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홍위병, 마오쩌둥의 권력 게임에 철저히 이용당하다가 버림받은 ‘유용한 바보들’
홍위병의 특징은 사람에게 충성하는 행태 보이며 ‘정신적 노예의 길’ 선택
친문과 친박의 행태, 이성을 상실한 채 모순적인 언행으로 자유민주주의 가치 파괴
홍위병들은 예외 없이 개인적 삶이 불행했고 역사적으로 웃음거리 됐다

“재미있는 시대에 살기를 바랍니다.(愿?生活在有趣的?代)”

언뜻 들으면 배려감이 느껴지는 인사말 같지만 실상은 중국의 오래된 악담이다. 상대방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대재앙의 시대, 극심한 빈곤과 대혼란의 시대, 죽음이 지척에 있는 시대에 살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역사를 길게 보면 특히나 위험하고 힘든 시대가 있다. 한국 역사를 보면 1900년도에 태어나 60년을 넘겨 살았던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광복이후 혼란, 6.25전쟁과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 그들의 손자뻘인 1960년생은 전쟁 한번 겪지 않았고 경제성장의 혜택을 입었다. 1960년생의 자녀세대인 1990년생은 어찌됐든 경제적 풍요와 안락함을 누렸다.

중국 역사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난다. 1842년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중국은 굴욕과 혼란을 겪어야했다. 중국인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평화와 번영이 찾아올 줄 알았다. 역사는 바라는 대로 순탄하게 흐르지 않았다. ‘재미있는 시대’는 이어졌고 그 중심에 마오쩌둥(毛澤東)과 홍위병세대가 있었다.

중국을 세운 마오쩌둥은 풍요로운 나라가 아니라 가난해도 혁명의 열정이 꿈틀대는 나라를 희망했다. 실제로는 경제와 민생을 어떻게 다룰지 몰랐다. 마오쩌둥의 생각이 현실에서 구현된 게 1958년부터 3년 동안 중국 대륙을 기아와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약진운동이었다. 대략 3천만 명에서 4천만 명 가까이 사망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은 권력을 잃을 위기에 놓였다. ‘권력게임의 귀재’인 마오쩌둥이 생각해낸 게 문화대혁명이었다.

철학자 칼 포퍼는 “마르크스주의는 서로 협력할 ‘동반자’를 발견하는 대신에 적(enemy)을 발견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출발점부터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마오쩌둥도 적을 발견(적이 없으면 발명)함으로써 권력 탈환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려고 했다. 그는 1966년 “자본주의적 사상·문화·습관을 몰아내자.”고 외쳤고 처음에는 베이징의 대학생들이 귀를 기울였다. 홍위병은 1966년 5월 마오쩌둥의 처인 장칭(江靑) 등에 의해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을 중심으로 처음 조직되어 전국 고등학교·대학교·군인으로 확대되었다. 학교 내에 급진그룹부터 홍위병이 탄생한 것이다. 그들은 “파괴 없이는 건설도 없다. 모든 악귀를 쓸어버리자”는 구호를 외쳤다.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폭격하라”는 대자보를 써서 홍위병의 난동을 부추겼다.

홍위병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난폭해져 폭력과 투쟁의 선봉에 섰고, 1967년 중국은 사실상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다. 혼란의 와중에 실용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국가주석을 지낸 류사오치와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펑더화이는 투쟁 집회에서의 비판 등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곧 사망했다. 덩샤오핑은 장시 성의 트랙터 공장에서 노동을 하며 치욕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무려 200만 명의 공산당 간부가 가혹하게 자아비판 심문을 받았다.

권력투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자신의 위상이 굳건해지자 마오쩌둥은 태도를 바꿨다. 마오쩌둥은 1968년 '그대들은 나를 실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 농민으로서 중국의 전사들을 실망시켰다'는 말을 시작으로 홍위병들을 진압해 나갔다. 체포와 학살을 면한 홍위병들은 인민해방군에 입대하거나 농촌으로 하방(下枋)되었다. 1968년부터 1969년까지 약 2,000만 명의 젊은이들이 하방되었다. 홍위병은 사라졌다.

마오쩌둥은 사회주의자이기에 앞서 권력 장악을 중시한 파시스트였다. 파시즘의 전형적인 통치 방식은 민중의 동원이며, 이들은 적을 공격하거나 적이 없으면 적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취한다. 그들은 차이와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다. 히틀러와 나치가 군중을 동원하고 유태인을 적으로 만든 게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파시즘에 동원된 군중들은 ‘지도자의 우상화’에 도취되어 마치 광신도처럼 열광했다. 중국의 홍위병들도 자신의 생각이 없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파시즘에 의지하는 권력과 거기에 부역하는 홍위병들의 행태’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 그들은 ‘정의와 공정’이라는 대의를 무시하고 ‘사람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보니 정의와 공정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대실패로 판명된 파시즘과 홍위병의 출현은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나라 전체가 후퇴하게 됨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에서 홍위병의 행태는 ‘친박 혹은 친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서 살펴볼 수 있다.

