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스크린에서 변형되어 등장하는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 테마. 그 역사적 변천과정을 통해 서구신화 m`

물론 서구인들을 '완전 장악'하고 있는 정서체계로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꼽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과 인간이 벌이는 탐욕, 정쟁, 불륜, 갈등의 드라마는 유독 '스크린' 안에서 만큼은 그닥 환영받지 못하고, 오직 '신화' 그 자체로서만 받아들여졌는데, 이에 반해 영국의 국지적 '창생 신화'에 불과한 '아더왕 신화'는 스크린과 브라운관, 그리고 애니메이션으로 전파되어 가장 인기있는 고대 신화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원탁', '엑스칼리버', '성배'와 같은 '히트 아이템'의 보유와 함께 아더왕을 남편으로 둔 기네비어와 기사 랜슬럿과의 불륜관계 등, '이야기꺼리'화시킬 수 있는 수많은 요소들을 지니고 있는 '아더왕 신화'는, 신들의 아웅다툼을 보여주는 그리스/로마 신화보다 훨씬 더 육중한 무게와 진진한 관계 묘사로 인해 보다 극문학 형식에 가까운 형태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 이제 '아더왕 신화'가 영화 형식 내에서 어떤 식으로 변모해오며,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영상화시켰는지, 그리고 그 방향성에 당 시대의 시각과 환경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펴보며 영화 장르 자체의 변천사도 알아보기로 하자 1950년대, '아더왕 신화'의 홍보기 '아더왕 신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영화 장르를 통해 '홍보'된 경향이 없지 않다. 물론 토마스 말로이가 15세기에 발표한 소설 <아더의 죽음>은 세월이 흐를수록 '클래식'화 되어 많은 팬층을 거느리게 된 것이 사실이지만, 기묘하게도 '아더왕 신화'는 여타 장르로 전이되지 못하고, 문학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과 전이 과정을 겪었던 영화 장르에서조차 일정시기 동안 '사이드-에피소드' 내지는 배경상의 기반 정도로만 활용되어 왔었다. 이에 대한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같은 '스타'가 맹활약하던 1920∼30년대의 엔터테인먼트 장르인 '검투극'의 유행 시기에도 '아더왕'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충분히 '오리지널'로써 비슷한 종류의 재미를 줄 수 있음에도 특별히 영국의 국지 신화를 스크린에 옮겨야만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일 수도 있을 듯하다. 이런 입장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일반적으로 '아더왕 신화'에 대해 최초로 '전면적 설정'을 삼았다 여겨지는 스펜서 고든 베넷 감독, 조지 리브스 주연의 <갈라하드 경의 모험>('49)을 제외하자면, 195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아더왕 신화' 영화들이 모두 '영국산'이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설의 명검 '엑스칼리버'을 찾아 여행하는 '원탁의 기사' 갈라하드 경의 이야기를 담은 <갈라하드 경의 모험>은 이 '엄청난 이야기감'에 대해 미국이 당시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조심스러운 접근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더왕' 중심이 아니라 그의 부하였던 '갈라하드 경'을 굳이 주인공으로 삼은 점이나, '제 2의 더글라스 페어뱅크스'라는 이미지로 '핸섬보이' 조지 리브스를 타이틀롤로 내세워 이야기의 무게감을 떨어뜨리려 한 점 등에서 이를 잘 엿볼 수 있는데, 이어지는 리차드 토프 감독, 로버트 테일러, 에바 가드너, 멜 페러 주연의 <원탁의 기사>('53)는 '영국산'임을 강조하듯 아더왕과 기네비어, 랜슬롯 경의 이야기를 중심에 세우고 있으며, 비록 우스꽝스러운 고증이나 셰익스피어풍 대사들의 연발, 중세 전투 연출의 미비 등으로 '졸작'의 평가를 받긴 하지만, '아더왕 신화'를 '엔터테인먼트화 될 수 있는 소재'로 처음 차용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영화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1960년대, '아더왕 신화'의 전성기 - 그리고 재빠른 '변형' 1950년대의 '발상'에서 탄력을 받은 1960년대 '아더왕 신화' 영화들은 '아더왕 신화' 자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재정비했을 뿐 아니라, 이를 확고히 굳히고, 나아가 '변형극'을 만들어내기에 이른 '아더왕 신화'의 최전성기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아더왕 신화'는 '아이반호'나 '로빈 후드'와 같은 중세 의적담과 동류라는 '오인'을 벗고, 신화적 무게감과 운명적 로맨스, 국가 단위로 펼쳐지는 장쾌한 역사극의 새 영역을 개척해내게 된 것이다. 