그 색다름에 방점을 찍는다. 그간 ‘슬픈 공포’를 다룬 영화들이 있었지만 사랑이 불러온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이 결국 원혼과 저주로 귀결되는 뻔한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기담>은 공포의 모티브이자 귀결점을 ‘사랑’으로 놓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과는 다른 공포의 틀을 제시한다. 치정 어린 애정 복수극이 아니라 사랑과 죽음이 뒤엉킨 순간에 발생하는 비극에 초점을 맞춘 <기담>은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해야 할 시간에 가장 두려운 공포를 만나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혼란스런 시대상을 반영하듯, 1942년 경성에서 펼쳐지는 <기담>의 사랑 역시 불안정하고 어긋나 있다. 원장 딸과의 정략결혼으로 편안한 생활을 보장 받았지만 점점 숨이 막혀오는 의대 실습생,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엘리트 의사 부부에게 숨겨진 충격적 비밀, 사랑하는 엄마에 멋진 새 아빠까지 갖게 된 9살 소녀의 끔찍한 악몽이 아름답지만 왠지 모를 긴장감과 섬뜩함을 선사한다.
비명이나 핏빛 공포가 주는 말초적 자극 대신 <기담>은 ‘아름다움 속 도사린 공포’로 감정의 극적 대비를 불러 일으키며 색다른 공포 감각을 증폭시킨다.
기묘한 도시의 명암처럼 사랑마저 공포로 변한 1942년의 경성공포극 <기담>을 마주한다면, ‘사랑해’라는 말이 울려 퍼지는 순간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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