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술서 ‘작성 시점’ 공개되며 유시민 ‘거짓말’ 확인…沈, 이해찬까지 압박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좌)와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우)의 모습. ⓒ시사포커스DB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좌)와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우)의 모습. ⓒ시사포커스DB

[시사포커스 / 김민규 기자]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쓴 유 이사장의 진술서 내용을 놓고 상호 공방을 벌여왔었는데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세간의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 심재철·유시민, ‘누가 동료 밀고했나’ 쟁점 된 진술서 공방

두 사람 간 진실공방이 벌어지게 된 발단은 지난달 20일 KBS 2TV ‘대화의 희열2’에 출연해 “(1980년) 합수부에 끌려가 진술서를 쓰면서 창작에 대한 소질을 발견했다”고 했었던 유 이사장의 발언이었다.

이틀 뒤인 22일 심 의원은 “유시민은 역사적 진실을 예능으로 왜곡해선 안 된다”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데,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던 유 이사장이 체포된 뒤 작성한 진술서 내용에 대해 유 이사장 본인은 ‘창작’이라 표현했을 정도로 ‘별 가치 없는 내용’이라 자평한 반면 유 이사장과 동시대에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1980년 봄’을 겪었던 심 의원은 유 이사장의 진술서가 자신이 유죄판결을 받게 되는 데 역할을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루 뒤인 23일에도 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1980년 6월 11일, 12일 최종 정리된 유 이사장의 합수부 제출 자필 진술서엔 서울지역 학생회장단 22명과 민청협 회장 이해찬 등 복학생 8명을 비롯한 77명의 이름이 들어있었을 뿐 아니라 서울대 핵심 운동권의 동향을 포함한 구체적 행동도 담겨 있어 사실상 계엄당국이 사태 처음부터 파악할 수 있었다며 유 이사장을 거듭 비판했었는데, 그러자 유 이사장도 “그 진술서를 잘 썼다고 생각한다. 감출 것은 다 감췄고 부인할 것은 다 부인했다”며 심 의원 주장에 반박하고 나섰다.

유 이사장은 노무현재단 유튜브 채널인 지난 2일 ‘1980 서울의 봄, 진술서를 말할레오’ 영상에서 “그때 학생회장이나 대의원회 의장은 늘 잡혀간다는 것을 전제로 활동했다. 잡혀서 진술하게 되면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노출할지 이미 사전에 얘기가 됐다”며 “계엄사 합수부에서 쓴 진술서에 신계륜, 이해찬 등 다 아는 것만 썼다. 다른 내용도 비밀이 아닌 별 가치 없는 진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잡혀가면 첫째로 학내 비밀조직을 감춰야 하고 두 번째로는 정치인들과 묶어 조작하는 것에 휘말리면 안 되는데 당시 김대중 야당 총재와는 절대 얽히면 안 됐다”며 “(진술서 쓴 이후) 500명 가까운 수배자 명단이 발표됐는데 저희 비밀조직(서울대 농촌 법학회) 구성원은 단 1명도 그 명단에 올라가지 않았다. 김대중 총재의 조종을 받아 시위했다는 진술을 계속 요구받았지만 알지 못한다고 버텼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유 이사장은 동료들을 밀고했다고 주장하는 심 의원에게 진술서 동시 공개를 제안하면서 정면으로 맞섰는데, 이에 심 의원도 지난 6일 당시 합수부에서 조사받으며 작성했던 본인과 유 이사장의 진술서 원본을 공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물리적 근거로 이를 제시했다.

특히 심 의원은 “유시민의 진술서는 심재철의 공소사실 핵심 입증 증거로 활용됐고 제 이름은 모두 78번 언급됐다, 제 공소사실의 90%를 입증해 증거의 요지로 판시됐지만 유시민은 불기소로 석방됐다”며 “(유 이사장이) 학생회 간부로 공개된 사람들에 관해서만 진술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복학생 등의 가두시위 독려 등 학생운동권 내부 움직임 등을 진술해 다른 학우들에게는 직접적인 위협의 칼날이 됐다”고 꼬집었다.