특히 1963년은 이 '아더왕 신화'가 스크린에 명확히 안착된 기념비적인 해로 기억되고 있다. 코넬 와일드가 감독, 주연한 '영국' 영화 <랜슬롯과 기네비어>는 현재까지도 '아더왕 신화'를 담은 영화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혀지는데, 모든 면에서 완벽한 밸런스를 이루고, 마치 셰익스피어 비극이 대중적인 버전으로 정확히 자리잡은 형태로써 '아더왕 신화'를 새롭게 정리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걸작이다. 같은 해 발표된 <돌 속의 검>은 더욱 충격적인 경우였는데, 먼저 <돌 속의 검>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101마리 개의 대행진>('61), <정글 북>('67) 등으로 잘 알려진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감독 볼프강 라이터먼이 연출한 <돌 속의 검>은 좀처럼 '신화'를 애니메이션 소재로 삼지 않는 디즈니가 모험적으로 발표한 장편 애니메이션이며, 비록 현재에는 <피터 팬>, <피노키오>, <백설공주>와 같은 정통파 디즈니 클래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지만, 적어도 '아더왕 신화'가 '어린이용 아이템'으로까지 변형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써 기억될 법하다. <돌 속의 검>이 준 영향은 단순히 '어린이용 아이템'으로써의 전환 정도가 아닌, 일반인들이 가볍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중세 모험담의 이미지로써 '아더왕 신화'가 안착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예이기도 한데, 이로써 '아더왕 신화'는 TV 브라운관에까지 옮겨지는 쾌거를 거두었고, <윌리 맥빈과 마법 기계>('65)와 같은 SF 영화에서까지 중세의 '대표 아이템'으로써 언급되는 새로운 경지를 낳게 되었다. '아더왕 신화'는 같은 60년대 내에서도 절대 '안주'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해갔다. 그 대표적인 예로 '아더왕 신화'의 뮤지컬 버전(!)인 <카멜롯>('67)을 들 수 있고, 아더왕과 기네비어 공주의 결혼식 과정에서 펼쳐지는 랜슬롯과의 삼각관계를 그린 조슈아 로건 감독의 이 뮤지컬은 기묘하게도, '변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재해석 버전임에도 그간 랜슬롯 중심이던 '아더왕 신화'의 영화화에서 최초로 '아더왕' 본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 정통적 인물배치를 성공시킨 사례로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영화 자체의 평가는, 모두가 짐작하고 있으리만치 참담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1970년대, 아무도 '신화'를 언급하지 않던 시기 1970년대는, 다들 알다시피 미국에선 '아메리칸 뉴 시네마' 정신의 확산으로 인해, 그리고 영국에선 '앵그리 영맨' 정신의 확산으로 인해 더 이상 '신화'에 대한 애착이나 신봉이 발동하지 않고, 오직 '현실' 그 자체에 대한 집중적 시추에만 모든 문화/예술이 집중되어 있던 시기였다. 이런 때에 '아더왕 신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웃음거리를 넘어서 '반동'에 가까운 행위로 비쳐졌고, 결국 이 시기에 '아더왕 신화'를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오직 영국의 악동 팀인 '몬티 파이손'의 <몬티 파이손과 성배>('75) 뿐이었고, 이와 함께 '로빈 후드'나 '아이반 호'와 같은 의적들의 이야기도 빛을 잃어 <로빈과 마리안>('75)과 같은, 로빈 후드와 마리안의 '노후담'을 그린 수정주의 버전이 탄생되기도 했다. 영화 장르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에는 분명 '약진'의 시대였던 1970년대가 '아더왕 신화'의 보급에 있어서는 오히려 악재의 시기였다는 점은 여전히 기묘한 아이러니로 꼽히며, 1980년대 초반, 헐리우드 영화 최악의 시기에 '아더왕 신화'가 새롭게 부활하여 <엑스칼리버>('81)라는 희대의 걸작을 낳았다는 사실 역시 연속된 아이러니로 꼽히고 있다. <엑스칼리버>, '아더왕 신화'를 다룬 최고 걸작의 탄생 1981년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묘한 해였다. '복고의 귀환'이라 일컬어질 수도 있을 법한 한 해로써, 1930∼40년대의 어드벤쳐 장르를 되살린 스티븐 스필버그이 <레이더스>가 공전을 히트를 기록하고,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들의 전쟁'을 다룬 환타지 영화 <타이탄들의 격돌> 또한 대단한 흥행성공을 거두었다. 