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는 조선일보의 작문?

국내 언론계에서 대표적인 작문기사로 의혹 받아 온 ‘이승복 사건’이 오는 16일 민사소송 선고를 앞두고 또다시 세인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법정까지 간 이승복 작문기사 의혹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민사25부는 지난 2일 조선일보사가 김주언 현 한국언론재단 이사와 김종배 현 시사평론가를 상대로 제기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 대해 6월 16일 최종선고를 내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는 지난 98년 11월 김 이사와 김 씨를 상대로 각각 1억원씩의 손배소송을 제기하였다. 이에 앞서 김주언 이사와 김중배씨는 지난 2002년 9월 3일, 같은 사건의 1심 형사소송에서 각각 징역 6개월과 징역 10월을 선고 받은 바 있다. 피고인측은 즉시 항소를 제기하였고, 금년 1월에 열리기로 돼 있던 형사 항소심 결심공판은 재판부(서울지법 형사항소 9부·부장 구만회)가 “판결을 내리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있어 심리를 재개키로 했다”고 밝힌 뒤 현재까지 무기한 연기되고 있다. 서울지법 형사9단독(부장판사 박태동)은 당시 “피고인 김주언(당시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은 98년 8월과 9월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연 오보 전시회를 통해 이승복군이 하지도 않은 말을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취재도 없이 임의로 만들어 기사화 했다고 주장했고, 또 미디어오늘 김종배 전 편집국장은 92년 가을 한국기자협회가 발행하는 <저널리즘>에 이승복군의 신화가 조작됐다는 글을 기고했으나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과 현장취재 사진으로 보아 이를 증명하기 어렵다”며 실형을 선고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사건’은 지난 1968년 12월 9일 발생했다. 울진·삼척을 통해 침투했던 북한 무장공비 5명은 강원도 평창의 한 산골 마을에 숨어 들어갔다가 어머니 주대하(당시 33세) 차남 승복(당시 10세) 3남 승수(당시 7세) 4녀 승녀(당시 4세) 등 4명을 살해하고, 아버지 이석우(당시 35세)씨와 장남 승권(당시 15세, 호적상 이름은 ‘학관’) 등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사건 발생 뒤 당시 일간지 기자들은 10일 낮쯤 현장에 도착했으나 이미 출동해 있던 군·경에 의해 현장이 수습돼 있었고, 부상자들은 혼수상태에 빠져 인근 병원으로 실려 간 상태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자들은 군·경과 주민들의 증언, 사건 현장 등을 토대로 기사를 작성해 송고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유일하게 이승복 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며 무장공비들에게 항 거하다가 살해당했다고 그해 12월 11일자 신문에 기사를 실었다. 조선일보는 당시 신문에서 “장남 승원 군에 의하면 강냉이를 먹은 공비들은 가족 5명을 안방에 몰아넣은 다음 북괴의 선전을 했다. 열 살 난 2남 승복 어린이가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얼굴을 찡그리자 그 중 1명이 승복 군을 끌고 밖으로 나갔으며 계속해서 주 여인을 비롯한 나머지 세 자녀를 모두 끌고 나가 10여m 떨어진 퇴비더미까지 갔다. 공비들은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벽돌만한 돌멩이로 어머니 주씨의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쳐 현장에서 숨지게 했으며 승복 어린이에게는 ‘입버릇을 고쳐 주겠다’면서 양손가락을 입 속에 넣어 찢은 다음 돌로 내리쳐 죽였다”고 보도했다. 24년 뒤 “이승복 사건은 작문기사” 의혹 제기돼 ‘이승복 사건’은 이후 반공을 내세웠던 박정희 정권에 의해 영웅 신화가 됐다. 이승복 군의 얘기는 책과 영화, 만화, 영화로 제작되었고, 이승복 동상이 전국 초등학교에 세워졌다. 하지만 사건 발생 24년 뒤인 지난 92년 김종배 전 미디어오늘 편집국장은 한국기자협회가 발간하는 <저널리즘> 가을호에서 ‘유일한 현장 목격자인 장남 이승권 씨가 조선일보 기자를 만난 적이 없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이승권 씨는 동생 승복 군이 살해된 후부터 원주에 있는 병원에 후송되기까지 당시 사건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으며, 김 전 국장은 이를 근거로 당시 조선일보가 승권씨의 말을 듣고 기사를 썼다고 주장한점을 들어 당시 조선일보 보도가 작문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후 언론개혁시민연대는 98년 8월 ‘언론계 50대 허위·왜곡보도’를 선정·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대표적인 작문기사로 지목했고, 그 해 8월~9월에 서울·부산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조선일보가 직접 현장 취재” VS “조선일보 기자는 현장에 없었다” 조선일보는 역사적인 특종사건이 작문기사 논란에 휩싸이자 98년 9월부터 반박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했던 김 전 국장과 전시회를 주도한 언론개혁시민연대 김주언 이사(당시 사무총장)를 상대로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승복 사건’에 있어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부분은 당시 이를 취재해 보도했던 강인원·노형옥 당시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에 있었는가의 사실 여부이다. 조선일보는 당시 조선일보 기자들이 가장 빨리 현장에 도착해 사건을 취재한 뒤 관련 기사를 서울로 송고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관련 사건의 1심 형사재판에서 강 씨 등이 담긴 사진 15장을 증거로 제출해 승소했다. 반면, 재판과정에서 기자들 가운데 현장에 처음 도착했다고 밝힌 강한필·이봉섭 경향신문기자들은 “취재를 하고 내려오는 도중에 김대환 대한신문 기자와는 만났으나 평소 알고 지내던 조선일보 기자들은 만나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 전 국장 등은 “1심에서 조선일보의 승소를 이끈 15장의 사진도 나중에 제3자를 통해 입수한 것으로 보이며, 사진 속 인물도 강씨가 아니다”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승복 동상의 수난 ‘이승복 기사작문 의혹’ 이후 전국 각지에 세워 있던 이승복 동상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지난 달 경남 통영시가 그동안 존폐 논란을 빚던 충무대교 미수동의 ‘이승복 상’을 철거했다. 통영시는 “이승복의 당시 언론보도에 의문이 제기되어 문제의 소지가 있고, 동상이 해양관광도시의 관문에 위치해 도시 이미지에도 맞지 않아서 기증자인 통영팔각회와 협의해 철거했다”고 밝혔다. 시는 철거한 동상을 근처 초등학교에 기증할 뜻을 비쳤으나 학교 쪽에서도 거절하고, 마땅히 세울 데도 없어 파쇄 조치했다. 한편 민주노동당 남원 연수원 운동장에 서 있던 이승복 동상은 어린 민주투사 전태일로 변신했다. 민노당이 3년전 폐교가 된 이 초등학교를 연수원으로 구입할 때 한 당직자가 학교 운동장에 서 있던 이승복 어린이의 동상 아래에 새겨진 이름을 지우고 '전태일'이라고 새겨 놓아 오늘의 '어린 전태일'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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