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는 진보가 아니다. 사회주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좌파들이 ‘진보의 탈’을 쓰고 퇴보 부추겨
자유는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양심과 책임’을 강조 ? 자유의 포기는 국가권력의 노예가 되는 길
경쟁은 독점을 막고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 시장은 약육강식 정글이 아니라 생태계로 인식해야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가난과 불행의 산실 '자유가 주엔진이 되고 평등은 보조엔진이 돼야한다'

“당신은 좌파인가 우파인가? 당신은 사회주의자인가 자유주의자인가?”

자신의 이념 성향을 묻는 질문에 답변하기가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별다른 고민 없이 ‘좌파 진보 혹은 우파 보수’로 쉽게 자신의 이념 기준을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좌파=진보, 우파=보수’로 무작정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는 설정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진보는 자유주의자(우파)를 의미하며, 자유민주주의에서 진보는 사회주의자(좌파)를 뜻하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는 좌파들은 진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좋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좌파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진보주의자로 포장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국가가 운영되면 결과는 ‘진보가 아니라 퇴보와 패망’이었고, 역사에서 좌파 사회주의는 모두 망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우긴다. (소련 동유럽 쿠바 베네수엘라 그리스 등과 시장경제 채택 이전의 중국과 베트남) 참으로 ‘웃기는 짜장’이다.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경계선은 분명하지 않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좌파적 시각을 갖는 사람이 다른 사안에서는 우파적 시각을 갖기도 한다.

이럴 때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게 ‘자유와 경쟁에 대한 시각’이 아닌가 싶다. 자유와 경쟁을 얼마나 중시하고 경시하느냐에 따라 우파와 좌파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유는 영어로 ‘freedom’ 혹은 ‘liberty’로 표현된다. ‘자유로운’을 의미하는 ‘free’는 앵글로색슨족의 언어로 독일어 ‘frei’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며, 인도유럽어계통에서 보면 ‘사랑하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친구(friend)도 비슷한 의미를 가졌는데,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자유인과 노예로 나뉘었을 떼 ‘속박을 받지 않는 사람’을 뜻했다. liberty는 라틴어 ‘libere’에서 나온 표현으로 ‘자유롭게 하다’의 의미이다. 자유는 한자로 자유(自由)가 되었는데 ‘자신으로 말미암다’는 뜻이다. 동일한 자유가 서양에서는 속박에서 벗어나다는 의미가 강한 반면, 한자어에서는 ‘스스로 주인이 된다’는 측면에서 약간 이기적인 성격을 띠기도 한다.

자유에 대해 영국의 정치사상가인 이사야 벌린은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구분했다. 소극적 자유란 타인으로부터 강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영화 <빠삐용>이나 <쇼생크 탈출>에 주인공들이 자유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자유의 참모습이 잘 나타난다. <쇼생크 탈출>에서 ‘레드’역을 맡은 배우 모건 프리먼(Morgan Freeman)의 성이 ‘자유인(free man)’인 게 흥미롭다.

소극적 자유는 우파가 인식하는 자유로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자유를 의미한다. 자신이 자유를 누리려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으로, 그 밑바탕에는 ‘개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개인주의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정치철학자인 래리 시덴톱은 “개인이 있어야 자유, 양심, 책임이 자리 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사람의 개인성(individuality)를 강조한 것으로, 타인의 생각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게 민주주의의 바탕임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 적극적 자유는 좌파가 인식하는 자유로서 ‘개인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는 것’ 즉 이기주의적 성격을 의미한다. 좌파들도 자유를 ‘개인주의가 아닌 이기주의’로 인식함으로써 ‘자유를 놔두면 방종으로 흐른다’라고 생각했다. 북한은 <정치사전>에서 자유주의에 대해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무원칙하게 내세우며 조직 생활과 조직 규율을 싫어하며 제멋대로 행동하려는 낡은 사상과 태도’이며,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로서 착취계급의 사상’이다”라고 규정했다.

