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反)자본주의를 말하는 마르크스 후예들은 지성인, 행동하는 지식인, 예언자로 위장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공격하며 사회주의 세상에서 살지 않으려는 위선의 삶
중국과 인도의 극빈층이 줄어든 것은 사회주의 버리고 자유시장경제를 택한 덕분
자본주의 혜택을 누린 조국 “푼돈까지 챙기는 사회주의자” “조국은 민중처럼 살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끝이 임박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는 2013년 이러한 주장을 폈다. 그는 1990년대 이후 자본주의가 ‘존재의 가을’에 들어섰으며 ‘착취와 저임금’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가 끝이 있는 체제이므로 언젠가 역사적 사회주의로 바뀔 것이라고 전망했다. 월러스틴이 전 세계를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부라고 나눈 ‘세계체제론’은 386 운동권세대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월러스틴의 영향을 받아 통일문제를 강조하는 분단체제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월러스틴의 말은 현실화됐을까. 세상을 볼 때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으나 항상 팩트(사실)를 신성시하는 냉철함이 필요하다. <팩트풀니스>의 저자인 한스 로슬링은 “세상은 해를 거듭하며 조금씩 나아진다. 이것이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이다”고 강조했다.

<팩트풀니스>에 따르면 전 세계인들의 설문조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계 인구의 50% 이상이 저소득 국가에 산다’고 응답했지만, 실제로 하루 소득 2달러 이하의 저소득 국가에 사는 인구비율은 9%에 불과하다. 세계 인구의 75%는 저소득도 고소득도 아닌 ‘중간소득 국가(하루 2~32달러)’에 산다. 1800년 당시 인류의 85%가 저소득 극빈층이고 기대수명이 평균 30세였지만, 2017년 기준으로 9%만이 극빈층으로 남고 기대수명은 72세가 됐다. 시장경제를 도입한 중국에서 극빈층 비율이 0.7%로 떨어지고, 사회주의 사고방식을 벗어던지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해 급성장을 이룬 인도에서 극빈층 비율이 12%로 하락한 덕분이다. ‘빈곤은 인류가 겪은 고통의 근원’이었는데, 이를 타파한 게 사회주의자들이 그렇게 싫어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였다.

월러스틴이 말한 ‘자본주의의 종말’은 대표적인 거짓 예언이었다. 몽상가인 월러스틴은 비현실적인 얘기만 늘어놓다가 자본주의의 종말도 보지 못한 채 2019년 8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국내에서도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인문학 강연을 하며 인기를 끌었던 인사의 말을 들어보자.

“자본주의의 원리는 딱 하나입니다. 무조건 돈을 가진 사람이 우월한 지위를 확보합니다. 자본주의를 통제하지 못하면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모두가 노예로 살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현실입니다.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취업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물건을 구매하지 않으면 됩니다.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공식은 알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고 지켜나가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생산소비협동조합 같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필자가 쓴 <이기적 국민> 발췌, 이 말을 한 사람은 요즘 거짓말이 모두 들통이 난 듯 조용하다)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돈을 최고로 아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자본은 곧 돈’이라고 생각하는 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자본주의는 미래에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자원의 일부를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인간이 창조적 재능과 에너지를 발휘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이다. 경제, 사회, 법과 제도 등을 포괄하는 문화시스템으로서 단순한 물질주의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돈을 숭배하고 물질을 찬양하며 자기 것만 챙기는 천박한 시스템’으로 이해했다. 그렇게 천박한 시스템은 당연히 오래갈 수 없기에 ‘자본주의는 곧 멸망하리라’는 예언을 쏟아냈고, 저주의 예언은 자본주의가 출현한 이후 계속 이어졌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우리가 가진 돈은 자유의 도구요, 우리가 좇는 돈은 예속의 도구다”라며 사실상 자본주의를 비난했다. 이 문장은 앞뒤가 맞지 않다. 우리가 돈을 가지려면 먼저 돈을 좇아야하는데 그걸 예속이라고 규정하며 비난하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19세기 프랑스의 사회주의자인 프루동은 사적 소유를 비난하면서 “사유재산은 도둑질”이라는 표현을 썼다.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 발표한 <공산당선언>에 잘 녹아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단순화시키면서 계급, 적대, 투쟁, 착취 등의 섬뜩한 단어를 나열했다. 세상사는 매우 복잡하기 마련인데 단순화의 폐해는 말하지 않고, 오로지 모든 게 자본의 탓이며 자본가는 타도의 대상이라고 선언했다. 다른 의견은 모두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반동들의 헛소리일 뿐이라는 지극히 교조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반(反)자본주의를 부르짖는 마르크스의 후예들은 오늘날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한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반대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비판하고, 예고한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을 통찰하는 지성인, 세상의 진실을 알아보고 비판하는 행동하는 지식인, 미래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는 예언가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세상의 모든 나쁜 현상은 자본주의 탓이라고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말이야말로 후세에게 ‘진리이자 꼭 실천해야 할 프로그램’이라고 역설한다. ‘돈을 멀리하라. 물질을 숭배하는 자본주의를 멀리하라’는 그들의 말은 ‘미래에 대한 혜안이자 전략’이라고 각광받는다.

