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발언에는 80년대 운동권의 이념과 역사관이 투영된 듯
친북 좌파성향 인사는 용서해도 친일과 친미는 용서 못 한다?

심각한 국론 분열을 촉발한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를 다시 복기해보자.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 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습니다. ...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 역량은 광복 후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에 왜 김원봉을 언급했을까. 그냥 “애국 앞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없습니다. 기득권이나 사익이 아니라 국가공동체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는 마음이 애국입니다.”라고 언급하면 됐을 텐데, 하고 많은 인물 중에 김원봉을 들먹였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대통령이 직접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운동권 출신 참모들이 주입한 것일까.

청와대는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어 통합을 강조한 취지”라고 설명했다. 역사적 사실을 언급했을 뿐 정치적 고려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을 얼마나 많은 국민이 수긍할까. 이번 발언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2015년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광복 70주년을 맞아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 잔 바치고 싶다”고 적었다는 사실도 다시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또 올해 3.1절 기념식에서 “빨갱이는 일제가 모든 독립 운동가를 낙인찍는 말이다”고 표현하면서 좌파 친화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처럼 김원봉을 계속 칭송하면서 일부러 의도적으로 ‘민족’이란 단어까지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민족이란 용어는 1980년대 운동권에서 즐겨 애용하던 표현이다. 당시 학생운동권은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 등으로 갈리는데, 이들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따르기도 하면서 친북반미 민족주의 성향을 보였다. 특히 NL은 “남조선은 미제 식민지”라는 북한의 주장을 따랐는데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NL 운동권 출신이 문재인 정부 들어서서 청와대에 대거 들어갔다. 운동권 세력은 노동계에도 대거 진출해 민노총의 핵심 세력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근로자들의 권익 보호 못지않게 민주민족연대나 민족민주전선을 언급하며 이념적, 정치적 성향을 보여 왔다.

이들은 미국 일본 등 외세에 대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감을 드러내곤 했다. 미국 쇠고기 수입에 대한 광우병 시위, 한미 FTA 반대 시위, 사드 배치 반대 등에 민노총과 운동권 출신의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이 대거 앞장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 풀이된다. 최근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와 유튜브에서 토론을 벌인 유시민 작가가 “미국은 엉망이다. 몇 십 년 전에는 세계 최고라고 부러워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건강보험료도 엉망이고 사방에서 총 쏴 죽이고 대졸자들은 빚더미를 안고 사회 나간다. 좋은 사회가 아니다.”라고 언급한 것도 본인이 미국에 가진 시각을 반영한 표현으로 여겨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국의 정치나 경제는 세계 최고수준인데 유시민 작가는 왜 그렇게 삐딱할까. 유시민 작가는 그래서 딸을 독일로 유학 보냈는지 몰라도 임종석 전 실장은 딸을 ‘엉망’인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운동권 세력은 민족을 우선하고 외세를 배격하다보니 친일, 친미 성향을 조금이라도 보였거나 보였다고 의심되는 사람은 ‘역사의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낙인을 찍는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한미 동맹을 맺기 위해 미국과 핏대를 올려가며 싸우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것은 무시하고 일단 ‘친미주의자이자 가짜 독립운동가’로 폄하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일본 육사를 나왔다는 이유 하나로 한국전쟁 때 북한에 맞서 싸웠고 ‘한강의 경제기적’을 세운 공은 모조리 지우려고 한다. 반면에 김원봉은 의열단을 이끌고 독립운동을 한 공이 크므로, 광복 이후 월북해 김일성 정권 수립과 한국전쟁 기간에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지내면서 우리 국군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수많은 호국영령의 원수라는 사실은 애써 축소하려고 한다.

과거 운동권이 중시했던 민족주의는 매우 폐쇄적이고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민족(nation)과 민족소속(nationality)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획득한 것으로 출생을 의미하는 라틴어 ‘natus’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민족은 한국사회에서 흔히 강조하는 ‘혈연과 지연’을 바탕에 깔고 있으므로 외부에 대해 배타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 ‘우리 민족끼리’가 최고이며 외세를 타도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에르네스르 르망은 <민족이란 무엇인가>에서 “민족을 앞세우는 애국주의는 통치 이데올로기를 위한 정치적 도구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독일의 히틀러는 ‘민족주의=애국심’이라는 주장으로 독일 국민들을 현혹해 정권을 잡았다. 실제로 민족주의가 맹목적인 애국심으로 둔갑하면 정치적으로 매우 크게 이득을 볼 수 있는데, 좌파나 우파나 극단적인 정치인들이 이를 적극 이용한다. 예컨대, 베네수엘라를 폭망하게 만든 좌파 포퓰리스트들은 “모든 원인은 미국 때문”이라고 화살을 돌리기도 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전 세계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에서 매우 구시대적인 관념이면서 열린 세계시민의 정신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다문화 가정이 많아진 우리 사회에서 결코 환영할만한 대상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영화 <암살>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영화 <암살>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만을 다루고 있기에 김원봉의 광복 이후 활동을 잘 몰랐던 사람들이 이념과 정파에 관계없이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차원에서 영화 자체에 호감을 갖고 봤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김원봉의 광복 이후 활동이 널리 알려진 이후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확 바뀌었다. 김원봉의 과(過)와 공(功)을 따질 때 역사적 과오가 매우 컸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상훈법에서도 “국가안전에 관한 죄를 범한 사람으로서 형을 받았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서훈을 취소”하고 있다. (상훈법 제8조 1항)

운동권 세력은 일본에 맞섰다는 이유 하나로 김원봉의 과오에 대해 관대했고 국민 통합을 이뤄야할 문재인 대통령도 여기에 동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친일잔재 청산은 너무나 오래 미뤄둔 숙제...민족정기 확립은 국가의 미래”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인구의 95% 이상이 광복 이후에 태어났는데,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친일했다고 그 후손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연좌제를 하자는 얘기와 같은 의미가 된다. 여권도 김원봉에 대해서 ‘1945년 이전만 기억하자’는 식으로 물 타기를 하는 모습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좌익 공산주의는 민족의 입장에서 괜찮고, 친일은 반외세 차원에서 용서가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그 연장선상에서 현충일에 18만1천위의 장병과 순국선열이 잠들어 있는 현충원에서 김원봉을 추켜세운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민족 대 친일’의 정치 프레임, 즉 보수세력은 친일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임으로서 향후 총선과 대선에 나서겠다는 의도도 담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이념과 역사 전쟁으로 소득주도성장 등에 따른 경제 실정을 덮겠다는 술수도 엿보인다)

문재인 대통령과 여권이 그렇게 이념과 역사 프레임을 짠다고 김원봉의 과오가 덮어질 수 있을까. 잘 검증되지도 않는 친일 프레임으로 공격하는 게 광복 이후 태어난 세대들에게 얼마나 먹힐 수 있을까. (여권에도 친일 조상을 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데)
운동권이 그렇게 강조하던 민족주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김원봉은 같은 핏줄을 지닌 형제자매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그 유족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공산주의자이자 반민족주의자’였다. 그가 저지른 역사적 과오는 아무리 닦고 문지르고 분칠을 해도 우리 역사에서 절대 지워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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