그 이유로 심 의원은 유 이사장의 진술서에 거론된 77명의 동료 중 그때까지 체포되지 않았던 18명은 유 이사장의 진술 직후인 6월 17일 지명수배 됐다는 점과 이 중 15명은 심 의원 본인의 유죄를 입증하는 합수부 진술을 해야만 했었다면서 자신의 진술서가 별 영향이 없었다는 유 이사장에 일침을 가했다.

◆ 양측 설전, 공개된 진술서의 ‘작성 시점’ 놓고 희비 엇갈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80년 당시 자필 진술서 ⓒ심재철 의원 페이스북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80년 당시 자필 진술서 ⓒ심재철 의원 페이스북

사실상 평행선을 달려오던 두 사람의 설전은 심 의원이 물적 증거를 공개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는데, 결정적으로는 진술서의 작성 시점에서 어느 쪽이 틀린 발언을 한 것인지 분명하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핵심은 바로 ‘진술서 작성 시점’으로, 진술서가 완전히 공개되기 이전인 지난 1일 유 이사장은 심 의원의 페이스북 글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제가 추측하기에 (심 의원이 문제 삼은) 그 진술서는 최소한 7월에서 7월 중순 이후에 쓴 것”이라고 발언했었는데 심 의원이 6월 30일에 합수부로 잡혀왔기에 그 이후에 쓴 진술서여서 자신의 진술서 때문에 잡힌 게 아니라 그 시점에 이미 잡혀온 심 의원이 먼저 실토해 여기에 맞춰 쓴 내용일 뿐이란 설명이었다.

하지만 지난 6일 심 의원이 자신의 진술서와 함께 원문 전체를 공개한 유 이사장의 진술서엔 7월이 아니라 심 의원이 체포되기 이전인 6월 12일자로 표기되어 있었으며 지장까지 찍혀 있어 그간 7월경이라고 반박해온 유 이사장의 주장은 졸지에 설득력을 잃은 모양새가 됐다.

이 진술서를 공개하면서 심 의원은 “(유 이사장 진술서를 지난 1995년 확보한) 그때 비로소 유시민이 검찰 측 참고인이었다는 사실과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유죄 판결의 핵심 증인으로 판결문에 판시되었음을 처음 알았다”고 밝혔는데, 원본이 공개된 지 하루 뒤 유 이사장은 “진술서는 앞부분부터 다 거짓말이고 합수부 수사관들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도록 성의 있게 진술하는 게 중요했다”고 기존 입장을 반복했을 뿐 진술서 작성 시점이 자신의 주장과 달랐던 데 대해선 별 해명이 없었는데, “심 의원을 상대로 법적 대응을 할 생각도 없다. 학생회 간부가 다한 것으로 진술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만 이해해주면 된다”고 덧붙여 한 발 물러난 자세를 취했다.

확실한 물적 증거의 등장으로 자신의 발언이 일단 신빙성을 잃게 됐기 때문인지 이날부턴 유 이사장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지원사격에 나서며 심 의원과 2라운드를 이어갔는데, 7일 81학번인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S형에게’란 페이스북 글에서 심 의원을 겨냥 “총학생회장이었던 형이 84년 복학해선 왜 복학생협의회장을 맡지 못하고 유시민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는지 스스로 잘 알지 않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유죄 판결에 있어서 핵심 법정 증언이 바로 형의 증언”이라고 주장한 데 이어 같은 날 유기홍 전 민주당 의원까지 “유시민은 조직을 지켰고 심재철 검거 이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조작이 완성됐다”고 유 이사장 손을 들어줬다.