폴 뉴먼이 <선택>으로 <스팅>('73) 이후 오랜만의 흥행성공과 함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해이며, '영국 스포츠 영화' <불의 전차>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1981년은, 현재까지도 '아더왕 신화'를 다룬 절대절명의 걸작 <엑스칼리버>가 등장해 대단한 흥행성공을 거둔 해이기도 하다. <포인트 블랭크>('67), <써바이벌 게임>('72) 등의 걸작 스릴러로 명성을 떨친 존 부어먼 감독의 <엑스칼리버>는 그간 '아더왕 신화'가 차용하지 않던 '금기적 요소'들을 다수 포용하고 있는 작품이다. '아더왕'은 불륜의 관계에서 태어나 이복누이인 모르가나와 정을 통해 아들을 낳고, 랜슬롯과의 첫 대결에서 '허영'에 의해 엑스칼리버를 부러뜨리며, 멀린은 속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도술사이다. 성배는 피로 찌든 과정을 통해 얻어지고, 랜슬롯과 정을 통한 기네비어는 수녀원으로 쫓겨가며, 마침내 아더왕은 누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전쟁을 벌여 그를 살해한다. 이 충격적인 작품은 그대로 '클래식'이 되어, 프랑스의 영화전문지 '까이에 뒤 시네마'가 선정한 '1980년대의 걸작 베스트 10'에 당당히 들어서게 되었고, <엑스칼리버>에 의해 비로소 토머스 말로이의 '진정한' 영화화 버전이자, 그 현대적 시각의 번안 버전은 '완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인지, <엑스칼리버>의 대단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더왕 신화'를 새롭게 다루고자 하는 이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아, 그 뒤를 잇는 작품 <카멜롯의 전설>이 등장하기까지 무려 14년의 세월이 걸리고야 말았다. 1990년대 이후, 마침내 밀려든 '수정주의'의 물결 <카멜롯>('67)에 대해 혹시 '수정주의'라는 이야기를 꺼냈던가? <카멜롯>은 뮤지컬 형식을 통해 소재 해석의 변형을 이루긴 했어도 절대 '수정주의'가 아니며, 오히려 '아더왕 신화'가 지닌 낭만주의적 요소를 대폭 확장시킨 작품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엑스칼리버>의 경우는? <엑스칼리버>는 음습하고 침울한 원작의 무드와 주제를 되살려낸 케이스로써, 그간 영화 장르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이행하지 못하던 '진정한 신화'의 재창조를 이룬 영화이다. 정확히 말해, '아더왕 신화'에 대한 '수정주의' 버전은 바로 <사랑과 영혼>으로 잘 알려진, 그리고 그보다는 난폭한 패러디 영화 트리오 'ZAZ' 사단의 일원으로 더 널리 알려진 제리 주커 감독의 <카멜롯의 전설>('95)이라 보아야 옳을 것이다. <카멜롯의 전설>이 '수정주의'로써 불리워질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기네비어 공주'의 설정에 있다. 근엄한 아더와 자유주의자 랜슬롯이라는 설정 역시 일반적으로 세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사용했던 '이상주의자' 아더와 '낭만주의자' 랜슬롯의 설정에서 조금 비껴나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페미니즘'의 사상의 도래로 인해 '기네비어'가 그저 '불륜을 저지르는 왕비'의 설정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운명을 이끌어나가는 능동적인 인물상으로 변모한 것은 <카멜롯의 전설>이 '시대의 흐름에 맞춰 수정된', 다시 말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아더왕 버전으로 인식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런 입장은 헨리 해써웨이 감독의 1954년작 <밸리언트 왕자>의 리메이크 버전('97)이나 두 번째로 등장한 '아더왕 신화'의 애니메이션 작품 <퀘스트 포 카멜롯>('98) 등에서도 일정부분 수용되고 있으며, 제리 브럭하이머가 제작한 <킹 아더>('04)에 이르면 아예 아더의 신분을 로마군 병사로 대체시키고, '원탁의 기사'는 로마에 고용된 사마리사 전사들, 그리고 기네비어는 '워드족' 여성이라는 식의 파격적인 재해석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쯤에 이르면 '아더왕 신화'가 지니고 있는 '신화'로써의 성격이 완전히 파괴되고, 오직 상업적 효과를 위해 '파격' - <킹 아더>의 경우, '고증에 근거한 파격'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긴 하다 - 이 이루어지는 변질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듯 보인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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