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살리기 조건으로 '재벌공화국' 허가 고육책

때로는 현실이 이론을 앞설 때가 있다. 과거 '문어발정책'으로 경제질서를 어지럽혔다 지탄받은 재벌. 재벌개혁은 진정한 선진화를 위한 필수조건으로 널리 인지되던 시절이 불과 엊그제다. 하지만 최근 제기된 일련의 '기업도시' 구상은 개혁의 근본을 송두리째 흔드는 발상이라는 의혹이 점차 짙어가고 있다. 연면적 10만평 규모, 전체 공사비만 1조원 정도가 투입되는 초대형 프로젝트 '삼성타운'이 가시화의 단계를 밟아나가고 있어 화제다. 지역사회의 특성이 자리잡고 공동체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재벌공화국, 삼성공화국이 한국 내에 새로 생기는 것. 7715평 부지에 건설되는 '삼성타운' 6월 15일 서초구청과 업계에 따르면, 삼성타운은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교대방향으로 50여m 떨어진 서초동 1320, 1321번지 일대 7715평 부지에 건설된다. 삼성물산 건설부문이 시공을 맡아 39층(A동, 대지면적 1985평), 35층(B동, 대지면적 1618평), 24층(C동, 4112평) 등 3개동을 건축 중이며 오는 2008년께 완공되면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 계열사들이 대거 입주하게 된다. A동은 삼성생명 등 금융계열사, B동은 삼성물산과 기타계열사, C동은 삼성전자 등이 들어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초구청 관계자는 "총 3개동 건물의 기반공사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상태"라고 밝혔다. 또한 "제1단계로, 39층 규모의 A동 건물이 삼성물산 건설부문의 시공으로 착공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사업은 1993년경부터 삼성그룹 소속 태스크 포스팀인 '서초 프로젝트 사업추진실'이 추진해온 것. 업계는 서초동 삼성타운이 완공되면 삼성그룹 직원 등 2만여 명이 이 단지에 상주하게 되며, 유동인구가 2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한다. '삼성타운'에 들어설 건물들은 첨단 보안시설과 자동화 설비 등이 설치된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지어질 계획. 또한 도로 하나 사이로 마주하고 있는 각 건물은 지하 통로 등을 통해 촘촘하게 연결될 예정이다 삼성 관계자는 "이 사업은 강남과 분당 일대에 분산돼 있는 삼성전자 계열사와 삼성생명 각 사업부문 등을 한데로 모아 사업역량 증대 등을 꾀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중구 태평로 일대에 있는 삼성본관 등은 그대로 남을 계획. 행정수도 예정지와 인접, 신도시 개발안 제출 이처럼 가시화되고 있는 '삼성타운'의 기본 얼개는 업무용 중심의 비즈니스 단지로 드러나고 있지만, 애초에 삼성그룹의 의도는 훨씬 '종합적'이었다고 한다. 즉 당초 패션 및 영상단지 등이 포함된 복합단지로 개발할 계획이었지만, 여러 차례 설계변경을 거치면서 업무 빌딩 위주의 비즈니스 단지로 건립키로 최종 결정된 것.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원래 구상한 '타워팰리스 비즈니스 타운' 건설이 무산되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1998년 삼성그룹은 서울 강남구 도곡동 삼성전자 소유부지(현 타워팰리스)에 102층 규모의 초고층 업무용 빌딩을 건설, 삼성전자를 비롯한 계열사 사무실로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당시 자금사정과 인근주민의 반발로 무산된 적이 있다. 한편 삼성의 '기업도시' 구상은 서초동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이미 현재 이전이 추진되고 있는 행정수도와 인접한 충청남도 아산시의 탕정읍에 신도시 개발안을 제출해놓은 상태. 또한 삼성전자는 LCD총괄을 탕정읍으로 이전하는 '크리스털밸리' 입주식을 6월 14일 가졌다. 삼성전자 LCD 총괄의 새로운 본부인 크리스털밸리는 2003년 10월 착공 후 약 8개월만에 완공됐다. 탕정단지는 61만평 규모의 LCD 복합단지로, 총 투자규모는 2010년까지 20조원에 달한다. 입주 건물은 7라인 공장동 사무동과 모듈동 사무동. 공장동 사무동 건물은 지상 8층에 연면적 7천2백평, 모듈동 사무동 건물은 지상 8층에 연면적 1천260평 규모. 삼성전자 탕정단지는 디지털TV 및 HD TV 생산에 필요한 대형 LCD TV용 패널 전문 생산기지다. 