반(反)자본주의를 역설하는 사람들 중 예컨대 슬로베니아 출신인 슬라보예 지젝은 ‘자본주의가 만든 현대 물질주의’를 비판하며 세상을 모두 아는 것처럼 말한다. 앞서 언급한 월러스틴은 메시아주의를 들고 나와 평생을 ‘자본주의는 멸망하리라’는 주문만 외웠다. ‘경제성장은 환경을 파괴한다’는 환경주의자, 돈에 대한 집착은 악마숭배라는 종교인 등도 반(反)자본주의 즉 친사회주의자들에 가깝다.

그들은 ‘자본주의는 무조건 나쁘다’는 명제 하나만 붙들고 산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들은 아무도 사회주의 체제에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그렇게 미우면 사회주의 체제에 가서 사세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 답변을 거부한다.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헛소리를 해도 처벌을 받지 않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집권세력에 반하는 조그마한 목소리도 곧장 목숨과 맞바꿔야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러시아혁명의 공신이자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던 레온 트로츠키는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한 후 망명생활을 하다가 멕시코에서 비참하게 살해됐다. 중국의 류사오치는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하다가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마오쩌둥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했고, 그 후 홍위병으로부터 폭행과 폭언을 당했으며 그 후 난방도 되지 않은 가택에서 병이 악화돼 죽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국군의 뿌리’인 듯 추앙한 6.25전범 김원봉도 1958년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했고, 아내와 두 아들도 처형됐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반(反)자본주의 운동가들은 한사코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기를 거부한다. 자본주의를 성토하면서 자본주의가 주는 자양분과 혜택을 마음껏 누리는 게 그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팔고 강연을 한 돈으로 스테이크를 썰고 포도주를 마신다.

예컨대, <21세기 자본>이라는 책에서 자본주의를 공격한 토마 피게티는 세계적인 지성인으로 인정받는 삶을 즐기고 있으며,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공언한 미국의 정치인 버니 샌더스는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책을 써서 백만장자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판사와 근로자의 망치질은 같은 값을 받아야한다’는 방송인이 한 번 강연에 천만 원 이상을 받고, 돈을 멀리하라는 자칭 인문학자가 강연에서 수백만 원을 받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본주의와 반(反)자본주의를 외치는 거짓예언자들의 공생관계’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은 천재 중의 천재, 김정은은 인류 역사가 낳은 위인 등이라고 표현한 김정은 찬양단 가운데 북한으로 이주한 사람에 대해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민주사회에서 투표를 할 때 좌파 사회주의는 분노 때문에 표를 찍고, 우파 자유민주주의는 불안 때문에 표를 찍는다고 표현한다. 좌파는 사람들의 분노에 호소하기 위해 선전과 선동을 애용하고 감정과 감성에 호소한다. 다만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발을 딛고 사는 공간은 자유시장경제의 공간이기에 그들이 대중에게 하는 말과 실제 삶의 모습은 전혀 상반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걸 우리는 ‘위선 혹은 거짓말’이라고 표현한다.

반(反)자본주의자 즉 사회주의자들은 ‘사람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외치며, 무조건적인 돈 숭배를 싫어한다. 그러면서 “성장과 고소득이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언뜻 들으면 그럴 듯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소득의 진정한 목표는 돈을 더 많이 버는 게 아니고, 장수라는 목표는 단지 더 오래 사는 게 아니다. ‘고소득과 장수’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더 늘리는 것이다.

소득이 늘어나면, 그리고 오래 살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걸 더 많이 할 수 있는 자유가 늘어난다. 당신은 자유가 더 늘어나는 세상에 살고 싶은가 아니면 자유가 줄어드는 세상에 살고 싶은가. 분명한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이 오늘날 삶의 여유, 여행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채택해 고성장을 이뤘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좌파 사회주의자들도 고소득 경제, 편리한 교통수단, 효율적인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안전하고 안락한 거주지를 누리고 싶어한다. 이념과 생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을 지지하면서, 결실은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한 아담 스미스’를 원한다. 정말 이율배반적인 삶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1992년 사노맹 산하 남한사회주의과학원 기관자인 <우리사상 2호>에 조국 법무부 장관이 ‘류선종’이라는 가명으로 썼다는 ‘강령의 실천적 이해를 위하여’라는 글이 있다. 그 글에 보면 “사회주의혁명이 공동의 대업이며, 사회주의만이 진실로 현실의 모슨 모순의 대안임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사노맹 활동과 관련해 처벌을 받은 조국 장관은 “자랑스러워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9월 6일 인사청문회에서 “나는 자유주의자이고 동시에 사회주의자”라고 자신을 규정했다.

낮에는 사회주의의 이념을 ‘소신껏’ 말하고, 밤에는 자본주의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는 게 좌파 사회주의자들의 삶이었다. 밤과 낮이 다르니 결국 위선자와 거짓예언자로 판명된 게 그들의 인생이었다. 조국 법무장관의 삶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조국 일가에 대한 댓글이 수없이 많았는데, 다음에 언급하는 짧은 두 문장이 지금 상황을 잘 표현해줬다는 생각이 든다.

“조국은 푼돈도 알뜰하게 챙기는 사회주의자”

“조국을 좋아하는 애들아, 조국은 너네처럼 안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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