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는 효율성과 가성비보다 목표량 달성을 중시하므로 심각한 자원낭비 초래
“세금을 왜 더 걷지 못하는가”라며 증세하고 ‘공짜와 무상 복지’ 외치며 재정파탄 초래
사회주의와 포퓰리즘은 계급 계층 갈등에 기반 - ‘좌파 사회주의자는 진보주의자와 다르다’
레이몽 아롱 “사회주의 모른다면 머리가 나쁜 것이고, 알고도 추종한다면 거짓말쟁이”

농업사회에서 땅은 생명이자 목숨이다. 농민들은 땅에 모든 인생을 건다. 1945년 광복 당시 한반도는 농업사회였고, 농업인구는 전 국민의 80%에 육박했다.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토지개혁에 착수했다. 북한이 선수를 쳤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을 확립했다. 사고팔거나 소작, 저당이 금지되고 경작하는 사람에게만 권리가 인정되는 방식이었다. 대한민국은 ‘유상매입 유상분배’ 방식이었다. 지주로부터 땅을 사들여 농민들에게 싼 값으로 소유권을 넘겼다. 연평균 생산량의 30%를 5년에 걸쳐 내면 자기 땅이 됐다.

남북한의 토지개혁을 언뜻 비교하면 북한이 훨씬 나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나라의 좌편향 국정교과서에서도 북한의 토지개혁을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표현했다. 이건 전혀 진실이 아니다. 북한에서는 무상몰수만 있었을 뿐 무상분배는 없었다. 무상분배는 농민이 땅을 가진다는 의미인데, 농민들은 매매나 채권 설정이 불가능했으니 사실상 소유권 없이 농사만 지어야 하는 예속된 신세에 불과했다. 농사를 지은 뒤 무려 25%에 달하는 세금을 내야 했으며, 그나마 나중에는 농지 전체가 집단농장이 되었다. 소유권을 잃어버린 농민들은 땅에 열정을 쏟지 않았고, 북한 땅은 황폐화되어 1990년대 대기근의 원인이 됐다. 북한이 토지개혁을 할 때 그 본질을 꿰뚫어본 사람들이 “농민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해도 그들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고, 수확물은 모두 적군(赤軍, 인민군)이 가져갈 것이다”라고 경고했는데 북한에서는 그게 현실화된 것이다. 반면에 대한민국의 농민들은 작은 땅이나마 열심히 가꿔 양식으로 삼고, 여분의 곡식을 돈으로 바꿔 자녀 교육에 투자했다.

인간의 삶을 수만 년, 수십만 년의 길이로 보면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지리 조건과 이에 따른 풍속과 문화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반면에 수십 년, 수백 년의 길이로 보면 인간의 삶은 제도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하버드대의 니얼 퍼거슨은 “권위적이고 착취적인 제도에서는 성장을 이룬다고 해도 결국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으며 포용적 제도가 뿌리 내리지 않는 한 지속성장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제도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비교 사례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대한민국과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북한이었다.

사회주의는 사실상 1991년 소련의 해체를 계기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소련 성립부터 몰락까지 사람의 일생과 맞먹는 74년이 걸렸다. 사회주의가 그렇게 오래 유지되고 일찍 망하지 않은 것에 대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1928년에서 1960년까지 (소련의) 국민소득은 연간 6%씩 성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역사상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구가했을지 모른다. 이렇게 빠른 성장은 기술적 변화로 가능했던 게 아니다. 노동력을 재할당하고 새로운 도구와 공장을 만들어 자본을 축적한 덕분이었다.’

소련 경제가 워낙 후진적이어서 계획을 세우고 인력과 자본을 조금만 투입해도 경제가 커질 수 있었다. 이러한 경제성장은 서구 지식인들의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 언론인인 링컨 스테펀스는 스탈린 시절의 소련을 방문한 후 “나는 미래를 보았고, 잘 돌아가고 있었다”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망언(?)을 남겼다.

공산주의 국가를 방문해 자세히 관찰한 경제학자는 없었다. 그들은 일단의 중앙계획 수립자들이 추상적인 수학적 모델을 활용함으로써 자발적인 시장의 힘보다 더욱 합리적으로 그리고 평등주의적으로 경제를 조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사무엘슨는 1961년에 발간된 책에서 소련 국민소득이 미국을 추월하는 데 1984년이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고 1997년이면 확실시된다고 예측했다. 그는 <경제학개론> 1989년판에서도 “많은 회의주의자들이 오래전부터 믿어왔던 사실과는 정반대로, 소련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기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발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의 증명이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정치적 혼란기를 겪었던 시절, 북한의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우수하다고 믿었던 지식인들도 많았다)

얼빠진 지식인들의 전망과 달리 소련의 발전은 딱 거기까지였다. 경제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개인의 창의성이 중요한데 그게 사회주의에는 없었다. 더 이상 투입할 수 있는 추가 인력과 추가 자원이 남아있지 않자 소련 경제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일사불란한 의사결정이 이뤄지고 속도가 빠르다. 겉으로 보면 대단히 효율적으로 보인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는 법안 하나만 통과시키려고 해도 이런저런 절차를 거쳐 마치 거북이걸음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는 ‘잘못된 결정을 스스로 교정하고 업그레이드하는 기능’을 갖고 있어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진가를 발휘한다.