삼성측에 따르면 삼성이 예상하는 삼성도시, 즉 가 완공될 경우 아산 지역에서의 고용효과는 2010년까지 2만명, 매출규모는 이 지역에서만 매년 10조원에 이를 것이라 한다. '기업도시' 추진 적극 나선 재벌들 이와 같은 기업도시 조성 계획은 현재 삼성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다른 재벌들도 은밀히 추진 중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정부와의 '교감설'이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즉 부동산 거품 과열 등 기업도시 추진에 따르는 갖가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경제살리기'를 위해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고육책이라는 분석. 6월 15일 재계 및 정·관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기업도시 건설을 위한 정책포럼'에서, 전경련은 '기업도시건설특별법(가칭)'의 초안을 만들어 정부에 제출, 연내 입법을 요구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경련은 기업도시 요구가 관철되면 5백만평의 첨단산업 기업도시 개발시 건설 효과를 시산할 계획. 이에 따라 향후 3년 간 28조원의 투자가 예상되고, 아울러 국내총생산은 3년 간 연 1~2% 증가하며 취업자수 역시 3년 간 연 1~2% 증가되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 밝혔다. 하지만 내용의 핵심을 잘 살펴보면, 여기엔 그동안 재벌로 인한 폐해를 막아보고자 추진했던 개혁에서 대폭 후퇴, 사실상 재벌들의 '해방구'를 만들고자 함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증거는 전경련의 요구사항에 있다. 즉 먼저 '기업도시특구'를 지정하고 토지 수용권을 허용하라는 것. 또한 해당 도시의 주택공급방식 역시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해달라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자립형사립고, 특수목적고 설립 조건을 완화하고 해당 지역의 기여입학제도도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지원의 차원에서 조세 및 부담금 감면도 요구했으며, 무엇보다 출자총액제한도 예외로 두어야 한다고 요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도시 허용, '경제 살리려면 어쩔 수 없어' 이를 종합해보면, 그동안 진행되었던 재벌 규제를 사실상 모두 없애고 해당 기업특구에서는 노동의 유연성도 보장하며 부동산 소유까지 원활하게 하는 그야말로 '재벌공화국'을 건설하겠다는 내용인 것. 이 같이 재벌들이 추진 중인 기업도시 프로젝트는, 이미 재계와 정부 사이에 물밑 접촉을 통해 어느 정도 가시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경련이 직접적으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한 것은 이미 '사전조율'을 통해 오고 간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는 게 재계의 관측. 일부에서는 "정부가 총선 공약까지 뒤엎으며 분양원가 공개에 반대한 주된 이유가 기업도시를 허가해 주려는데 있지 않느냐"고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것이 좀처럼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정부의 어쩔 수 없는 대책이라는 '동정론'도 만만치 않다. 즉 일부에서는 "재계가 좀처럼 국내 투자를 진행하지 않는 상황이라, 어느 정도 인센티브를 주어 투자를 유도해야 되지 않느냐" 당위론을 설파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재계의 '기업도시' 추진은 장점보다 단점이 더욱 많아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즉 "투자가 활발히 진행되어 나름대로 고용창출 효과가 나타날 수 있지만, 이후 나타날 부작용의 여파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라는 것. 무엇보다 '부동산 거품'은 치명적이라는 게 공통된 견해다. "기업도시의 핵심 내용은 부동산 부양을 위한 방안이며 그동안 투기로 거품이 양산되었던 부동산 시장에 다시금 거품을 되살리겠다는 의도"라는 것. 특히 "재벌에 부동산 투기를 합법적으로 보장하려는 것이 아니냐"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즉 재벌이 기업도시를 통해 막대한 부동산개발 수익을 얻는다면, 앞으로도 부동산 투기에 골몰할 것이라는 것. 또한 그동안 추진되었던 재벌 개혁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도 문제점이다. 관계자들은 "기업도시가 들어서는 해당 지역에 고용유연화가 강화되면 지금도 비정규직 문제로 안정되지 못한 고용의 늪에서 허덕이는 많은 노동자, 서민을 더욱 힘들게 할 것"이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감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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