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정치인은 상대방을 적(enemy)이 아닌 적수(adversary, rival)로 인식해야
조국 ‘국민 분열을 조장하는 언어’로 혐오의 정치 부추기는 업보 쌓았다
국민들은 ‘정의와 공정의 잣대’로 ‘자격 미달’이라 외치는데 본인만 모르는 듯

 

2008년 미국 대선은 존 매케인(공화당)과 버락 오바마(민주당)의 대결이었다. 오바마는 흑인인데다가 이슬람교도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존 매케인이 유세를 하는 도중 그를 지지하는 여성이 물었다.

“오바마가 당선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지 않습니까?”

“오바마는 좋은 사람입니다. 미합중국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우리가 두려워할 까닭은 없는 사람입니다.”

“오바마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는 아랍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부인, 그는 좋은 가정에서 자랐으며 훌륭한 미국 시민입니다. 저와 기본적인 쟁점들에서 의견이 다를 뿐이지요, 그리고 그 때문에 지금 이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거구요.“

존 매케인은 품격을 갖춘 미국 보수의 상징이었다. 매케인은 상대방을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honor)을 잃지 않았다.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에게 패한 뒤 “오늘 밤 미국인들은 지구 위의 가장 위대한 국민이 됐다.”는 승복 연설을 남기기도 했다.

존 매케인은 자신의 저서 <사람의 품격(Character is Destiny)>에서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단지 인격을 믿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태어날 때부터 어떤 삶을 살지 정해진 사람은 없으며 운명적이라 할 만한 것은 인격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세월이 흘러 2018년8월25일 매케인은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장례식에 참석해 "매케인 의원은 우리에게 영원한 원칙과 변치 않는 진리의 의미를 알려줬습니다."라고 그의 삶을 추모했다.

매케인의 삶에 오점도 있었지만 어찌됐든 그는 미국 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매케인은 1967년 해군 비행사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격추되어 포로로 잡혔는데, 당시 북베트남은 매케인의 아버지가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것을 알고 협상을 위해 석방을 제안했지만 매케인은 이를 거부하고 동료들과 5년을 함께했다.

존 매케인은 일화에서 보여주듯이 정치에서 적(敵)과 적수(敵手)를 구분할 줄 알았다. 적은 뿌리 깊은 원한을 갚기 위해 싸우는 상대방을 의미한다. 영어로 ’enemy’이다. 적수는 힘과 재주가 비슷한 상대를 의미한다. 영어로 ‘adversary’를 뜻한다. ‘adversary’는 라이벌(rival)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분야에서 경쟁하는 맞수를 의미하는 ‘라이벌’은 ‘river(강)’에서 유래했다. 라틴어에서 리파리아(riparia)는 마을을 이루고 살만한 비옥한 땅을 말했는데, 이런 곳은 농사짓기에 필수적인 강을 끼고 있었다. 여기서 강(rivus, 리부스)이라는 말이 나왔으며, 그 강물을 함께 사용하는 사람들을 rivalis(리발리스)라고 했다. 영어 ‘rival’은 이 ‘rivalis’에서 나온 것이다.

강을 경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많은 물을 차지하기 위해 다퉜고 때로는 소규모 전쟁까지 벌였다. (성경에도 양들에게 먹을 물을 놓고 아브라함과 조카인 롯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가뭄으로 강물이 말라갈 때는 힘을 합쳐 물을 대곤 했다. 라이벌은 바로 이 강물을 터전으로 서로 마주보고 아웅다웅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라이벌은 때로는 경쟁자이기도 했고 때로는 동료이자 친구이기도 한 존재였다.

정치에서도 상대방을 적(enemy)으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적수(adversary 혹은 rival)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향을 알 수 있다.

정치에서 상대방을 타도 대상으로 보는 정치인들은 포퓰리스트나 사회주의자 성향이 강하다. 그들은 분열의 언어를 통해 ‘적 만들기(enemy-making)’를 시도하고 집단혐오를 부추긴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 ‘정치화된 대중’은 자기편이 아닌 국민을 단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싫어하고 증오한다. 최근 전 세계 정치권에서는 정치를 ‘적수와의 관계’가 아니라 ‘적과의 대립 관계’로 보는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새롭게 등장한 포퓰리스트들이 그러한 프레임을 주로 양산했다.

반면에 상대방을 적수로 보는 정치인들은 민주주의자 성향이 강하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를 지냈고 캐나다의 자유당 당수를 역임한 마이클 이그나티에프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정치인들이 적(enemy)과 적수(adversary)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적수는 꺾고 싶은 상대이며, 적은 말살해야 할 상대다.”라고 설명했다.

정치에서 상대편은 라이벌이자 적수일 뿐, 선거가 끝나면 함께 가야 할 동지다. 그런 만큼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모욕하고 막말을 퍼붓는 사람은 정치인으로서 자격이 없다. 그건 이념과 사상을 떠나 정치인으로서 자질과 품격의 문제가 된다.

2019년 8월을 지나며 한국 정치권이 ‘조국 사태’라는 블랙홀에 빠져들었다. 사태의 본질은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가 정의와 공정의 가치를 실현했느냐’의 여부인데, 엉뚱하게 진영 논리에 빠져 정치권이 싸우는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국민 대다수가 ‘정의의 공정의 잣대’에서 자격미달임을 말하는데, 조국 옹호자들은 ‘좌우 진영 간 싸움’으로 인식하고 절대 밀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정치인은 역사와 국민 앞에서 영원한 피고인’이란 말처럼 결국 최종 판단은 역사와 국민의 몫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조국 후보자는 정치에서 의견이 다른 국민을 적(enemy)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일 경제분쟁이 일어났을 때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 ‘좌(左)냐 우(右)냐’가 아니라 ‘애국이냐 이적이냐’라고 말했고, 반일(反日)을 애국으로 포장했다. 국민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포퓰리스트 면모를 보이고,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의 마음을 강렬한 언어로 후벼 팠다. 그는 정치인이 응당 갖춰야할 자세와 품격을 잃었다는 측면에서 진정한 민주주의 신봉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쌓은 많은 업보들이 지금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날아오는 게 아닐까.

하나 덧붙이자면 조국은 법무장관 후보자 사퇴를 하지 않은 채 ”고통스럽다고 해서 내가 짊어진 짐을 내려놓을 수 없다“고 강변했다. 그는 많은 국민들이 ‘불의와 불공정의 아이콘이 된 조국’이라는 짐을 하루 빨리 버리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국가 전체적으로나 조국 본인에게나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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