이 뿐 아니라 77학번으로 심 의원과 서울대 동기인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마저 “마뜩찮은 몇 줄을 찾아내도 그건 고문의 정황증거지 밀고자란 증거는 될 수 없다”며 유 이사장을 두둔했는데, “자술서를 어떻게 썼든 당시 학생·정치·재야운동 동향은 전두환 군부의 정보망에 이미 다 들어 있었다”고까지 주장해 아예 그간의 논쟁 자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 이해찬으로 전선 확대됐지만 李, 심 의원에 무대응 일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작성한 1980년 당시 자필 진술서 ⓒ심재철 의원 페이스북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작성한 1980년 당시 자필 진술서 ⓒ심재철 의원 페이스북

하지만 심 의원은 윤 의원을 꼬집어 84년 서울대민간인프락치 사건 때 유 이사장과 공범이어서 두둔하는데다 (윤 의원이) 80년 상황도 알지 못하는 81학번 출신이라고 반박하는 등 적극 응수하는 한편 지난 24년간 꺼내지 않았던 진술서 원본 공개를 반전 카드 삼아 전선을 더욱 확대하고 있는데, 같은 날(7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01명의 민주화 인사 행적을 검찰에 진술했다”며 이제는 이 대표까지 압박하고 나섰다.

급기야 14일에는 이 대표의 진술서를 PDF파일로 정리해 ‘동료 선후배 101명을 표로 만들어 진술한 이해찬씨’란 보도 자료까지 배포하면서, 6월 30일에 심 의원 자신이 잡혔고 이 대표는 그보다 앞선 24일에 잡혔음에도 1998년 DJ 정부 집권 직후 “내가 늦게 잡혀 심재철이 써놓은 것에 전부 끼워 맞혀졌다”며 사실상 밀고 책임을 자신에게 뒤집어씌웠다고 이 대표에 직격탄을 날렸다.

다만 이 대표는 이미 90쪽 진술서 공개로 ‘거짓말 논란’에 휩싸여버린 유 이사장 사례 때문인지 이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심 의원 관련 질문이 나와도 “제가 합수부에서 조사 받고 고문당하고 (해서 상황을) 안다. (심 의원은) 후배되는 사람인데 제가 회고록 쓸 때 말할 것”이라고만 답변했을 뿐 본격 대응할 뜻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사실 심 의원과 이 대표는 1980년 ‘서울의 봄’ 당시에도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하다가 신군부의 공수부대 투입 검토 소식이 전해지면서 각각 시위를 자진 해산하자는 온건파와 이를 반대하며 해산하지 말자는 강경파로 입장이 엇갈렸던 바 있는데, 심 의원이 김대중내란음모 사건 유죄 판결을 지난달 19일에야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게 됐을 정도로 유 이사장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이 대표 등 과거 함께 민주화운동을 해왔던 인사들에 대해 남은 앙금이 오랫동안 풀리지 않아왔기에 이 같은 공방이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유 이사장조차 90쪽 진술서 공개 이후 직접적인 설전을 피할 뿐 기존 태도에서 달라진 게 없다는 점도 심 의원이 계속 공방을 이어갈 수밖에 없게 하고 있는데, 실제로 지난 14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유 이사장은 사석에서 둘이 따로 만날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굳이 그러고 싶진 않다”면서도 “관련자들이 그것에 대해 얘기한 적 없는데 자꾸 왜 본인이 꺼내나 안쓰럽다. 나한테 조금의 잘못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내가 한 잘못 이상의 비난을 누군가 한다고 생각하면 본인으로선 억울하다 느낄 수 있겠다”라고 입장을 내놨다.

그래선지 심 의원도 사흘 뒤인 17일 BBS라디오 ‘이상휘의 아침저널’에 출연해 ‘굳이 만나고 싶지 않다’는 유 이사장을 향해 공개토론 할 수도 있다는 의사까지 드러내면서 “유 이사장이 말을 안 해서 비밀조직을 지켰다? 그게 아니고 당국이 워낙 몰랐기 때문에 안 물어봤던 것”이라고 공세수위를 한층 높이고 있는데, 24일에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서의 핵심인 자금 교부 문제를 파고 들며 자신이 DJ 아들인 김홍일 등의 허위진술로 자신이 유죄 판결을 받게 된 것이라고도 주장해 이번을 계기로 40년 가까이 된 이사건의 진실이 확실하게 규명될 수 있을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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