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 영화의 변천사로 시대를 읽는다

'불륜'이라는 소재는 일부일처제가 확립된 이후 금기된 욕망의 분출구로서 여러 예술의 모티브가 되어왔을 뿐 아니라, 이른바 '통속예술'의 대표격으로 자리잡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공적으로 주조된 캐릭터들의 낭만적인 로맨스나 로빈 후드류의 의협담과 같은 여타 통속 장르와 달리, 불륜을 다룬 이야기들은 항상 당대의 윤리관과 사회심리, 나아가 여성인권의 확충여하에 대한 하나의 스펙트럼 역할을 맡아왔다. 이제 한국영화사의 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며, 각 시대의 대표적 '바람난' 영화, 윤리적으로 붕괴된 가정파탄극의 변천사를 통해 각 시대의 모습과 심리를 되짚어 보기로 하자. ■ 1950년대 자유부인(自由夫人) (1956) 감독: 한형모 출연: 박암, 김정림, 양미희, 이민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되어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정비석의 연재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대학교수의 부인이 사교댄스에 빠져들며 젊은 대학생과 불륜을 저지르고, 대학교수 본인도 자신을 따르는 여제자와 묘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당시 사회분위기로서는 믿기 힘들 정도의 파격적인 소재로 화제를 일으키며 흥행에 대성공했다. 전후의 혼란 속에서 일기 시작된 퇴폐무드의 범람과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변하고 있는 모습 - 대학교수의 아내는 가정주부이지만, 그를 흠모하는 어린 제자는 사회에 진출한 여성으로, 당시 여성이 택할 수 있었던 직업 중 가장 선호되던 '타이피스트'이다 - 등, 정비석 원작이 지니고 있던 시대기록적 요소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서로 잘못을 뉘우치고 화해를 이룬다는 결말은 모던한 소재에 비해 어딘지 고리타분한 느낌이지만, 이후 등장한 한국 멜로영화의 기본틀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영화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작품이다. ■ 1960년대 하녀 (1960) 감독: 김기영 출연: 이은심, 김진규, 주증녀, 안성기 아마도 한국영화사상 최초의 스타일리스트로 꼽힐 거장 김기영의 최고걸작. 유부남인 한 피아노 선생을 둘러싼 수많은 여성들의 암투와 모략, 드글거리는 소유의 욕망을 다룬 작품으로, 계급갈등이 심화되던 60년대 초반의 사회무드를 우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비록 남성의 애정에 대한 갈구가 그 목적이긴 해도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전까지의 여성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며, 낙태에 대한 사회적 의식이 아직 성장하지 않았던 시절의 기묘한 윤리관도 엿볼 수 있다. 김기영 감독은 "자유부인"을 위시로 한 통속 멜로영화가 이르지 못했던 지점, 즉 총체적 파국의 순산까지 주인공들을 몰고가 동반자살이라는 육중하고 살벌한 결말을 선보이지만, 곧 '이 모든 것이 있을 수 있는 환상같은 이야기'라는 피아노 선생의 멘트를 내보내는, 거의 개그 펀치 수준의 반전으로 당시의 까다로운 검열을 통과해냈다. 영화제작기술에 대해 체계적으로 학습한 90년대의 뉴웨이브 감독군이 등장하기 전까지, "하녀"와 류현목 감독의 "오발탄"은 그 탁월한 기술적 완성도로 인해 '전설'급의 추앙을 받았다. ■ 1970년대 70년대에는 가정파탄극이 극히 드물었고, 유사한 소재가 등장한다 해도 이야기의 중심부에 배치된 일이 거의 없다. 김호선 감독의 75년작 "영자의 전성시대"의 대히트로 70년대의 통속영화는 호스테스물로 방향을 선회하였고, 가장 내에서 이뤄질 법한 성적타락은 모두 '공인'된 타락대상인 윤락녀들에게로 활시위가 바뀌어 당겨졌다. 여기서도 시대분위기를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는데, 산업노동자가 급증한 데 따른 유흥산업의 발달, 여전히 정상적 취업의 기회가 드문 가운데 생계전선으로 내몰린 젊은 여성들의 갈등 등이 이들 호스테스 영화의 주된 사회적 모티브였다. ■ 1980년대 안개기둥 (1986) 감독: 박철수 출연: 이영하, 최명길 소유욕과 일탈욕이 넘실대는 끈적끈적한 치정극의 시대를 넘고 넘어 결국 이르게 된 한국 페미니즘 영화의 효시. 