10월3일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의 구호는 대부분 ‘문재인 퇴진, 조국 아웃’이었다. 하지만 우리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인사들은 ‘탄핵 무효’ ‘박근혜를 청와대’로 라는 피켓을 들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민의 심판을 받고 헌법재판소 만장일치 판결이 이뤄진 사안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자기 생각이 부족하고 그저 좁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무지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10월5일 서초동 집회에서 나온 구호는 대부분이 ‘자기모순의 행태’이거나 ‘정의와 공정에 대한 부정’이었다. 대표적인 구호인 검찰개혁. ‘검찰개혁’의 필요성이야 국민 대부분이 인정하는 사안이지만,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지 2년5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크게 외치는 이유는 명쾌하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박상기 전 법무부장관 시절에는 무엇을 했기에 하필이면 조국 전 민정수석이 장관이 된 이후 검찰개혁을 외치는 것인지 거기에 대한 설명이 없다. 검찰의 수사가 조국과 그 가족을 향한 이후에 나타난 것이라면 결국 ‘검찰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법과 제도보다 조국과 그 가족 보위가 우선’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전형적으로 ‘사람에게 충성’하는 홍위병의 모습이다.

‘조국 수호’ ‘정경심을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그들의 불법 위법 편법 행위가 확정됐을 때 뭐라고 변명할지 궁금하다. 배성범 서울중앙지검장은 7일 국정감사 과정에서 “조국 수사 중 증거인멸 및 훼손 정황이 드러났다”고 답변해 사실상 정경심의 혐의 입증에 자신감을 보였다.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조차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을 지적당하자 “내가 조국이냐?”라는 말로 사실상 조국이 내로남불의 대명사가 됐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의 홍위병 노릇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녀들이 “왜 부모님은 조국과 정경심 같은 범법자를 옹호했나요?”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정의와 공정을 잘 지킨 사람들’이라고 답을 할 수 있을까.

어린이들을 내세워 윤석열 검찰총장을 비하하는 동요라든지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 법무장관의 사진을 내세우면서 ‘미남의 말은 진리다’라는 표현은 너무나 유치해 언급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다. 그들의 판단력은 이성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광기에서 나온 것일까.

홍위병들은 자유와 책임, 그리고 홀로서기를 두려워하는 특징이 있다. 독립된 개체로서 생각하기보다는 집단의 그늘에 숨기를 좋아한다. 권력자의 말 한 마디에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저당 잡히는 종속된 신세 즉 ‘정신적 노예’가 되니 그들에게서 ‘비판적 사고에 기초한 이성’을 찾기 힘들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을 낳는다”는 표현처럼 그들은 괴물이 된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특정 인사들의 말과 행동에 전혀 의문을 갖지 않고 생각 없이 따라가는 ‘흐느적거리는 좀비’가 되는 것이다.

연륜이 쌓인 한 탤런트가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이 오랫동안 활동한 배경을 설명하면서 후배들에게 “지적을 받지 않으면 권력이 된다. (남의) 지적을 즐기고 프로 반성러가 되라.”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홍위병들은 그러한 지적이 나타나면 자기편도 한 순간에 적군으로 내팽개친다. (최근 조국을 둘러싼 좌파 진영 내 싸움과 박근혜 전 대통령을 둘러싼 우파 진영내 싸움을 보라) 열린 생각이 없으니 귀도 닫고, 뇌도 닫고, 가슴도 닫고 산다. 포용보다는 파멸을, 책임보다는 증오를 선택한다.

홍위병들의 말로는 어땠을까. 중국에서 1940년대에 태어난 홍위병 세대는 무지몽매한 홍위병 노릇을 하다가 배움의 기회를 놓쳤다. 중국이 1978년 개방을 단행한 이후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미숙한 홍위병 세대에게 별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도 홍위병을 유령으로 취급했다. 중국 공산당은 1945년 마오쩌둥 지도하에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를 채택하는 데 핵심은 당이 역사 해석을 독점한다는 것이었다. 역사적 사실을 공산당 통치에 좋고 나쁜 것으로 단순화했고, 공산당에게 나쁘면 은폐하고 좋으면 과장하는 ‘기억상실증 전략’을 펼쳤다. 마오쩌둥의 경우 그의 치세를 부정하는 것은 공산당 일당지배의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되었다. 그의 과오를 인정하면 공산당의 과오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중국 공산당은 침묵을 강요했고 대약진운동의 실패 원인은 가뭄이며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도 당의 공식적인 평가와 다른 견해를 가진 학자들을 탄압했다. 중국 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의 책임을 4인방에게 돌리면서 마오쩌둥 시대의 기록물을 비밀로 지정해 학자들의 접근을 아예 차단해버렸다.

레닌은 권력의 선동에 동원되는 군중들을 ‘유용한 바보들’이라고 불렀다. 홍위병들은 마오쩌둥에게 정말 유용한 바보들이었으며,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버림받았다. ‘재미있는 시대(?)’에 산 그들의 개인적 삶은 참으로 불행했으며, 역사적으로도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지금 대한민국에 홍위병 노릇을 하는 ‘유용한 바보들’이 참으로 많은 것 같다. 그들이 역사와 후손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부끄러움의 늪에서 벗어나야 대한민국이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텐데 그 시기는 언제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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