예컨대, 시장경제는 효율성을 따지지만 계획경제는 목표달성 여부를 중시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경우 손실 발생이 우려되면 생산량을 줄인다. ‘이윤을 낼 수 있느냐’ 즉 효율성과 가성비가 생산량을 조절하는 자동조절기능을 하게 된다. 좌파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국유화, 공유화’를 통해 집단주의 방식으로 운영한다. 목표량 달성이 더 중요한 사회주의에서는 손실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사회주의를 채택하면 결국 사람들이 별로 원하지 않는 물건만 잔뜩 만들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자원의 낭비가 일어나게 된다. (소련이 담비 털을 사들이는 가격을 올렸더니 너나 없이 담비를 잡으면서 담비의 씨가 말랐고, 담비 털 재고만 쌓이더라는 일화도 있다)

세금을 걷거나 나라 살림을 운영할 때의 태도도 전혀 다르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는 ‘누구로부터 어떻게 세금을 걷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증세는 국민 고통이고 부자도 국민이므로 세금 인상에 신중하다. 증세가 자본 탈출과 투자 감소로 이어져 결국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걱정한다. 사회주의는 ‘세금을 왜 더 걷지 못하는 가’라고 생각하며, 그 방법으로 늘 ‘부자증세’를 외친다. 구체적인 방법론과 후유증은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는다.

우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고 가르친다. 북한의 토지개혁처럼 좌파 사회주의에서는 '무상'이라는 말을 즐겨 쓰면서 마치 '공짜는 있다'는 식으로 선전 선동을 한다. 복지를 얘기할 때 수입은 고민하지 않고 ‘왜 더 주지 못하는 가’라고 묻는다. 결과적으로 사회주의를 채택한 나라들은 대부분 재정파탄을 겪었다.

대표적인 국가가 ‘현대판 국가붕괴의 표본’으로 불리는 베네수엘라이다.

1998년 권력을 잡은 우고 차베스는 “가난을 끝장내는 유일한 방법은 빈민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말해왔듯이, 우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야한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는 없다.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평등과 정의가 살아있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통해서만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차베스 집권 시절에는 석유 가격이 괜찮았다. 베네수엘라는 수출액의 80%를 석유에서 벌어들였는데, 이 돈을 빈민들에게 마구 뿌렸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 주택에 빈곤층이 줄었다. 차베스는 영웅이 되었고 사람들은 선거 때마다 만세를 부르며 그를 찍었다. 차베스는 2013년 암으로 죽었는데 그가 만들었던 베네수엘라의 영광은 석유 값 폭락과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차베스의 진짜 잘못은 무엇보다도 시장경제의 기반을 붕괴시켰다는 점이다. 차베스는 2002년 정국 혼란기에 반대 진영의 총파업으로 대형 상점들이 문을 닫았을 때 국가 지원을 받는 생필품 지급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나타난게 정부 지원으로 운영되는 슈퍼마켓 ‘메르칼(MERCAL)’이었다. 메르칼에서는 쌀 빵 햄 우유 등과 같은 기초적인 식료품이 시중 가격의 절반에 공급됐다. ‘메르칼’은 2003년 12월 200개 지역에 생겼고, 2004년 2월에는 2천여 개로 늘었다. 국가보조금으로 운영되는 ‘메르칼’은 시장 가격을 왜곡해 민간경제를 질식시켰다. 시중 가격으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막대한 손실 때문에 사업을 접어야했다. 나중에 유가 하락으로 재정파탄이 나타나고 국영상점이 더 이상 ‘반값 판매’가 불가능해졌을 때, 상품 품귀현상이 일어났다.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인들 자체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 베네수엘라에서 올 상반기까지 국민의 10%가 넘는 400만 명 이상이 나라를 등졌다.