항시 아둔하고 단편적인 사고 패턴만을 지녔던 기존의 치정극 여주인공의 개념에서 벗어나, 지식인 가정주부를 드라마의 중심에 내세움으로써 동일 장르에서 드물게 보이는 '사고하는 인간형'을 보여준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 결혼과 함께 찾아온 육아와의 병행에 힘겨워져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한 주인공은, 자신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동안 남편의 무관심과 불륜, 권위적인 행동들이 반복됨에도 끝까지 버텨낸다. 마침내 남편과 아이들이 함께 집이 나가버리자, 그제서야 그녀는 이 '붕괴된 가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아를 회복한다. 결국 자발적인 노력과 도전이 아닌, 상황의 흐름에 의해 삶을 재편하는 여성의 이야기에 그쳤지만, 여성으로서의 실존성에 진지하고 고차적인 의문을 제기한 첫 작품으로서 오래 기억될 만하다. '철저히 실패한 결혼이더라도 누군가가 완전히 돌아서기 전까지는 유지해야 한다'는 여주인공의 심리가 당시의 보편심리를 대변한다. 제 25회 대종상 우수작품상, 남녀주연상을 수상했다. ■ 1990년대 정사 (1998) 감독: 이재용 출연: 이미숙, 이정재 이제 불륜 치정극도 완전히 바뀌었다. 퀴퀴하고 질펀한 느낌의 퇴폐적 무드에서 벗어나, 90년대 초중반에 유행했던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의 성향을 가미하여 감각적이고 세련되며 마치 슬픈 동화같은, CF의 말랑말랑한 이미지들로 그득한 쇼가 되었다. 성공한 전문직 남성과 결혼해 귀여운 아들까지 둔,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주부가 여동생의 약혼자와 사랑에 빠진다.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기에 운명임이 분명한 이 사랑은 무뚝뚝하면서도 열정적이고, 거칠면서도 상냥한 할리퀸적 남자주인공에 의해 점차 대담한 양상을 띠어간다. 촬영과 편집 등, 기술적 요소들은 모두 탁월한 수준이며, 이미숙과 이정재의 성실한 연기로 일정부분 공감대를 얻어내긴 하지만, 이미 '타락' 자체가 이야기의 핵심인 장르의 진정한 데카당스는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불륜에 대한 사회의 시각이 퇴폐적 신비주의에서 일상적 낭만주의로 이동된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고, 경제성장과 사회다원화로 인해 등장한 신 부르주아 계급의 삶을 차곡차곡 묘사해냈다. ■ 2000년대 결혼은, 미친 짓이다 (2002) 감독: 유하 출연: 감우성, 엄정화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둬낸 영화로, 불운한 사랑에 빠진 인물들의 감정 고찰 대신 사회문화제화 되어버린 결혼제도에 대한 비아냥과 공격적 의문을 담고 있다. '조건에 의한 진짜결혼'과 '애정에 의한 가짜 결혼'을 병행하는 여성과 결혼제도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남성의 기이한 연애담은 완전히 달라진 신세기의 가치관과 그 딜레마를 산뜻하고 위트있는 무드로 그려낸다. 이제 불륜이란 큰 일이 아니다. 죄의식도 없고 깔끔하게 처리해내기도 쉽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는 사실을 선뜻선뜻 깨닫는 고리타분한 이성 뿐이다. '한 때 사랑했지만, 어느새 변심했다'는 현대 가정극의 고정 갈등구조에 대해 보다 더 고전적인 이수일-심순애-김중배의 갈등구조가 현대에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음을 질리도록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제 24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만교의 원작을 영화화했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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