좌파는 그러한 까닭에 개인의 이해와 공공의 이해가 충돌하지 않는 공동체, 개인이 자신을 사회집단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공동체를 창조하는 방안을 생각해냈다. 하지만 좌파가 생각하는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전체주의 사회(과거 소련 중국 그리고 현재 북한)가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 동의할 수 있을까?

결국 자유민주주의에서는 ‘타인의 대한 속박’이 최소한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농업사회로서 집단의식이 강했던 우리 사회에는 타인의 삶에 대한 침해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SNS에서 험한 말을 쏟아내고 타인에 대한 비방을 일삼는 ‘비호감 참견론자’들의 경우 개인에 대한 존중이 없는 사람으로 자유를 파괴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자유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행동에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달리 표현해 개인의 자유를 없애고 공동체주의(국가주의)로 가면 무책임이 횡행하는 사회가 된다는 의미다. 예컨대, 소련에서 모든 경제활동은 ‘생산 목표’라는 게 있었고 목표량을 달성하면 보너스가 주어졌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생산량을 늘리려고 크게 노력하지 않았다. 해마다 주어진 목표량은 전년 생산량을 기준으로 설정되는데, 올해 지나치게 많이 생산하면 내년에 목표량만 더욱 늘어나므로 굳이 노력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게 상부의 명령에 의해 이뤄지므로 아무도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공산당 간부들도 잘못됐을 때 문책이 무서워 스스로 결정하는 대신 상부의 명령만 기다렸다. 결정이 잘못됐을 때 문책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 최고 권력자뿐이었다. 최고 권력자는 모든 인민의 우상이 되어야하므로 그가 내린 결정은 아무리 엉터리여도 ‘찬양’을 받았다.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부터 지금 시진핑까지, 북한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까지 이들 사회의 최고지도자들은 ‘무오류의 존재’가 되었다.
자유는 ‘자기 책임의 원칙’을 따르므로, 책임의식이 부족한 사람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공동체 혹은 국가에게 자신의 안위를 맡기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문재인 정부가 “내 삶을 책임져주는 국가”라고 말하고, 현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환호했는데 그들이야말로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하거나 줄이는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일한 김병준 교육부총리가 한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자유를 줄이고 정부의 권력 확대를 추진하는 국가주의 정권”이라고 규정한 것도 우리 사회에서 ‘자유의 약화’를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파는 정치에서 자유를 중시하며, 시장에서 자유가 구현되는 경쟁을 찬양한다. 좌파는 ‘공동체주의’에 입각해 경쟁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과연 경쟁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가 피폐하게 하는 가?

평등을 중시하는 좌파는 경쟁을 불평등의 근원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들의 인식은 크게 잘못됐다. 불평등이란 ‘신분 성별 재산 인종’에 따라 차별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수입의 많고 적음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른 대우의 차이는 불평등이 아니다. 소득과 재산의 차이는 ‘격차’로 표현되며 차별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가 나타나기 전에 서구사회나 중국, 한국 등은 모두 신분사회였다. 아무리 재주가 많고 능력이 뛰어나도 신분의 차이를 좁힐 수 없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말하는 ‘평등’은 바로 신분사회의 철폐였지, 개인의 노력 결과에 따른 ‘격차 없애기’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좌파는 ‘격차=불평등’이라고 말하며, 개인의 능력 발휘를 가능케 하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대신 ‘결과의 평등’을 지향한다.

경쟁을 없애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발전이 없게 된다. 과거 소련은 우주선을 쏘아 올렸어도 삶에 필요한 전자제품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상부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세상에서 새로운 소비제품을 만들어야 할 인센티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정농단이라는 단어를 통해 ‘농단(壟斷)’이란 단어의 유래를 알게 됐다. 농단은 ‘옛날 어느 남자가 시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두루 살핀 후 좋은 자리를 잡아 물건을 모두 팔아치웠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으며, 그로부터 농단은 거래를 좌지우지해 이익을 독차지한다는 의미가 됐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농단’이란 바로 ‘상부 지시’를 의미한다. ‘상부 지시’는 곧 모든 거래에 대한 독점을 뜻한다. 좌파들이 경쟁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다는 것은 곧 ‘독점 허용’을 뜻하고, 실제로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그게 국가나 국영기업의 독점으로 나타났다.