사회주의는 ‘부의 재분배와 소유의 집단화 혹은 사회화’를 통해 평등사회 구현을 추구한다. 그러다보니 세금인상과 재정지출 확대에 거리낌이 없고, 국영화 혹은 공영화를 통해 기업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강화한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세금과 준조세 인상은 단골 메뉴다. 법인세는 25%로 올랐고 세계 최대의 상속세율 65%는 요지부동이다. 실업급여 재원을 위한 고용보험료율은 1.3%에서 1.6%로 오른다. 집값에 붙는 재산세도 크게 올렸다. 한국전력의 적자로 인해 전기료 인상도 조만간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돈은 걱정 마, 돈 워리(Don’t Worry’)“라고 외치는 건강보험의 경우 ‘문재인 케어’로 인해 지난해 적자로 돌아서더니 올해 적자규모가 4조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세금 아니면 건강보험료 인상이 불가피한데 어느 길로 가나 결국 국민들의 부담이다. 국민조세부담률은 2016년 24.7%에서 문재인 정부 첫 해인 2017년 25.4%로 오르더니 지난 해에는 26.8%로 뛰었다. 세금이 늘어난다는 것은 일반 국민의 지갑에 있어야 할 돈이 정부 금고로 들어갔다는 것을 뜻한다. 돈을 쓰는 주체가 일반 국민이 아니라 ‘권력을 잡은 정치인과 관료’로 바뀐다는 것이다.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정치인과 영향력을 높이려는 관료가 가정주부처럼 알뜰하게 쓸까 아니면 생색내기만 하면서 펑펑 쓸까. 경제학자인 제임스 뷰캐넌과 고든 털럭은 <공공선택론>에서 ”정치인과 관료 역시 기업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시장 실패’보다 무서운 게 ‘정부 실패’다“라고 주장했다. (정치인과 관료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처럼 절대 착한 존재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도 세금을 늘리면서 쓰는 데는 후하기 이를 데 없다. 내년 예산안을 사상 최대인 513조 5000억 원으로 편성하면서 적자를 메꾸기 위해 60조 원의 국채를 찍어내겠다고 밝혔다. 복지 예산을 더 늘리겠다는 것. 알뜰한 가정주부라면 반드시 ‘수입 내 지출’을 위해 애쓰겠지만, 문재인 정부는 나라 살림의 제1 원칙인 재정건전성 즉 ‘페이고(Pay-Go, 번 만큼 쓴다)’를 무시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이를 위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외국인 학자까지 동원했다. 좌파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은 9월9일 서울에서 열린 콘퍼러스에서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나란히 앉았고 “한국경제가 디플레이션이 나타나는 것을 막으려면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보다 더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단기 부양책이 필요하다”며 ‘확장적 재정정책’을 주문했다. (문재인 정부 내에서는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꿀 노동개혁이나 공공개혁과 같은 구조개혁은 물 건너 간지 오래다)

문재인 정부 들어 경제성장률이 1%대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등 경기는 나빠지는 데 세금은 오르고 정부는 걷은 세금을 펑펑 쓴다. 전형적인 좌파 사회주의 정책이며 그 종착점은 너무나 처참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런데도 9월16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경제가 어려움 속에서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고용 상황이 양과 질 모두에서 뚜렷하게 개선되고 있다”고 말해 민생 현장에서 실물경제 움직임을 잘 아는 많은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경제 현실을 전혀 모르는 개인의 무지인지 아니면 사실을 왜곡하는 국민 속이기인지 참 헷갈리는 대목이다.

여기서 흔히 좌파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을 사회민주주의자 혹은 진보주의자로 포장한다. 한국의 언론에서 ‘좌파 진보 대 우파 보수’의 프레임을 작동시킨다. 하지만 좌파와 진보는 탄생의 역사가 다르다. 미국의 진보주의는 사회주의와 포퓰리즘의 대안으로 발생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갈등을 이념의 기반으로 삼았다. 포퓰리즘은 일반 서민과 기득권층 사이의 갈등을 자양분으로 삼아 일반 서민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미국의 진보주의는 계급이나 계층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적대감을 없애는 것을 추구했다. 진보주의자로 분류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04년 이렇게 말했다. (그는 부패와 싸우고 경제정의를 추구하면서 기업의 독점을 강하게 반대했다.)

“‘나는 노동자 편이다. 나는 자본가 편이다’ 같은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한 말이 정의라는 불변의 법칙을 밀어냈다. 누구든 자기가 계급에 속한 사람이라고 여기면 ‘나는 노동자 편이다’ 또는 ‘나는 자본가 편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공화국(미국)의 중심은 아주 빠르게 파괴될 것이다.”

진보주의는 점진적 개혁을 선호하는 보수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혁신적 개혁을 통해 정치와 사회체제를 바꾸려는 성향이나 태도를 의미한다. 그런 만큼 절대적 개념이 아니다. 프랑스혁명 당시 왕정에 반기를 든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사회주의는 진보주의와 동일하지 않다. 진짜 생각이 있고 미래 지향적인 지식인이라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진보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학자인 레이몽 아롱은 <지식인의 아편>이란 책에서 “정직하고 머리 좋은 사람은 절대로 좌파가 될 수 없다. 정직한 좌파는 머리가 나쁘고, 머리가 좋은 좌파는 정직하지 않다. 모순투성이인 사회주의 본질을 모른다면 머리가 나쁜 것이고, 알고도 추종한다면 거짓말쟁이다.”라고 규정지었다.

사회주의는 모순덩어리라는 데 자칭 사회주의자인 조국과 그를 기용한 문재인 대통령은 머리가 나쁜 것일까 아니면 거짓말쟁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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