독점이 얼마나 나쁜지는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잘 설명했다. 그는 “독점가격은 소비자를 쥐어짜는 가장 높은 가격이며, 소비자들이 그 돈을 주고 사겠다고 어쩔 수 없이 동의한 꼴이 된다. 반면 경쟁을 통해 이뤄진 가격은 판매자들이 일반적으로 택할 수 있는 가장 낮은 가격인 동시에, 기업이나 상인이 사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격이다”고 설명했다.

경쟁이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나쁜 적이라면 우리가 흔히 접하는 순대국 거리, 떡볶이 거리, 족발 거리의 형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이들 거리를 가보면 가게마다 경쟁이 치열한데, 그게 오히려 해당 거리를 키운다. 그러한 경쟁을 영어로 ‘선의의 경쟁(emulation)’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는 주변 경쟁자의 장점을 받아들여 자기 가게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과정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쟁은 손님들로 하여금 더 좋은 음식을 맛보게 하고, 가게들을 더욱 번창하게 만든다.

사회주의 국가처럼 이러한 경쟁이 싫다고 없애면 결국 가게는 한 군데만 남을 것이고, 손님들은 서비스와 맛의 개선이 전혀 없고 손님에게 불친절한 가게만 이용하게 될 것이다. 독점을 하게 된 가게는 수요에 맞춰 제대로 공급을 하지 않게 되고, 그러한 공급부족은 줄서기 현상을 초래한다. ‘경쟁을 없앤 이상사회’가 바로 사회주의국가였고 거기에서는 예외없이 ‘줄서기 낙원(Queuetopia)’이 펼쳐졌다. 줄서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권력자에게 뒷돈을 줘야 했는데, 줄을 감독하는 경찰이나 공무원들은 뒷돈을 받아 호화롭게 살 수 있었다.

좌파들은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를 ‘무한 경쟁사회 혹은 약육강식의 정글’로 표현하며 개선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는 양육강식의 정글이 아니라 상호 의존관계인 생태계이며, 경쟁은 독점을 막는 훌륭한 방벽이다. 좌파 사회주의자들은 그걸 잘 몰랐다.

문재인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리영희 교수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표현을 즐겨 썼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 사회는 자연에서 존재하는 새가 아니라 비행기에 비유하는 게 더 적절하다. 현대의 비행기는 제트엔진의 추진력에 의해 나아간다. 날개는 동력원이 아니라 균형을 잡아주는 보조 역할을 한다. 한 국가나 사회가 미래로 나아가려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가 동력원이 되어야한다. 그래야 번영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부의 재분배나 복지’ 등이 날개 역할에 해당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자유가 주엔진이라면 평등은 보조엔진이 되고, 성장이 주엔진이라면 분배는 보조엔진이 되어야한다는 의미다. 이게 거꾸로 작용하면 비행기가 날아갈 수 있겠는가?

한 나라의 정치와 경제는 ‘어떻게 더 많은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가난이 앞문으로 들어올 때 사랑은 뒷문으로 도망친다는 말이 있듯이, 가난은 행복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그런데 가난을 만들어내는 정치와 경제체제가 바로 사회주의 계획경제였다. 그걸 역사가 증명했다.

모든 정치 이데올로기는 ‘사람을 중시하는 사상 즉 휴머니즘’으로 흡수된다고 한다. 이러한 휴머니즘을 가장 잘 실현시킬 수 있는 가치가 자유였고 그 수단이 경쟁이었다. ‘자유와 경쟁’이 의도가 충분하지 못했더라도 인류 역사에서 휴머니즘을 달성하게 만든 가장 훌륭한 방안이었다는 의미다. 물론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도 인간이 만든 제도라서 비록 완전하지는 않아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개선을 요구받고 있다. 그렇다고 좌파 사회주의가 대안이 된다면 그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되돌리는 반역사적 행위이자 커다란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